가상칠언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들은 한 복음서에 한꺼번에 모두 전해진 말씀이 아니라 각 복음서가 따로 전하는 말씀을 모아서 후대의 사람들이 ‘가상칠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이 일곱 마디의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을까요? 오래 전부터 이런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상칠언이 거꾸로 인간은 누구인지, 인간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과 예수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 말씀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23:34)
희랍의 철학자 솔론(Solon)은 아테네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 여우처럼 영리한데 일단 뭉치면 너무나 우둔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비단 아테네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하지 못하는 일들도 여럿이 함께 모여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통 때는 멀쩡하고 예의도 바른 사람들이 예비 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을 할 때는 지나가는 여인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이상한 말을 던지기도 하고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기도 합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들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을 때는 서슴없이 합니다. 한국의 고질적인 지역감정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동향 사람들이 모이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 되어 “우리가 남이가!” 가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간음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을 둘러싼 군중들도 그랬습니다. 만일 혼자 있었으면 그 여인의 사정도 들어보고 공감되는 면에는 공감도 하고 동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이 되어 모여 있으니 모두 돌을 들고 여인을 내려치려 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했던 군중들이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빌라도에게 외쳤던 군중들도 모두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보입니다. 군중심리가 얼마나 강했으면 유대인들 입에서 “만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은 시저의 충신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했다고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아마 군중 틈에서 누군가가 “저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말했다.” 라고 동정하는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군중심리는 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저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처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살려주시겠지.” 라고 비틀었습니다. 또 누군가가 “저 사람은 병든 사람들을 많이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들도 구해줬어요.” 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 말도 비틀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군중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친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말씀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누가 23:43).
오랫동안 이 말씀은 ‘요행’과 관련된 말씀이거나 ‘마지막 순간에 한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지나친 선심으로 읽혀왔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중들도 이제는 그 일에 싫증나서 흩어졌습니다. 제자들도 이미 대부분 자리를 뜬 지 오래였습니다. 몇몇 군인들이 예수님의 숨이 멎기를 기다리며 그분 옷가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누구도 예수님을 부르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가장 외롭고 비참했던 순간에 그분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장 믿어지지 않았을 때 그분을 믿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이 강도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의 이름에 내 이름을 넣어봅시다. 그래도 이를 요행을 바라고 던진 말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이를 예수님의 도에 지나친 선심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범죄자들이, 얼마나 많은 범죄자의 부모들이 이 이야기에서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자녀를 둔 수많은 부모들이 이 말씀에서 희망을 얻었을 것입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축복받은 도둑이여, 말하라.
눈 깜빡할 사이에 낙원으로 들어간,
멀쩡한 날에 하늘나라를 훔친 자여,
너의 뜻을 이루려고 무슨 수를 썼는가?
무슨 무기를, 무슨 마법을 썼는가?
“사랑과 믿음이라오.”
복받은 도둑이여, 말하라!
어떻게 가시관을 왕관으로 볼 수 있었나?
어떻게 그 비참함 속에서 십자가의 왕궁을 보았는가?
어떻게 죽어가는 자에게서 하나님을 알아낼 수 있었는가?
“슬픔의 광경을 봤기 때문이라오.
나는 그의 고통 때문에 그가 하나님임을 알아보았소.
그 모습에서 나는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볼 빛을 보았소.
그 사랑에서 나의 슬픔이 위로를 받았다오.“
세 번째 말씀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
선교 초기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불경한 종교, 불효의 종교라고 낙인찍혔었습니다. 제사를 금지한 조치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매, 어미나 아비나 자식을 버린 자는 복을 받으리라.” 같은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낙인이 찍히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걱정이 되어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두고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부모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내 형제요 부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얘기도 거의 없고 다만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좀 있을 뿐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가족들을 멀리하셨을까요? 혹시 그랬을지 모르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얘기가 바로 가상칠언 중 세 번째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생면부지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세 번째 말씀에 와서 비로소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때 십자가 밑에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온 구레네 시몬과 몇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세 명의 여자들과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제자들이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반발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구세주의 어머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감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위치를 낮추려는 어떤 시도도 무력하게 만드는 사랑의 힘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입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을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이루려고 작정하고 구세주를 아홉 달 동안 태에 품고 있었던 예수님의 어머니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생애 내내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따라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그녀만큼 깊이 이해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저 그녀는 십자가 밑에 서 있었다고 했다. ‘서 있었다.’ 라는 보통 동사가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동사가 이토록 깊은 감정을 드러낸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갖게 된 신앙보다 더 굳건한 신앙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갖게 된 희망보다 더 찬란한 희망도 없습니다. 십자가와의 대화를 통해 생겨난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없습니다.
