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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 천년을 지향하는 기독교적 종교교육 - 손원영

김노섭-열린문 2007. 6. 14. 18:29
새 천년을 지향하는 기독교적 종교교육 :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을 중심으로

- 손원영(대한기독교대학교 기독교교육학 교수)


I. 시작하는 글


새로운 3천 년대를 시작하는 지금, 기독교교육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한국교회를 위해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새로운 천년대의 시작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 천년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의 전개를 위해서 연구자는 먼저 기독교교육의 주체이자 현장이라 볼 수 있는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사용하는 기독교교육의 개념이 새 시대를 위해 어떻게 재개념화될 수 있는지 고찰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모형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II. 한국교회의 현주소


종교가 쇠락한 것은, 밖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터무니없고 흐리멍덩하고 억지스럽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이 신조로 대체되고 예배가 수련으로, 사랑이 습관으로 대체될 때, 과거의 영광 때문에 오늘의 위기가 무시될 때, 신앙이 살아 솟구치는 샘(泉)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물이 될 때, 종교가 동정(同情)의 목소리 대신 권위의 이름으로만 말을 할 때, 그 메시지는 무의미한 헛소리가 되고 만다.


위의 말은 유명한 현대 유대교학자인 헤쉘(Abraham Heschel)이 현대에 접어들어서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된 이유를 진술한 것이다. 이러한 헤쉘의 말은 현재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최근 나온 한국교회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들이 이러한 현상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연구된 것 중에서, 주목할만한 보고서는 한국 갤럽에서 조사 발표한 [1997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1998)과 한미준(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조사한 자료집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활동 및 신앙의식 조사보고서](1998)이다. 그리고 이 자료에 근거하여 이원규 교수가 "한국교회의 현실과 전망"이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상의 자료들과 연구는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연구자는 이것들에 근거하여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다음 네가지 정도로 진단하고자 한다.

첫째, 최근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이 급격하게 둔화되고 있다. 개신교인의 수가 1985년에 약 650만명에서 1991년에 약 800만명으로 6년간 23.8%로 증가한 반면, 1995년에는 876만명으로 4년간 9.0%의 증가에 머물다가, 1996-1997년 사이의 개신교(예장합동, 예장통합, 기감, 기성) 성장율은 1997년 현재 930만명으로 1.9%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성장 둔화현상은 앞으로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인의 상당수가 타종교로 개종해 가는 상황이다. 1997년도 갤럽에 의하면, 기독교를 포함한 전체 종교인(2,260만명, 50.7%) 가운데 16.2%(370만명)가 다른 종교로부터 개종한 경험을 갖고 있는데, 개종 이전의 종교가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58.4%를 차지한 반면 불교는 32.8%, 천주교는 9.6%에 불과하였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비종교인(약 2,200만명) 중 1,094만명(49.7%)이 과거에 종교를 가졌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을 하였는데, 그 중 무려 73.0%(약 800만명)가 과거에 개신교를 믿어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다. 그리고 1998년도 조사에 의하면, 약 2,200만명의 비종교인 가운데 개종하게 된다면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응답은 불교( 41.8%)와 천주교(36.7%)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21.4%(154만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개신교의 성장둔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그 주요 요인은 상당수의 개신교인이 타종교로 개종해 가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당분간 양적 성장의 잠재가능성 조차 희박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셋째, 한국인이 종교에 갖는 이미지, 특히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 평가가 아주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예를들면, 구제/사회봉사활동에 대한 이미지에서 천주교(44.8%), 개신교(37.8%), 불교(25.3%) 순서로 호감을 갖고 있고, 종교지도자의 자질에 있어서 천주교(40.8%), 불교(26.7%), 개신교(22.8%)의 순서로 신뢰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교세확장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개신교(76.0%), 불교(36.3%), 그리고 천주교(35.1%) 순이고, 헌금에 대한 강조는 개신교(70.8%), 불교(33.6%), 그리고 천주교(28.7%) 순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비종교인에 대해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 종교인으로 개신교(33.2%)가 천주교(18.5%)나 불교(14.6%)보다 2배 이상 높다는 점이다. 이처럼 개신교에 대한 사회전반의 부정적인 인식은 기독교 선교를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요인으로 볼 수 있다.

