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 가운데서 기다림의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기다림의 두 측면을 살펴보고 싶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도 기다리고 계신다.(누가복음 1-2장-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 마지막 장들-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기다림이란 아주 인기 있는 태도는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기다림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계속해! 뭔가 하란 말야! 네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줘! 그렇게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기다림이란, 그들이 있는 곳과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행동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감정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내면의 감정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한 미래를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주 어려운 시간이다. 왜냐하면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있는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갈 수 없다면 대신 싸워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파괴적인 행동 대부분은, 우리에게 어떤 위험 요소가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기에 뭔가 행동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선제공격형'으로 접근하게 되는 근본 이유이다. 두려움의 세계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며, 파괴적인 반응을 보이기가 쉽다.
우리가 더 많이 두려워할수록 기다림은 더 힘겨워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이 그런 인기 없는 태도가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기에 누가복음 초두에 나오는 인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샤가라와 엘리사벳은 기다리고 있다. 마리아도 기다리고 있다. 시므온과 안나, 아기 예수를 데리고 갔을 때 성전에 있었던 그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복음의 시작 장면 전체가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기다린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그 백성들(최소한 부분적으로는)이 장차 다가올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고...
결국 기다림이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자세요, 신실하게 남아 있던 이스라엘의 소그룹의 자세였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신실한 백성, 즉 순결한 남은 자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었고,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으며,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기다림의 본질
기다림이란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을 기다리게 만든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씨처럼 그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시작된 일을 기다릴 때에만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따라서 기다림은 결코 무에서 유로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어떤 것에서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둘째로 기다림은 능동적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기다림이란 아주 수동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희망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런 수동성은 찾아볼 수 없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주 능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의 비결은 씨가 땅에 심기워졌다는 믿음,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이다. 능동적인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있는 그 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으며, 당신은 그 곳에 있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진 채로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늘 다른 어떤 곳에서 진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래서 정작 그 순간에는 그 자리에 없다.
그러나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살며 그 곳에서 기다리는 삶이다.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우리에겐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인 어떤 것,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다림 대부분은 소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새로운 직업, 날씨, 고통해소...).
우리의 기다림은 그런 소원들과 맞물려 있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많은 기다림은 끝이 있는 기다림이다. 대신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를 통제하는 방식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아주 특정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실망하고 절망으로 빠져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시간이 그렇게 힘든 이유이다. 우리는 소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뭔가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들이 어떻게 두려움과 연관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샤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에게는 막연한 소원들(Wishes)이 없었다. 그들은 소망(Hope)으로 충만해 있었다. 소망은 아주 다른 것이다.
소망이란 어떤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지만, 그 성취가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우리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망은 항상 끝을 알 수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채 지속되는 기다림은, 삶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두려움에 의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사는 것이다.
영적 삶이란 능동적으로 그 순간에 거하면서 기다리는 삶이다. 우리의 상상이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제하는 일에 정신이 팔린 세상 속에서, 진정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급진적인 태도이다.
기다림의 훈련
우리는 함께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채 기다린다.
기다림이란 무엇보다도 함께하는 행동이다.
마리아가 약속의 말씀을 받은 후 엘리사벳에게로 갔다. 그들은 함께 거하면서 서로서로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보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일이 향상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축하하고, 확인해 주는 곳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의 기다림은 항상 말씀에 대해 깨어 있음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고, 전쟁과 지진과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고통 중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하고 속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준비해야 하며, 깨어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 채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 그래야 앞으로 닥칠 모든 일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신뢰함으로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참고 마 24장).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행동에서 수난으로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에서 나오는 핵심 단어는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넘겨주다’이다.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예수님은 넘겨줌을 당했다.
그러기에 이 ‘넘겨주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이 넘겨짐을 당하는 드라마는 예수님의 삶을 철저히 둘로 나누어 준다.
예수님의 삶의 첫 번째 부분은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분은 말씀하셨으며, 선포하셨고, 치유하셨으며, 여행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넘겨짐을 당하자마자, 어떤 일이든 당하는 사람이 되셨다. 그 분은 체포되었으며, 대제사장에게 이끌려갔고,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다. 또 가시관을 씌움 받았으며,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분이 어떤 제한도 가하지 않은 일들이 그에게 행해졌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난의 의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실 때, 단순히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 분의 말씀에는 또한 “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내게 행해지도록 허락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예수님은 행동뿐 아니라 수난을 통해서도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셨다.
그 분은 단순히 아버지가 하라고 보내신 일을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 분에게 행해지도록 허용하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심으로써도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셨다.
수난은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할 일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 분의 고뇌는 단순히 죽음에 다가감으로 인한 고뇌는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기다려야만 하는 데서 오는 고뇌였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에게 의존하고 계신 그런 하나님의 고뇌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어렴풋이 보게 된다.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반응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모든 행동은 수난으로 끝이 난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반응은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역의 신비요, 사랑의 신비요, 우정의 신비요, 공동체의 신비다.
이것들은 항상 기다림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정확히 그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로 억지로 사랑하게 하신 거라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새 생명
부활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수난과 기다림에서 피어난 생명이다.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수난의 한가운데서도 부활 생명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은 수동적인 희생자로 들리우셨고, 그래서 십자가는 황폐함의 표시가 되었다. 또한 그 분은 영광 가운데 높이 들리우셨고, 그래서 십자가는 동시에 소망의 상징이 되었다. 돌연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희생적이 된 그 순간, 예수님의 수난 가운데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신성이 넘쳐 남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새 생명은 사흘째 던 날 일어나 부활 사건뿐 아니라, 넘겨짐을 당하는 가운데, 곧 수난 가운데서도 이미 가시화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빛을 발하신 것이 바로 수난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다리는 사랑이요, 통제하려 애쓰지 않는 사랑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법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면,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삶을 접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의 삶은 대부분 수동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실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대부분이, 어떤 행동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의 기다림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상황의 한 부분임을 말해 준다. 그 분의 소명은 행동뿐 아니라 수난과 기다림을 통해서 완수되었다.
이 메시지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삶에서 기다리는 방법에 대한 온전하고 새로운 조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언제나 행동하는 쪽으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수난과 기다림 가운데서 우리의 가장 깊은 인간성이 실현됨을 인식하는 사람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새로운 삶에 접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섬김은, 그들이 행동하는 곳에서 뿐 아니라 행동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도 영광이 나타남을 보도록 도와주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영성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가장 깊은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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