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란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을 기다리게 만든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씨처럼 그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시작된 일을 기다릴 때에만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따라서 기다림은 결코 무에서 유로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어떤 것에서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둘째로 기다림은 능동적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기다림이란 아주 수동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사건들에의해 결정되는 희망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런 수동성은 찾아볼 수 없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주 능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의 비결은 씨가 땅에 심기워졌다는 믿음,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이다. 능동적인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있는 그 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으며, 당신은 그 곳에 있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진 채로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늘 다른 어떤 곳에서 진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래서 정작 그 순간에는 그 자리에 없다.
그러나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살며 그 곳에서 기다리는 삶이다.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우리에겐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인 어떤 것,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다림 대부분은 소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새로운 직업, 날씨, 고통해소...).
우리의 기다림은 그런 소원들과 맞물려 있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많은 기다림은 끝이 있는 기다림이다. 대신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를 통제하는 방식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아주 특정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실망하고 절망으로 빠져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시간이 그렇게 힘든 이유이다. 우리는 소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뭔가 행동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소원들이 어떻게 두려움과 연관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샤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에게는 막연한 소원들(Wishes)이 없었다. 그들은 소망(Hope)으로 충만해 있었다. 소망은 아주 다른 것이다.
소망이란 어떤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지만, 그 성취가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우리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망은 항상 끝을 알 수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채 지속되는 기다림은, 삶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두려움에 의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사는 것이다.
영적 삶이란 능동적으로 그 순간에 거하면서 기다리는 삶이다. 우리의 상상이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제하는 일에 정신이 팔린 세상 속에서, 진정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급진적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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