넷째, 개신교인이 다른 종교인에 비해 종교성이 높다는 점이다. 예컨대, 1997년 조사에 의하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집회에 참여하는 비율이 개신교인의 경우 71.5%로 가장 높았고(불교 1.2%, 천주교 60.4%), 하루한번 이상 기도하는 비율도 개신교인이 64.2%로 가장 높으며(불교 10.7%, 천주교 41.2%),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경전을 읽는 비율도 개신교인의 경우 50.4%로 가장 높다(불교 9.0%, 천주교 33.5%)는 점이다. 개신교인이 신앙생활의 측면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성장둔화의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가능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은 개신교인이 신앙을 포기하는 교회 내적인 원인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은 이원규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할 때,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통계조사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새로운 천년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을 위해 적어도 세가지 점에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는 성장논리와 성숙논리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목회의 패러다임이 성장목회로부터 '교육목회'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교회는 성장논리와 성숙논리를 이분화한 뒤, 전자만을 절대화한 나머지 후자를 소외시켰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이라는 외적인 화려함을 생산해 냈으나,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숙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 기여하는 교육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천년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성숙논리에 근거한 '교육목회'가 전제되지 않은 제 2의 교회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여, 교회구조를 교육목회구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교회는 기독교교육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목표로 한 '전도'에만 주요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기독교교육을 '전도의 수단' 혹은 '교회성장의 도구'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교육이란 교회성장에 앞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이고 기독교적인 바른 삶은 어떤 것인지 질문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은 교회성장 논리에 의해 기독교교육에서 축소되고 왜곡되어졌다. 따라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참 진리와 함께 기독교의 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기독교교육의 체계적인 실천을 위해 과거의 교육형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개신교인의 종교성이 다른 종교에 비해 보다 열성적이라는 점은 기독교교육의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기독교교육은 그러한 열정을 반영시킬 새로운 패러다임에 근거한 교육형태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열심히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기독교인의 '열정'이 새로운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 속에서 재탄생될 때, 한국교회의 미래는 분명히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에 수행되었던 기독교교육의 개념과 형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교육의 모습을 추론하는 일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III. 기독교교육의 재개념화


현재 한국의 기독교교육 현장에서 회자되는 있는 기독교교육의 개념은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왜냐하면 기독교교육과 비기독교교육 사이의 경계가 종종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교육이 종교교육, 기독교적 종교교육, 그리고 주일학교교육이나 교회교육 등의 용어와도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핀 것처럼 과거의 한국교회는 기독교교육을 전도와 교회성장의 '도구'로 개념화했던 것을 염두에 둘 때, 새로운 천년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기독교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개념의 정의가 새롭게 요청된다. 따라서 새로운 천년을 지향하는 상황에서 요구되는 기독교교육의 개념은 현재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구자는 새로운 천년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을 '기독교적 종교교육'(Christian Religious Education)으로 재개념화하여(reconceptualizing) 이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 개념은 이미 많은 기독교교육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개념이 갖고 있는 의미를 다음 네가지로 제안하면서, 한국 기독교교육의 방향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새신자보다는 이미 회심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써, '성숙'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이다. 일찍이 스마트(James Smart)가 주장했던 것처럼, 전통적으로 교회는 크게 두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설교를 통해 말씀을 선포(Kerygma)하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교육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Didache)이다. 이 기준으로 볼 때, 기독교교육은 초대교회 이래로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 회개하고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교회의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과거 한국의 기독교교육은 이미 회심한 자보다는 회심할 자, 혹은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다시 회심해야할 자로 전제하고 이루어진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어린이나 학습자를 대상으로 부흥회와 같은 종교집회를 통해 학습자가 종교적인 회심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학생의 신앙의 연한과 성숙도에 상관없이 회개를 주요한 교육목표로 결정한 교육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과거의 기독교교육은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강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회심지향적인 기독교교육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될 잠재인구조차 소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그러한 형태의 기독교교육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회심중심의 기독교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 방향성은 기존의 신자 곧 이미 회심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성숙'을 지향하는 기독교교육이 보다 더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바른 기독교적 앎(orthodoxy)과 기독교적 삶(orthopraxis)을 적절하게 연결시키려는 의도적인 일체의 교육활동이다. 과거의 기독교교육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달하여 회심케 하는데 목표를 둔 교육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달리말해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일회적 회심이 아니라 회심 이후의 기독교적 삶(Christian life-style)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인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기독교교육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세상을 향해'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기독교교육이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무엇이 기독교의 참 진리인지 항상 질문하는 작업이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 참 실천인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실천(praxis) 지향의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성서의 말씀과 기독교의 교리를 단순히 전달하고 반복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비추어 그것들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항상 '비판적 성찰'(critical reflection)의 작업을 통해 새롭게 밝힌 뒤, 그것을 삶과 연결시켜주는 실천의 교육인 것이다.

