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행동에서 수난으로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에서 나오는 핵심 단어는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넘겨주다’이다.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예수님은 넘겨줌을 당했다.
그러기에 이 ‘넘겨주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이 넘겨짐을 당하는 드라마는 예수님의 삶을 철저히 둘로 나누어 준다.
예수님의 삶의 첫 번째 부분은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분은 말씀하셨으며, 선포하셨고, 치유하셨으며, 여행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넘겨짐을 당하자마자, 어떤 일이든 당하는 사람이 되셨다.
그 분은 체포되었으며, 대제사장에게 이끌려 갔고,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다. 또 가시관을 씌움 받았으며,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 분이 어떤 제한도 가하지 않은 일들이 그에게 행해졌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난의 의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실 때, 단순히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 분의 말씀에는 또한 “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내게 행해지도록 허락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예수님은 행동뿐 아니라 수난을 통해서도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셨다. 그 분은 단순히 아버지가 하라고 보내신 일을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 분에게 행해지도록 허용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심으로써도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셨다.
수난은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할 일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 분의 고뇌는 단순히 죽음에 다가감으로 인한 고뇌는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기다려야만 하는 데서 오는 고뇌였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에게 의존하고 계신 그런 하나님의 고뇌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어렴풋이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반응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모든 행동은 수난으로 끝이 난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반응은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역의 신비요, 사랑의 신비요, 우정의 신비요, 공동체의 신비다.
이것들은 항상 기다림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정확히 그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로 억지로 사랑하게 하신 거라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새 생명
부활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수난과 기다림에서 피어난 생명이다.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수난의 한가운데서도 부활 생명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은 수동적인 희생자로 들리우셨고, 그래서 십자가는 황폐함의 표시가 되었다.
또한 그 분은 영광 가운데 높이 들리우셨고, 그래서 십자가는 동시에 소망의 상징이 되었다.
돌연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희생적이 된 그 순간, 예수님의 수난 가운데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신성이 넘쳐남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새 생명은 사흘째 던 날 일어나 부활 사건뿐 아니라, 넘겨짐을 당하는 가운데, 곧 수난 가운데서도 이미 가시화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빛을 발하신 것이 바로 수난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다리는 사랑이요, 통제하려 애쓰지 않는 사랑이다.
이 세상을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의 삶은 대부분 수동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실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대부분이, 어떤 행동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의 기다림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상황의 한 부분임을 말해 준다. 그 분의 소명은 행동뿐 아니라 수난과 기다림을 통해서 완수되었다.
이 메시지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삶에서 기다리는 방법에 대한 온전하고 새로운 조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언제나 행동하는 쪽으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수난과 기다림 가운데서 우리의 가장 깊은 인간성이 실현됨을 인식하는 사람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새로운 삶에 접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섬김은, 그들이 행동하는 곳에서뿐 아니라 행동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도 영광이 나타남을 보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영성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가장 깊은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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