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호스피스에 대한 자료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로버트 풀검 지음 / 이계영 옮김, 2001. 김영사
발표 : 이상회목사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목사, 화가, 바텐더, IBM 세일즈맨, 미술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풀검은 우리네 일상생활 속에 묻혀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엮은 글들로 웃음과 여유를 지구촌 구석구석에 퍼뜨리고 있다. 풀검의 에세이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너무 무겁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은 그의 에세이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바쁜 사람들에게 명상의 여유와 기쁨을 선사해 준다.〈제 장례식에 놀러오실래요?〉는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의식(儀式)을 통해 새롭게 바라본 그의 최신작으로, 수백회의 결혼식과 장례식, 입학식, 졸업식, 동창회, 각종 모임과 영안실의 경험들을 통해 이루어진 글이다. 현재 그는 시애틀의 선상가옥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유쾌한 철학자 로버트 풀검이 장례식 속에서 찾아낸 삶의 해답과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 탄생식과 결혼식,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 입학식과 졸업식, 동창회, 각종 모임 등 우리의 매 순간 순간은 의식(儀式)과 축제로 이루어진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는 화해가 있다면 싸움마저도 축제다. 그런데 왜 죽음은 우리의 교과과정에 빠져 있나? 왜 장례식은 예외인가? 결혼식과 생일에 초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제 여러분과 함께 장례식에 가려고 한다. 눈물이 아닌 축제로서의 장례식, 웃음과 반전이 있는 삶의 절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마사 카터의 장례식 스케치
마사 카터는 전직 교사로서 여든 살에 죽었다. 그는 장례식을 스스로 계획했으며 의식은 무덤 곁에서 위임 형식으로 치루어졌다. 언덕 위의 아름답고 조용한 오래된 공동묘지는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나무가 우거져 있고 이른 봄 꽃이 피어있는 4월이었다.
무덤 위로는 진초록 차일을 쳐 놓은 것이 보였으며 삼면에는 갈색 접는 의자들을 놓아 조객들이 앉도록 되어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거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밝은 빛깔의 봄옷이나 꽃무늬가 든 옷을 입고 있다.
또한 전통 재즈 밴드가 트럼펫, 트롬본, 튜바, 클라니넷, 큰북 등을 앞세우고 느리고 엄숙하지만 춤 박자가 느껴지는 곡조를 연주하며 묘지에 난 샛길로 걸어오고 있다. 밴즈는 묏자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선 채 연주를 마치며 ‘아멘’ 곡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자 목사가 일어나 무덤 맞은편 사람들을 향하더니 전도서를 읽고 장례식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마사 카터가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치밀하게 세워 놓은 사후 대책과 자신의 장례가 어떻게 치러지면 좋겠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한 부탁을 설명한다.
이어서 마사 카터의 계획에 의해 순서를 맡은 맏손자 할란 에덤스가 나와 할머니의 연보를 소개한다. 그리고 카터의 제자인 리처드 헤이븐즈 박사가 그녀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트위드 슈트에 조끼를 갖추어 입었는데 검정과 흰색으로 된 굵은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분홍과 노랑이 섞인 꽤 야해 보이는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 넥타이는 카터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에서 연두빛 리넨 재킷을 꺼내 입고 주머니에서 빨간 고무로 된 어릿광대 코를 꺼내 제 코에 갖다 붙인다. 그 모습이 너무 멋지고 바보 같아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상과 분장이 카터의 장례식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카터의 가르침과 그녀의 제자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이어서 마사 카터의 고등학교 제자로 그녀의 아들인 알랜과 결혼해 며느리가 된 제니퍼 제이슨이 일어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어느날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에 관하여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카터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식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회고한다.
