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_ 대천덕 신부
얼마전 예수원에 다녀온 후에 책꽂이 한켠에 뭍혀두었던 대천덕 신부의 책이 눈에 띤다.,
대학시절에 읽어보았던 대천덕 신부의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2'를 모처럼 다시 읽어 보았다.
1985년도에 발행된 책이지만, 어찌나 영적으로 깨끗하고 투명한지 내 마음도 저절로 젖어든다.
이 책은 대천덕 신부님께 편지를 하면 신부님이 일일이 '답장의 글'을 했던 글이다.
이 글들을 월간 신앙계에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라는 고정컬럼에 연재하셨고 그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중, 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내용과 그동안 무식으로 인한 잘못된 신앙습관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이글을 이곳에 옮겨놓는다.
한국교인들의 몇 가지 잘못된 신앙 습관
[편지] 존경하는 대 천덕 신부님께,
말씀을 나눌 시간이 너무 짧아 다소 아쉽긴 했어도 지난번 제가 신부님을 서울에서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읍니다. 저는 언젠가 꼭 예수원에 올라가 신부님을 뵙고 싶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까지 미루기로 하고 우선 저는 한국교회가 따르고 있는 몇 가지 특유한 신앙양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교회가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자유주의 신학 경향으로부터 비교적 탈피해 있고 성경적 바탕 위에 분명히 서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 역시 대단히 복음주의적 인물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무역회사의 직원이 되어 한국 땅을 밟고 한국교회를 직접 보게 된 저는 대단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신앙습관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시며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시작되게 되었는지요?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가르침의 부산물인가요, 아니면 불교나 유교적 전통을 반영해 주는 토착화의 한 형태가 나타난 것인가요? 신부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존 스미스 올림-
[답장] 사랑하는 존 형제에게,
한국교회 교인들이 신앙 습관에 대해 물어주신 형제의 편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보고 당황하는 사람은 비단 형제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또는 한국교회의 손님으로서의 우리들은 한국교회를 비난하는 일을 삼가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서구교회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앞서가는 한국교회의 장점들 즉 아낌없는 연보, 충실한 교회출석, 기도의 열심, 교회성장, 전도 등을 보고 스스로를 부끄러워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한국교회의 장점들은 잘못된 점들과 비교하여 결국 상쇄시켜 버릴 수 없는 그런 좋은 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부된 교회가 흠도 점도 없기를 원하시며(엡5:27) 또 우리들은 그저 한국교회의 손님일 뿐 아니라 믿음의 가정의 한 식구요 한 형제 자매인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비록 우리가 한국교회를 칭찬할 수 있는 많은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어리둥절케 만드는 몇 가지 문제점들도 함께 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보훈은 가장 많이 외치면서도 가장 적게 실천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5장 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하시면서 나아가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6세기의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개신교도 마찬가지 형편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성경에 없는 전통이 성경에 덧붙여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상치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생활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지 않고 다만 꼭 필요한 기본적 사항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인간의 삶과 에배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우리들의 창조력, 상상력에 맡기거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도록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경과 상치되지 않으면서 성경이 허락하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 분명하게 거절하는 기초 위에 전통을 세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사탄이 들어와 우리가 하고 있는 선한 일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는 우를 범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어떤 위험한 전통 위에 서 있는지 살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먼저 구약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여기서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명하고도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경제제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토지제도를 극렬히 반대했던 대만이나 구라파의 교회와 비교하면 그래도 실수를 적게 한 편에 속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 왔을 당시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이 민족을 구한 1950년 4월의 토지개혁은 당시 가장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너무 늦게 실시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오늘날도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매우 적은 실정입니다. 나는 할 말은 꼭 하고야 마는 담대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도전하며 바알 신앙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는 부동산 투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해결책인 양 신나게 변호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외국인인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 줍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은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21장 8절에서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체면을 세워 주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짜 경악케 만드는 것은 마태복음 6장을 읽고 난 뒤 이것을 한국교회의 신앙 습관들과 비교해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과 구제하는 일을 가지고 나팔을 부는 것에 대하여 엄중하고도 분명하게 꾸짖으신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 주고는 그들을 위해 특별기도까지 드려 줄 뿐만 아니라 또 교회주보나 광고판에 액수까지 기록해 주기도 합니다. 