셋째,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기독교교육이 발생하는 교육현장과 그 범위를 교회학교나 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공교육과 성인교육 및 평생교육의 차원으로 그 지평을 확대시킬 것을 중시한다. 과거 한국의 기독교교육은 교회학교 및 교회교육과 거의 동일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 한정됨으로써, 성인을 기독교교육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독교교육은 '교회'만을 교육의 현장으로 상정함으로써, 교회와 학교, 교회와 사회, 혹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성을 등한시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교육은 교회 내에서 기독교인을 재생산하여 교회성장에 기여하는 역할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독교적 시민교육의 역할은 부족했다. 특히 사이버공간의 창조로 인해 기독교교육의 현장은 더 이상 보이는 현실적 공간만을 중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서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이 기독교교육의 현장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지구자체도 중요한 기독교교육의 현장으로 인식하여, 지구와 연대하는 기독교교육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결국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평생교육적 맥락에서 그 범위와 현장을 교회교육으로부터 확대하여, 미션학교를 포함한 일반학교와 사회, 사이버공간, 그리고 지구 자체로 넓혀야 할 것이다.

넷째,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타종교와의 상대적 관계성 속에서 그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타종교가 없다면, 기독교교육은 더 이상 기독교교육이란 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달리말해 기독교교육이란 용어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타종교의 존재를 전제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타종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한국의 다종교 상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수 많은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만나게 된다. 이 때, 기독교인은 이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어울려 살아야 할지 교육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의 과거 기독교교육은 기독교만을 혹은 특정 교파의 가르침만을 가르쳤을 뿐, 타종교나 타종파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음으로써(영 교육과정, null curriculum) 왜곡된 기독교관을 재생산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적 종교교육은 기독교인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만나게 되는 수 많은 낯선 타자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적절하게 교육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IV. 기독교적 종교교육의 새로운 모형: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


1. 프락시스 접근들(praxis approaches)

앞에서 기독교교육의 개념을 '기독교적 종교교육'으로 재개념화함으로써, 연구자는 그 의미를 "이미 회심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참 기독교인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독교적 앎과 기독교적 삶을 의도적으로 일치시키려는 교육적 활동'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기독교적 종교교육을 위해 어떠한 접근방법이 적절할까? 기독교적 앎과 삶을 적절하게 연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최근 기독교교육학계에서는 프락시스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하는 프락시스 접근은 크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해방신학을 기초로 한 프락시스 접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석학을 기초로 한 프락시스 접근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전자를 일컬어 해방적 프락시스 접근(liberating praxis approach), 후자를 해석학적 프락시스 접근(hermeneutical praxis approach)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선 전자의 경우, 해방적 프락시스 접근은 바른 기독교적 삶을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엄밀한 분석, 특히 사회과학적 분석을 기초로 한 비판적 성찰(critical reflection)을 중시한다. 이같은 토대 위에서만이 바른 실천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해방적 프락시스 접근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특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의와 왜곡된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뒤, 억압구조를 극복하는 실천이야말로 바른 실천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해방적 프락시스 접근에서는 약자나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의 개념에 근거하여 "약자와의 연대"(solidarity with the victims)를 중시하면서 해방적 실천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적 삶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해방적 프락시스 접근은 쉬파니(Daniel Schipani)의 연구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접근은 구체적인 억압의 현실을 분석해주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보다 강조해야할 접근방법이라고 본다. 다만, 이 접근은 그 실천의 방법으로 '혁명적 실천'을 중시하는 맑스전통의 방법을 절대화한 나머지 '사랑과 영성'이라는 성서적 정신에 근거한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하는 한계점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접근인 해석학적 프락시스 접근은 바른 기독교적 삶을 위해서는 텍스트(text)에 대한 정확한 분석, 특히 해석학에 근거한 비판적 성찰을 중시한다. 이 모형은 해석의 대상으로써 텍스트의 범위를 단순히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에 머물지 않고, 텍스트 이전의 삶으로서의 선텍스트(pre-text),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텍스트(context) 사이의 비판적 대화, 곧 선택스트, 택스트, 그리고 컨텍스트 사이의 순환적 대화구조를 중요시한다. 이러한 비판적 대화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바른 앎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바로 지금 실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프락시스 접근은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해석 뿐만 아니라 텍스트에 앞서는 본래적 기독교인의 삶과 하나님의 계시를 깊이있게 숙고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각자의 삶에서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이 접근은 텍스트로서의 성서와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바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기독교의 전통이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접근은 그룸(Thomas Groome)의 "공유적 프락시스 접근"(shared praxis approach)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해석학적 프락시스 접근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대화를 위한 의사소통의 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이 없거나 해석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서 얼마나 설득력있게 활용될 수 있는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자칫 텍스트보다 삶을 다시 소홀히 취급할 위험성이 있다.