제니퍼 제이슨의 이야기가 끝난 후 목사는 밴드의 트롬본 주자인 프레드 앰블러를 소개한다. 그는 카터와의 만남에 대해 말한 후 자신의 장례식에 밴드가 와서 연주해 줄 수 있느냐고 했을 때의 당혹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가 춤을 좋아했기에 장례식장에 올라오면서 ‘엄마는 굿바이를 하셨어’를 연주했으며 좀 있다가는 ‘그 분의 눈이 참새 위에 머무시네’와 ‘성자들의 행진’을 할 것이며 접대 모임에서는 ‘좀 봐줘요’, ‘내 물통에 구멍 났어’, ‘메이킹 우피’, ‘머스크랫 램블’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내일 밤 6시에 노르웨이홀에서 푸트럭 디너(각자가 한가지씩 음식을 가져와 나누어 먹는 저녁)가 있고 9시까지 음악과 춤이 이어지는 행사가 있는데 이미 마사 카터가 입장료를 다 냈기 때문에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목사가 무덤 옆에서 자신이 장례를 주관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한다. 처음에는 좀 얼떨떨했으나 의식을 준비하던 마사를 도우면서 커다란 상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마사 카터는 ‘장례식은 간소해야 하고 생애와 소신의 정직한 반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들의 요구와 정서를 고려해서 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마사 카터가 남긴 편지를 소개한다.
지금까지 저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 인생에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문 앞에 죽음이 어른거리면 저는 따라나설 겁니다.
춤 신발로 바꾸어 신고 훌쩍 떠날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길.
안녕히, 사랑을 띄우며 - 마사.
마지막으로 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에 유족이 한 사람씩 와서 차례대로 흙을 뿌린다. 밴드는 ‘성자들의 행진’을 연주한다. 발걸음도 힘차게, 커다란 소리로 연주하며 길을 내려간다.
마사 카터의 죽음 준비
마사 카터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장례식을 계획하게 된 것은 첫 번째 남편이 죽음 후에 겪었던 힘들고 끔직한 경험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거의 두 해가 걸려서 죽은 남편과 관련되어진 일을 매듭짓는데 보냈다.
그녀는 첫 번째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제대로 새기지 못해 아버지 때도, 아들 때도, 두 번째 남편 때도 했다. 죽음에 대비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남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죽은 사람 가운데 70 퍼센트가 제대로 된 유언 없이 죽는다. 유언집행인이나 그 밖의 가족구성원에게 유언장이나 적절한 지침을 남기지 않고 죽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한테 혼란과 고통과 좌절감을 가장 큰 유산으로 물려주게 된다.
우기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그것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이 나중에 올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때가 오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남편이 죽었을 때 초안을 잡아 놓았던 유언장을 꺼내 변호사와 상의했으며 유산처리 계획과 관련해 새로 나온 책을 읽고 유언장의 어떤 대목을 고쳐서 유산 검인 때 드는 돈과 골치 아픈 일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가족과 여러 차례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관련 법규와 재산 처리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재산을 넘겨주는 데 필요한 절차와 자식들의 위임받게 되는 권리, 특히 가족의 동의로 지정 유언 집행인이 된 딸이 위임받게 되는 권리 따위에 관해 의논했다.
마사는 가족이 자신의 은행 금고를 열 수 있는 방법과 법정문서와 재정 관련 서류가 있는 장소를 확실히 알도록 했으며 유언장을 공증하러 변호사를 만나러 갈 때 딸과 함께 갔다.
그 다음에 마사는 지침 내역을 쓰기 시작했다. 그 지침의 내용은 장례식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밝히는 데서 시작하여 유산집행과는 관련이 없는 사유물의 처분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그것은 법정문서가 아니므로 생애의 마지막 해에 쓰는 감상적인 일기 형식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물질만을 남기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남기고 가야만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부쳐지도록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떤 것은 한 해 뒤에나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그녀가 죽고 한 해 뒤에 자식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죽은 마사’가 보내 준 꽃과 쪽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장례를 집례한 로버트 풀검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 후에 마사는 자기의 장례 절차에 손을 댔다. 한 솔직한 장의사와 상의를 하고 화장을 한 후 바다에 재를 뿌리는 쪽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개 생각을 제안 사항과 가능성 정도를 꺼내 놓고 자식들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자식들은 화장은 찬성했으나 재는 가까운 공동 묘지에 모셔서 송별 의례로 추도 모임 비슷한 의식을 갖고 싶어했다. 그것은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런 의식을 가지지 못해 서운한 눈치였으며 아버지의 재는 뿌려지지 못하고 아들 집의 벽장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자식들은 두 분의 재를 같은 곳에 묻고 싶어했으며 마사는 찬성을 했다. 그것은 자식들이 원하는 바였고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만민 장의사회에’ 가입을 했다. 회비를 내고 자기의 장례식 계획안을 적어 냈다. 마사가 죽었을 때 가족들이 한 것은 만민 장의사회에 전화를 한 것뿐이었다. 걱정과 근심과 혼란의 크나큰 짐이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마사는 자식들과 함께 공동묘지를 찾아가서 묏자리 하나를 골라 샀으며 돌아오는 길에 장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가 자식들에게 제안 사항을 말했는데 한 가지 강하게 주장한 것이 있다면 장례식은 삶의 축제여야 하기에 아무도 검은 옷을 입고 오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 검정 빛깔을 싫어하는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주치의와 변호사를 만나 마사는 생존 의지 한계선에 관한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호스피스협회에 연락해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길을 열어 두었다. 그녀는 가족에게 재정적인 면이나 정서적인 면에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신장 투석기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았다.