네 번째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15:34).
보통 이 말씀은 예수님이 외친 마지막 고통의 외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아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극적인 최후입니다. 세 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채 숨을 쉬셨던 시간은 세 시간이었습니다. 보통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들이 적어도 한 나절 정도는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불과 세 시간 만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분이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으셨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의식이 있는 동안,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지나온 나날이 떠올랐을까요?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을까요? 아니면 무엇이 생각났을까요? 혹시 예수님은 그 동안 줄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병상에 누워 죽어가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하며 시편 23편 말씀을 외우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 예수님도 평소에 자주 외우던 성경말씀을 떠올리셨을까요?“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죽은 영혼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마지막 아픔을 참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의 죄 때문에 버림을 당해야하는 비통에 빠져 외친 것 같은 이 말씀은 사실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그러나 이미 기운이 다 빠져나간 예수님은 첫 구절 이상을 외울 수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마지막 구절까지 외우셨더라면 확신에 찬 다음 기도로 마무리하셨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엘로힘을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를 경배하리니 만방을 다스리는 이, 왕권이 엘로힘께 있으리라. 땅 속의 기름진 자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오고 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대대에 전하리라.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 오는 세대에 일러주리라.
다섯 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 (요한 19:28)
예수님은 정말 목이 말랐을까요? 그랬겠지요. 심한 출혈 때문에 갈증이 극에 달했겠지요.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불쌍히 여긴 한 로마 군인이 그분께 마취제가 썪인 신 포도주를 줬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맛보신 후 거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진통제 역할을 했던 신포도주를 거부하심으로써 당신이 받아야 했던 고통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받기 위해서였으며, 둘째로 예수그리스도를 진정 갈급하게 만들었던 갈증은 신 포도주로 해소할 수 없었던 내적인 갈증이요 영적인 갈증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서 목마르다 하신 주님. 주님의 입에는 아마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까.......” 라는 시편 42편의 노래가 맴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값을 치르고 있으신 주님의 부르짓음 입니다. 그 순간이 나의 죄를 대신지신 대가를 치르는 순간입니다.
여섯 번째 말씀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성경은 이 말씀이 큰 소리로 외쳐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작 33세의 나이에 죽어간 분의 외침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인생의 성취가 삶의 시간적 길이에 달려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줍니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아쉬움 없이 ‘잘 살았다.’고 말할만한 삶은 어떤 것일까요? 부와 명예를 얻은 삶일까요? 아니면 전도서가 말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산 삶일까요? 하늘이 주신 길이만큼 누린 삶을 잘 산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목적을 이룬 사람이 잘 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니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너무도 적절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고통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됐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예언한 것과 십자가에 달려죽으셔서 마귀를 이기고 믿는 자에게 새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는 천국을 알지도 못하는데 이제 천국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어둠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고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습니다. 이것이 분명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므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몸짓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루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일곱 째 말씀 “아버지여,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 23:46)
이 말씀 역시 시편 31편 5절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일이겠습니까? 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죽는 것이 잘 죽는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았을 때 삶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면 그 사람을 잘 죽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셨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도 당신 영혼을 하나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살아 계셨을 때 늘 하나님과 동행하셨던 것처럼 죽음을 넘어서도 그렇게 동행하시리라는 믿음이 이 마지막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은 이렇게 당신의 신앙과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 설때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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