2.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theopraxis approach)

연구자는 위에서 진술한 현대 프락시스 접근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수정한 뒤, 새로운 프락시스 접근으로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을 제안하고자 한다. 특히 이 접근은 앞의 두 접근이 프락시스의 개념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간과했음을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프락시스 접근으로 재구성하여 제안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신중심적 프락시스' 곧 '테오프락시스'(theopraxis) 개념은 희랍적인 프락시스(praxis)의 개념을 기독교적 의미로 해석한 개념이다. 본래 프락시스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처음으로 개념화된 이래, 현대에 들어와서는 헤겔-맑스 전통에서 재해석되었고, 현재는 해석학자들과 맑스 전통의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수정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개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프락시스는 단순한 '실행'(practice)이 아니라 '비판적 성찰'(critical reflection)의 이성적 활동을 포함한 '실천'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전통에서 발전된 것으로, 프락시스의 의미를 단순히 이론을 적용하는 '실행'이 아닌, 이론과의 끊임없는 비판적 상호작용을 포함한 실천(doing)을 뜻한다. 둘째, 프락시스는 생산활동(making)으로서의 '포이에시스'(poiesis)와 구별되는 윤리적인 '덕의 실천'을 의미한다. 이것은 맑스가 프락시스의 개념을 생산활동(노동)으로 축소시킨 것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창조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프락시스는 그 자신 안에 목적을 둔 자기목적성을 지향한다. 즉 포이에시스가 외부에 목적을 둔 결과적 목적을 지향한다면, 프락시스는 과정적 목적을 갖는다. 예를 들어 포이에시스가 기타와 같은 악기를 만드는 노동행위로써 악기가 완성된 후에 행위의 목적이 성취되지만, 프락시스는 예술 그 자체로써 기타를 연주하는 행위 자체가 실천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프락시스는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넷째, 프락시스는 바른 실천을 위한 '숙고'(deliberation) 및 '실천적 지혜'로써 '프로네시스'(phronesis)의 인식방식을 중시한다. 즉 이론적 삶(theoria)이 보편적이고 불변한 지식(episteme)을 요구하고, 생산적인 삶(poiesis)은 기술적인 지식(techne)을 필요로 한다면, 프락시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식(phronesis)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상의 의미를 함축한 프락시스의 개념은 적어도 기독교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수용되는 데에는 몇가지 한계가 있는데, 특히 두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프락시스의 개념은 인간이 주체가 된 프락시스의 개념을 중시한다. 예를들어, 맑스 전통에서 사용하는 프락시스의 개념은 '혁명적 실천'(revolutionary praxis)으로써 사회-정치적인 억압구조 속에서 사회구조의 '변혁'(transformation)을 지향하는 인간의 도구적 행위를 강조한다. 또한 해석학자들도 프락시스의 개념을 중시하는데, 그들은 주로 이 개념을 해석자가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폭로'(disclosure)와 그에 따른 실천으로 이해한다. 이와같은 프락시스의 개념은 혁명의 실천이든 혹은 해석의 행위이든, 실천의 주체는 인간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프락시스의 개념은 하나님을 모든 삶의 전제로 사유하는 기독교인에게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을 실천함에 있어 프락시스의 개념을 기독교적 의미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둘째, 일반적인 프락시스의 개념은 희랍적인 덕의 원리(phronesis)만을 전제로 한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러한 프락시스의 개념 속에는 기독교적 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이 기독교교육을 위한 방법론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스택하우스(Max Stackhouse)가 "프락시스의 개념에 대한 기독교적 세례화"를 주장한 것은 적절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자는 기독교적 의미로 해석된 프락시스의 개념으로 '신중심적 프락시스'(theo-praxis)의 개념을 제안한다. 여기서 '신중심적 프락시스'란 단어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와 '프락시스'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희랍적인 프락시스의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개념으로써, 구체적으로 이 개념을 진술하면, 다음 세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개념은 프락시스의 담지자로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성(initiative)을 중시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과거 프락시스의 개념이 인간이 주체가 된 프락시스였다면,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개념은 하나님의 우선적인 계시적 프락시스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써, 그에 따른 인간의 신앙적 응답과 헌신, 그리고 참여를 요구한다. 둘째,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개념은 희랍적인 덕이 아니라 '기독교적 덕'에 따른 실천을 의미한다. 스택하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희랍적 프락시스의 개념 속에 부재했던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동정심"을 비롯한 기독교적 덕을 따른 프락시스이다. 이러한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원형은 예수의 화육(incarnation)과 십자가(cross) 사건 속에서 그 절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개념은 기독교적 덕의 근원으로써 하나님과의 전인적 관계성을 중시하는 영성(spirituality)의 실천을 강조한다. 셋째,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와 관계하여 인간의 프락시스가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할 수 있는 '매개'라는 점을 인정한다. 