일 주일째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자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투석기를 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만우절 날 아침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사는 마지막 숨을 쉬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사는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슬기는 죽음을 무서운 적이 아니라 받아 들일만한 현실로 만들었다. 마사의 장례식은 두려움의 반대쪽에서 치러졌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고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죽음에 대비하는 것은 존재의 안전띠를 매는 것과 같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 때 사람들은 흔히 더 제대로 살고 죽는다.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나가는 글
죽음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다. 일반적으로 이 죽음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인 통과의례로 여긴다. 그러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것으로 치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사 카터는 이 죽음의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으며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겼다. 그녀가 죽음을 의미있는 축제로서 통과의례를 준비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유언장 작성하기
▷ 유언장 집행인 정하기
▷ 유언장 공증하기
▷ 감상적 일기 쓰기
▷ 장의사 선정하기
▷ 장지 선정하기
▷ 시신 처리 방법 정하기
▷ 장례 집례 부탁하기
▷ 임종을 위한 마지막 준비하기
죽음에 대한 이해
들어가는 말
인간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발전하며 성숙되고 노쇠하며 죽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지닌 정상적인 궤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o, 1450~1519)가 충만된 낮의 생활도 수면의 기쁨을 주지만 인생은 죽음의 기쁨을 준다"고 하였듯이,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생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인 것이다. 삶 한가운데서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고 죽음에 대한 질문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뜻이며 불가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일회성은 삶의 허무를 말하거나 삶의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아니고, 삶이 단 한 번뿐이기에 그 중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삶으로써의 죽음, 행복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희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성 프란치스꼬는 임종의 순간에 "형제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시다"라고 하여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임을 말하였다.
1. 죽음이란?
죽음에 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자도 의사도 신학자도 법률가도 죽음에 관해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며 단지 경험적, 이론적인 견해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여러 권위자들에 의해 정의되어 왔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공식적인 정의에 의하면 죽음이란 본질적으로 중요한 특징의 불가역적인 상실로 말미암아 생물체가 완전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2. 의학적인 죽음이란?
의학적 측면에서 다루는 죽음은 주로 신체적인 죽음에 해당되며 신체적 죽음은 다시 임상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임상적 죽음은 호흡이 없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이고 뇌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경우가 아니고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 소생을 주도하고 치료가 적절히 수행되면 정상적인 뇌기능을 포함하여 모든 신체 장기의 기능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 생물학적 죽음은 소생술을 하지 않거나, 소생술의 효과가 없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뇌의 신경과 모든 조직이 괴사되는 과정이다.
의학적인 죽음의 판정 기준은 죽음에 대한 개념의 중점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 과거에는 호흡 정지, 심장박동의 정지, 피부색의 변화, 근육의 이완과 경직이 죽음 판정의 지침이 되었으나 현대에 와서 의학이 발달됨에 따라 비록 뇌의 기능이 정지되어 있어도 인공호흡 보조기 등의 도움으로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의 활력 증상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죽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소생 할 수 없는 삶의 영원한 종말" 이라고 하였고, 한국어 대사전에서는 "사(死), 입몰(入沒), 사망(死亡), 사세(死世),끝장,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세포내의 연속적인 생리적 변화가 불가역적으로 되어 정지하는 상태"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의학협회내 '죽음의 정의 위원회'에서는 1983년에 죽음을 "심장 기능 및 호흡 기능과 뇌 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이라고 정의하였고, 1989년에 죽음을 "심장, 폐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도는 뇌간을 포함한 전 뇌기능의 불가역적 소실"이라고 재정의 하였다.