나는 이 습관이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기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성도들에게 십일조생활과 자립생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또 실천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어떤 영적 분위기를 조성코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국의 교인들은 이것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 이름을 밝히고 특별히 기도를 해주는 방법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전적인 비성경적인 습관을 보고 금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장하고 부추겼던 우리 모두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들의 잘못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6절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는데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닌지 심히 두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분명하게 일러 주셨습니다.(눅4:18).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빼앗긴 나머지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더 중요한 사실을 잊어 버리지나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계속하여 우리의 기도하는 습관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과 어긋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중예배에서 길게 기도하는 습관을 권장하고 남이 보는 곳에서 거창하게 기도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예수님은 또한 무의미하게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기도의 많은 시간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쓰여져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본으로써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이 기도문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사항이 '찬양'(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의 노래'(찬송가)들조차도 그 중의 대부분이 순수한 찬양이 아니라 무엇을 해달라고 바라는 것들이거나 또 순수한 찬양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즐겨 불려지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반면 우리들이 기도 가운데는 '오늘날 우리에게....주옵시고'라는 항목이 주기도문의 7가지 항목 중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일용한 양식(today's bread)을 구함에만 그치지 않고 두고 두고 먹을 것과 그밖의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구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소박한 간구를 크게 빗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생활 중의 가장 큰 문제는 용서하기를 주저하는 마음(unwillingness to forgive)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수없이 되풀이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앞에 조건부로 붙인 사항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씀은 전적으로 무시해버립니다. 사실인즉 주기도문은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에서 공동으로 불려지는 유일한 찬송인데 이 주기도문이 노래로 불려질 때 바로 이부분의 가사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거론할 때마다 언제나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이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수용하는가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는 조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은 주기도문의 7가지 간구 중 예수님께서 6장 14,15절에 가서 다시 반복하여 가르치실 만큼 중요했던 간구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가르치신 이 말씀을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놀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니라"
그리고 한국교회 신앙 관습 중 또 하나 외국인들을 경약시키는 것은 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이란 은밀히 행하여 아무도 이를 알지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자세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나는 한국의 목사님들이 "신부님은 최고 며칠까지 금식해 보셨읍니까?"하고 묻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금식 경험을 자랑하려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나만의 개인적인 비밀을 캐내어 예수님의 경고를 경멸하려 드는 그들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여 이런 올가미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선교사들이 바로 이런일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샤머니즘이 미친 한 토막의 작은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나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면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동정을 해주실 것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칭찬을 받으면 상당한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읍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금식한 것을 알아 주면 그것이 우리가 받을 상의 전부이고 하나님께로부터는 없다는 말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많이 무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을 공공연하게 정죄하는 일은 더더욱 널리 행해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고 믿음이 약한 평신도들이 마태복음 6장 19~34절에 나오는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 교단들이 서로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일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게는 그런 일들이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교훈,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오래 참으며 하나가 되라'는 사도 바울과 요한의 교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서 세상으로 하나님을 믿게하라'(요17:21)는 예수님의 기도의 부탁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한국의 불신자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자주 둘러대는 변명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니 어느 교회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너무도 분명한 사실은 서로를 교회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가 심판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실수로 길을 잃게 된 영혼들에 대한 추궁을 꼭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겔3:18~20, 33:6~8).