3. 죽음의 의미
티엘리케(Thielicke)는 죽음이란 인간이 신이 아닌 것을 잊지 말라는 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죽음의 의미를 유형별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1) 삶의 의미를 파괴시키는 부조리한 죽음 / 의미 있는 죽음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고 부조리한 죽음이 되겠지만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시간사용을 신중하게 하고 사려 깊게 의사결정을 한다면 삶의 의미는 물론 죽음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할 터인데 어떤 죽음을 원하십니까?
2) 아름답고 평온한 죽음 / 추하고 무서운 죽음이다.
용서와 화해 사랑으로 좋은 이별을 하는 아름답고 평온한 죽음을 맞는 경우와 미움과 증오로 서로에게 화를 내다가 이별을 하는 무서운 죽음을 맞는 경우가 있다.
3) 소멸로서의 죽음 / 전환으로서의 죽음이다.
소멸로서의 죽음은 임상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의식의 중단이다. 전환으로서의 죽음은 육체적인 형태를 갖는 존재에서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로 통과하는 하나의 변화이다.
4) 벌로써의 죽음 / 보상으로서의 죽음이다.
벌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서구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 그들의 이러한 원죄 때문에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죽음은 또한 하나의 보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즉 삶의 의미를 주는 것,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맞아들이는 하나의 도전, 신의 뜻,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4. 말기 환자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반응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응은 다른 모든 태도나 느낌처럼 개인에 따라 다르며 비록 비슷한 삶의 배경을 가진 자라도 서로 매우 다를 수 있다.
1) 두려움
① 미지에 대한 두려움 : 임종환자는 가까운 장래에 죽는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된다. 죽음에 대한 무지 ( unknown of death ) 는 다음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
* 삶의 과정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없을까 ?
* 이 세상 삶 후에는 어떤 운명이 될 것인가 ?
* 죽은 후의 나의 육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
*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
* 다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 생의 계획과 목표는 어떻게 되는가 ?
* 몸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
* 감정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
어떤 질문은 즉각적인 대답이 가능할 것이고 어떤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답이 가능한 것은 해 주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며 환자를 무거운 짐에서 부분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고 공포에 대처하고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②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 외로움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죽는 이들이 아픔과 괴로운 환경에 홀로 남게 되고 친밀한 환경(가정)에서 소외되고 병원이란 기관에 머물게 된다. 홀로 투쟁하고, 아픔을 견디고 두려움을 견디어야 한다는 외로움 고독 통증은 현대인에게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다른 이의 존재가 환자에게도 위로와 확신과 안정을 준다. 죽음 직전의 환자들이 괴로워하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해 준다면 가장 큰 위안이 되겠죠.
③ 가족과 친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 을 때 슬프고 두렵지만 죽어가는 환자는 전부를 다 잃어 버려야 하 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④ 자기 조절 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질병이 깊어감에 따라 자신의 신체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점과 타인의 힘을 빌리고 의존해야 하는 신체적인 부담, 정신적인 부담과 경제적인 부담감을 가져야 하며 자기 비하의 느낌과 과정을 경험해야 하는 두려움이다.
환자에게 남은 시간 중에도 어느 정도 조정과 조절이 가능함을 납득시키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격려하여 자아 존중과 자기 결정을 하도록 하고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의 비하에서 헤어 나오도록 해 준다.
또한 환자가 어떤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존중하며 의견을 물어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⑤ 육체의 상실과 무력감에 대한 두려움 : 육체는 자아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상실이나 불구, 기능 저하, 마비 등은 자기 자신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아상의 무너짐은 부끄러움과 부적절함, 죄의식, 사랑 받지 못함, 원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환자가 자기 상실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슬퍼하도록 기회를 주고, 또한 자아 존중감이나 자기 통합의 상실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지해야 한다.
⑥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 : 괴로움에 짓눌려 소리치며 죽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 그 자체이며 이러한 고통이나 통증은 수술 후의 통증과는 다르다. 환자가 통증 후에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아픔을 덜 느끼게 되지만 죽음의 고통은 완화가 없는 것이다. 즐거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고, 왜 이런 고통속에서 삶을 지속 해야 하는가라는 회의 속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통증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고통 중에 홀로 남게 되지 않고 통증이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환자는 휠씬 고통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다.
⑦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인간적인 접촉, 관계, 가족, 친구 관계의 상실, 육체의 구조와 기능, 자기 제어, 자신의 정체성을 협박하는 모든 의식의 상실은 그것들이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져온다.
자신의 삶의 부분으로 접촉하던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줌으로 인해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주며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고 전생애에 있어서 한 부분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⑧ 슬픔에 대한 두려움 : 임종환자는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실을 슬퍼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자기 자신을 잃는 것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조절 능력의 상실
․자립의 상실
․신체적, 심리적 기능과 사고 능력 상실
․중요한 사람과 외적인 것, 익숙한 환경의 상실
․자기 자신의 어떤 특성과 정체성 상실(자신의 유능함, 사랑스러운 면, 자신의 매력의 가치 상실)
․의미의 상실,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 상실
죽음의 한 과정으로서 상실을 생각할 때,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지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도록 하며, 특히 모든 상실이 전부 일어나지 않음을 알려 준다. 또한 예측할 수 있는 슬픔은 받아들이고, 만족감을 즐기며, 성취감을 느끼도록 삶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⑨ 퇴행에 대한 두려움 :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환자는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 더 현저해 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절 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마지막 행동과 관련이 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신체적 능력 저하와 의식의 불명료, 퇴행의 느낌, 현실감의 상실,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구분의 불명료, 시간과 공간의 느낌 상실 등이 환자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다.
환자가 편안하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도록 도와 주며, 자신의 위축됨과 승복을 인정하고, 심리적 죽음의 신호와 현실적 삶의 충격으로부터 피하도록 해 준다.
⑩ 절단과 부패, 매장에 대한 두려움 : 이러한 두려움은 특별히 죽음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으나 임종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두려움입니다. 가령 죽은 후에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이 매장된 후 벌레들에게 먹히는 두려움 등 죽음과 매장에 관하여 무서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학의 정확성과 조심성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2) 우울, 의기 소침
우울은 죽음에 직면한 환자의 또 다른 정서적 반응입니다. 임종환자의 슬픔의 한 부분으로서 즉각적인 상실을 인식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우울은 하나의 기전으로서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우울은 환자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도록 격려하며 허용하는 태도로 환자를 지지해 주면 도울 수 있습니다.
3) 분노와 적개심
분노와 적개심은 임종환자와 그 가족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는 미래를 지속할 수 있는데 자신은 미래의 삶을 박탈당한 것이다. 다른 이가 삶을 사는 동안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남은 시간 동안에도 아픔으로 괴로워해야 하며 주위 사람들의 생소한 반응으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환자는 '내가 왜 ?' 라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흔히 죽음 직전 불치병의 환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이시키기도 하며 이러한 감정들은 더 깊은 아픔과 슬픔, 공포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먼저 적개심이나 분노로서 대항하는 환자의 공격적인 행동 이면에 분노, 적개심, 슬픔, 공포 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환자가 자신의 분노, 적개심을 비판이나 판단 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수용해 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분노의 표현에 제한을 둘 수 있으나 만약 환자가 좌절과 분노를 말로 표현하거나 신체적 활동으로 나타내면 공격심의 정도는 감소될 수 있다.
4) 죄의식과 수치심
임종 상태에 있는 환자들은 흔히 죄의식을 갖는데 정당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과장하고 상상하게 된다. 우선 환자는 자신의 병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응보의 형태로 믿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으며 자연스러운 슬픈 감정의 체험도 어떤 이들에겐 죄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자신의 평정을 잃고 울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환자가 죄의식을 갖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은 죄의 결과는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가족들에게 지은 잘못들을 성찰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를 용서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고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자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준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자신의 신체적 혹은 심리적인 결함 때문에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다. 환자는 자기 신뢰, 자기 조절, 독립심, 자율성 등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도록 요구되며 이러한 이유로 환자는 질병 자체로도 부끄러움을 일으킨다.