또 어떤 사람들은 가톨릭과 성공회의 교역자들을 '파더(father)'라고 부르는 것을 꼬집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에서 사용되는 명칭은 마태복음 23장 9절의 평범한 뜻 그대로의 '아버지'가 아니고 한자로 된 전문용어인 '신부(神父)'입니다. 마태복음 23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라는 말에 대한 개념을 지적하는 것이지 단순한 '말 그 자체'를 거론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개신교 교역자들도 변명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선생'이나 '지도자'로 불리기는 좋아하나 '형제'로 불리는 것은 매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여지는 것은 교역자들의 명칭이 아니라 소위 '정규 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마태복음 23장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치될 뿐 아니라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과 그분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모범을 부정해 버리는 행위가 아니가 합니다. 또 그것은 제자들에게 바울이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서 가르쳤던 교역자의 안수 문제에 대한 성격의 구체적인 가르침들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큰 교단들이 명시하는 자격기준에 의하면 12제자들은 물론 예수님 자신도 안수 받은 사역자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교단들은 이런 점들에서 외국에 있는 모교단들(mother churches) 기준을 다소 떠나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가소속해 있는 교단은 이곳에서의 역사만 95년이나 지났으나 아직까지 해외의 모교단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들은 바로는 현재 한국교단에서 요구하는 교역자로서의 학력 수준은 성공회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역자가되기 위해서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유교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토착화의 한 형태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누구나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선교사들은 또 한 번 책망의 무거운 짐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됨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불과 몇 주 만에 교회를 세웠고 그 곳에 안수를 하거나 선출하여 장로들을 세운 다음 자신을 제 갈길을 재촉하여 떠났읍니다(일반적으로 '목사로 임명하다'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오데인, ordain이란 말은 안수한다는 뜻보다 거수하여 뽑는다는 뜻이 더 적합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 의지하여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시도록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해주기 위해 한두 번 내지는 세번 정도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그가 다시 교회를 방문하게 될 때는 겨우 며칠이나 몇 주, 아니면 길어야 몇 달을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가 세웠던 교회들에 대해서 그가 직접 통솔,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각 지역에서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도록 바랐읍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본을 순종하지 않았읍니다. 우리들은 교회를 우리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었고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들의 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우리들은 여러 모로 우리 서양의 문화보다 뛰어난 동양의 문화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서양의 문화는 기독교의 풍속을 훨씬 벗어나 인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 서양의 문화는 7백년 동안이나 기독교를 왜곡시켜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나빴던 것은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16: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했던 인도자는 외국 선교사인 우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갖고 놀아보겠다는 소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웠습니다. 학자와 학문을 숭상하고 노동을 천히여기는 문화 속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성령께서는 당신들을 가르칠 수 없으니 우리한테 배우시요"라는 따위의 직접적인 말로 한국 교인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교육 기관들을 세웠습니다.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교육자는 성령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교기관들이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심어 주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번도 회개를 하거나 사과를 하고 나쁜 인상을 고치려 하지 않았습ㄴ디ㅏ. 이러면서도 우리가 성령은 감화 감동이나시키고 병이나 고칠 수 있는 분이지 지혜나 지식은 물론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분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지붕 곡대기에다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성령은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요"라고 외쳤더라고 해도 우리가 은밀한 방법으로 가르쳐 왔던 그 방법만큼 효과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디모데전서(3:1~13)와 디도서(1:5~9)에 나오는 장로, 집사 감독을 세우는 기준에 대해서도 다른 여러 조건들-예를 들어 "장로는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라는 내용-은 무시하고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조건만 강조했습니다(딤후3:2). 그러나 사실은 '가르치기를 잘 하는'으로 번역된 헤라어의 '디닥디코스'란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는 물론 성경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곳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의 글에서만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의미하는 것은 '가르치기를 잘 하는'이란 뜻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쳤어야 했을 터인데 대신 학교를 세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려고 했습니다. 학교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나 학력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를 나온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에 붙잡힌 바 되면 완전한 교사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고 우리의 전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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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님의 어록들.....
"나는 새 출발을 꿈꾼다. 하나님 안에서 늘 새로운 꿈을 갖는 자는 언제나 젊은이다. 분명 육신은 노쇠해지고 있으나 고목나무에 찬란히 빛나는 내면이 있듯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하나님뜻을 찾는데 진력할 때 나는 늘 청춘이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 채 무작정 앞서 가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거듭거듭 되돌아와서 우리가 매일의 여정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분이십니다” <자서전 ‘개척자의 길’에서>
“한집에서 혼자 살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쉽게 합니다. 같이 살아야 진정으로 변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공동체 생활을 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형제는 왜 목사님들이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교만 탐욕 정욕 명예의 희생물이 되어 탈선하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비방하는 그 목사님은 바로 형제가 기도하지 않은 죄로 넘어졌는데 형제가 무슨 염치로 그를 판단하겠습니까”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에서>
“무슬림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창조적인 생각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에서>
“사실 인간이 만든 어떤 법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 법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정부에게 요구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너희들이 자비를 베풀어라. 너희들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인터넷 칼럼(column.hosanna.net/torrey)에서>
“한국 기독교인중에는 자기만 행복하고 구원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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