환자를 돌볼 때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하고 환자의 사생활, 사적인 면을 최대로 보장해 주어야 하며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환자 스스로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일상의 생활은 환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좋다.
5. 말기 환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게 되는 심리단계
① 부 정 ( Denial )
임종에 가까운 대부분의 환자가 경험하는 첫 단계는 부정으로 환자들이 자신의 병이 치유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정은 환자의 언어나 행동에 의해 나타난다.
즉 "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 " 라는 표현을 흔히 하게 되고 환자는 진단을 잘못 내렸다는 생각과 좀더 나은 진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의사와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게 되며 환자는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부정의 단계에서 부정을 표현하는 환자의 말과 행동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심각하지 않게 증상을 이야기한다.
* 죽음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말이 나오면 즉시 말을 돌린다.
* 공개적으로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 비의학적 치료법이나 신을 통해 치유 받고자 노력한다.
* 자신의 질병이나 증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 증상이 자연히 없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치료를 거부한다.
* 신체나 외모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질병을 가벼운 것으로 이야기한다.
*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 어떤 병인지 알지만 자신은 꼭 회복될 것이라고 확언한다.
먼저 환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가족이나 의사 간호사) 환자가 부정의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환자에게는 부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다음 환자가 사실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병에 대해서 좀더 현실적인 견해를 갖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만일 환자가 그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이다.
② 분 노 ( Anger )
환자는 "하필이면 내가"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병원 직원에게 또는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분노의 단계는 가족들이나 직원들이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분노가 수시로 바뀌고 감정을 주위 환경에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나 간호사에게 자주 불만을 터뜨리며 의사에게도 불만이 많다.
환자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가족이나 간호사)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더 자주 환자의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우 간호사는 환자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환자의 이러한 태도는 주위의 건강한 사람들의 건강을 질투하는 것이며 일찍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환자는 자신은 곧 죽게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불평을 하며 주위로부터 관심을 끌려고 노력한다. 이때 간호사나 의료진이 환자의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사적인 일로 받아들이며 분노에 반응을 보인다면 환자는 더 심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며 환자의 적대적 행동은 심해질 것이다. 만일 간호사나 가족이 환자로 하여금 그의 분노를 표현하도록 한다면 환자는 편안해 하고 목적 없이 간호사를 자주 부르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관심을 받으며 그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을 알면 그의 목청은 한결 낮아지고 성난 요구도 훨씬 줄어들게 되며 자신이 아직도 가치있는 인간, 보살핌을 받는 사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활동이 허락된 인간임을 알게 될 것이다.
③ 타협( Bargaining )
첫 단계에서는 슬픈 현실을 대면할 수가 없고, 둘째 단계에서는 사람들과 신에게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나면, 환자는 타협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착실한 행동을 보이고 특별한 헌신을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소망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며칠이라도 좋으니 통증이나 신체적 불편 없이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타협은 대개가 절대자와 하는 타협들이다. 그래서 그 언약은 비밀로 붙여지거나 다른 말속에 언뜻 비치거나 원목실에서 사사로이 말하거나 한다. 자기 몸의 일부나 전체를 의학 발전을 위해 기증하겠다고 언약하는 환자들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언약이라는 것은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의료진은 환자의 행동이 미성숙하며 어린아이 같고 환상에 젖어 있으며 어른으로서는 적당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환자의 소망을 묵살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간호사는 이러한 행동이 정상적이며 환자가 다음 단계를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④ 우울( Depression )
회복의 가망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병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게 될 때, 증상이 더 뚜렷해지고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질 때, 환자는 더 이상 웃어넘기지 못하게 된다. 초연한 자세와 무감동, 분노와 격정은 머지않아 극도의 상실감으로 바뀌며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이 단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울증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반작용적인 우울증이라 부르며 이것은 과거나 현재의 손상과 관계된다.
환자는 부모 없이 남게 될 아이들에 관하여 또는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될 가족에 대한 걱정을 한다. 또 다른 우울증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 물건, 그 자신과 그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의 손실과 관련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예비적 우울증이며, 이 단계에서 환자는 아주 조용히 있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환자가 슬픔에 젖도록 놓아두어야 하며 그가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필요로 할 때 옆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혹은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귀담아 들어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이 좋다.
이러한 우울증에 빠질 때 환자는 별로 대화를 원하지 않으며 환자는 자기와 같이 느끼고 슬퍼하며 자기 옆에 있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⑤ 수용(Acceptance)
환자가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또한 앞서 기술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는 자기 '운명'을 두고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는 다음 단계에 들어간다. 그는 이전에 자기 심중을 거쳐간 감정들을 털어놓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산사람과 건강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분노를 이야기할 것이고 머지않아 자기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정든 곳을 잃게 되리라고 한탄할 것이며 또 어떤 기대를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환자는 대개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지며 감정의 공백기를 가진다.
수용을 행복한 감정의 단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임종환자가 일종의 평안과 수용의 단계로 들어감에 따라 그의 관심의 세계는 점점 좁아진다. 그로 인해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하고 때로는 문병객을 달가와 하지 않으며,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닐 때가 많다. 의사 소통은 언어보다도 무언의 대화로 바뀐다. 임종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침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침묵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뜻깊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어 가는 사람의 느낌을 수용할 때 환자와의 의사소통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버림받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큰 위로를 받게 되며 동시에 자신은 사랑 받고 있으며 값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시기는 환자 못지 않게 가족이 도움과 이해와 격려를 필요로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실제적인 환자의 임종준비에 대해 알려 주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의 상실감을 포용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돌보는 가족들은 세심한 배려와 사랑으로 환자가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환자도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수용의 자세로 남은 여생을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죽음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6. 죽음에 대한 실천적인 목회적 접근
오늘날 죽음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이다. 진정한 기독교 사상에서는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이고, 죽음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말며, 또한 죽음이란 우리 삶과 관계없는 것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에서 문득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인데,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도 아니고 죽음으로 우리 삶의 어느 것도 소멸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또한 죽음이란 우리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이미 우리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처럼 죽어갈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과 삶을 같이 나눌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에게만 매달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영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매운 맛을 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병원의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의 문제를 제일 처음으로 제기한 퀴블러로스가 죽음에 대한 접근을 하는데 중요하고도 바람직한 기본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은 죽음을 혐오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는 인간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죽음이 자기에게 결코 다가올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면서도 논리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혐오하고 있으며, 수많은 최신식 의료기구들을 통해서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주면서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죽음을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분석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 충격, 혐오, 분노, 비탄, 우울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망각하고 부정하며 거부하려한다.
죽음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 접근은 오늘날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신학이 이성과 합리, 머리와 사변 중심이었다면, 감정과 가슴 그리고 감정적 공명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죽음에 고생하는 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에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정과 공명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심리학의 시대에 살고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접근은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본다. 현실적으로, 목회자는 죽음이 임박함에 따라 임종자에게 여러 가지 반응이 일어남을 알게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오랜 투병 끝에 오는 해방과도 같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죽어 가는 사람은 임종이 지연되는 데 대하여 고통스러움을 경험하며 이것이 지속되지 않고 쉽게 끝나기를 갈구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이것과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다양한 상황 가운데서 목회자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깔려있는 감정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면밀하게 경청하여, 적당한 때에 죽음의 절실한 상황에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증거 해야 한다.
1.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공감 그 자체가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담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우리 자신도 상대방이 경험하고 있는 고독과 두려움과 아픔을 들어주고, 같이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느낌을 상대방이 갖지 못하면 더 이상의 효과적인 대화는 힘들어 지는 것이다.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죽음만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에 말이 없이 같이 옆에 있어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로를 받게되는 것이다. 이때 비록 환자가 죽음 앞에서 충격을 받고 이를 부정하거나 분노하게 될 때에도, 이를 억압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임을 이해하고 솔직히 그 감정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교회에 잘 나오던 신자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할지라도, 이 순간이야말로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야지, 그렇게 하면 어떻합니까?식으로 권위주의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어째서 내가 하필 이 몹쓸 병에 걸렸느냐?고 원망할 때, 그 투정을 들어주면서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셨던 것처럼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고통과 고독에 있는 자에게 목회자가 같이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이며, 이런 공감이 없이 내 자신의 죽음관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죽어 가는 자에게나 곁에 있는 유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이, 일반 목회에 있어서 처럼 죽음 앞에서도 목회자는 상대편의 입장에서 들어주는 일(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 롬12:15), 부드럽고 무조건적인 수용(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6:36), 내적인 일치와 감정의 소유(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의 자세가 필요하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증거하는 일(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마5:4)과 솔직함과 정직 그리고 필요할 때는 맞서는 자세도 필요하게 된다.
2.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으로 도와야한다.
CPE에서나 심리학에서는 단지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갖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진지한 대화는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목회자는 적절한 위로를 주기 위하여 항상 경청하여야 하며, 어떤 순간에는 말을 아끼면서 인간적으로 가깝게 있어주는 예민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에는 논리적인 변증법이나 장황한 설교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며,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에 인생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을 피하지 말고, 유한성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한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목회자는 죽음에 임박할 때가 영적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경험에서 알기 때문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사람들은 그 동안 자신을 방어하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죽음이란 위험할 정도로 파멸의 힘을 갖고 있는 동시에 또 한편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하는 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의 한계 상황 안에서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 순간에 목회자는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순간 책상과 도서관과 서적을 바탕으로 한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사변이나 이론이 정작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절망하고, 죽음의 문 앞에서 몸부림치는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수 있다. 이때 물론 임종을 앞둔 침상에서 피상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교회에 나가 본적이 없다는 이유나,
또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피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된다. 성령께서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심을 믿으면서 분명하게 또한 상황에 맞게 증거해야 한다. 만약 목회자가 이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목회자의 도움을 누가 필요로 하겠는가? 그것은 목회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죽음 앞에서 누가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때 비록 목회자가 비록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언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방은 대화 중에 목회자의 생각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고통을 나누는 목회자의 자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기회가 될 때 좀더 진지한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같이 나누며, 상대방의 생각을 신앙 안에서 바꾸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지옥과 천국, 죽음이 삶의 마지막, 영육의 죽음 또는 분리 등의 죽음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경우, 사소한 견해로 논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음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인생을 뛰어넘는 더 큰 존재인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으로 위로를 받게 해야한다. 예를 들어, 죽는 순간 영이 육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소박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우리의 죽음은 영육의 죽음이요 오직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성경에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 안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신자도 있겠지만,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 죄책감으로 우울해하거나 고독해 할 때에는 옆에 같이 있어주며, 손을 잡고 기도로 힘을 주며, 시편에 나오는 고통의 순간들(시30, 23등)을 읽어주며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울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이 있음을 얘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말(회개가 되었든 두려움에 떠는 울부짖음이 되었든)을 들어주는 가운데, 목회자는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얘기하며, 공포와 절망을 넘어선 상태에서 죽음에 임할 수 있도록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때 목회자 자신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 부활과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함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나가는 말
영혼의 목자로서 목회자는 죽음과 관련된 여타 직종과는 다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뛰어난 의료기술이 있지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속수무책이며,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호사도 법적 권리 문제나 죽어 가는 사람의 유언, 세금 문제나 재산 분배의 문제에 관해서는 필요한 것을 자문해줄 수 있으나, 생과 사로 분리되는 사별의 내면적인 아픔에 대해서는 할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장의사도 사후의 시신을 처리하는 데 대해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인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직 목회자가 대답해 줄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당사자들과 가족들이 목회자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목회자는 이에 대해 기독교 전통 안에서의 바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특권을 가진 목회자가 임종시에 하게되는 예배는 훌륭한 목회적 돌봄이 된다. 목회자는 언제, 어디서나 죽음을 외면하고는 목회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죽음을 직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자연 현상으로서 피할 수 없는 세력이요 비극적 현실인 죽음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임종을 맞도록 돕는 것은 목회자의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평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얼마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목회적인 예방 차원이 될 수 있으며, 위기의 순간에 죽음을 자신 있게 맞아들이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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