달리말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간주되었던 이성중심의 '조명이론'(illumination theory)이나 감정을 중시하는 '만남이론'(encounter theory)보다, 오히려 인간의 프락시스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입장에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 및 인간의 경험에 대한 해석학적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프락시스'와 "가난한 자의 우선적 선택"을 중시하는 '해방적 프락시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지향하는 삶의 실천을 중시하는 '영성적 프락시스'는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는 신중심적 프락시스의 개념에 따른 기독교교육 연구방법론을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이 강조하는 세가지 프락시스의 측면을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접근은 해방적 프락시스(emancipatory praxis)의 측면을 갖는다. 하나님은 텍스트 이전(pre-text)의 프락시스, 곧 세계의 창조와 인류의 구원를 위해 역사속에 참여하여 역사를 변혁시키는 '해방적 프락시스'의 주체로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참여하여 억압된 사회의 구조를 변혁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죄와 사회적 억압, 그리고 환경의 파괴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역사 참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해방적 프락시스'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프락시스는 호지슨이 주장한 것처럼 "세상(world; difference)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응답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해방적 프락시스에 신앙으로 응답하고 참여하도록 격려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해방적 프락시스에 응답하는 기독교교육은 다양한 활동들을 고려할 수 있다. 예를들어 러셀(L. Russell)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활동에 응답하는 것은 '참여'(participation)를 통해 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은 해방신학자들이나 해방교육론자들이 주장하는 해방적 프락시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티에레즈가 "가난한 자와의 연대"(solidarity with the poor)을 해방적 프락시스의 실천형식으로 주장한 것은 의미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해방적 프락시스에 참여하는 것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 그리고 고통당하는 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둘째,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은 의사소통적 프락시스(communicative praxis)의 측면을 갖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말씀으로 창조하시고(창1:1ff.),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 사건'(Word-event)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요1:1-3, 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셨다(예: 마13:1-5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언자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왜곡된 의사소통을 수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incarnation)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의사소통구조를 수정하는 대표적인 형식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적 프락시스를 통해 활동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 대한 인간의 신앙적 응답과 참여는 수정주의신학자들과 해석학적 교육론자들이 중시하는 것처럼 해석학적 프락시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활동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속적인 삶의 활동들은 '언어'(text)의 형식에 의하여 '성서'와 '전통'으로 우리에게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석학적 프락시스를 통해 텍스트에 접근함으로써 텍스트 앞에(in front of) 계신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게되고, 우리의 '존재 지평'이 전유와 초월의 과정을 통해 확장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참여하는 기독교교육의 활동은 다양한 형태를 고려할 수 있다. 특히 그룸(Groome)이 제안했던 '공유적 프락시스 접근'은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 참여하는 유용한 접근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룸의 방법론은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서 전통의 범위를 '성서'와 '교회의 전통'(특히, 가톨릭교회와 제1세계)에 제한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한국교회의 상황과 관계시킨다면,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의 참여는 전통의 범위를 '성서'와 '가톨릭교회의 전통'의 범위를 넘어서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또 다른 텍스트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활동은 특징지역과 특정 문화에 제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프락시스는 하나님이 인간 및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으로써, 기독교교육자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해석학적 프락시스를 통해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은 '영성적 프락시스'(spiritual praxis)의 차원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세계를 향해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는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시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성적 프락시스'의 주체이다. 여기서 '영성적 프락시스'란 성령의 활동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고'(요16:13),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활동'(레 19: 2; 고전 12:4-11; 갈 5:22-25)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만드는"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프락시스는 각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회심'(metanoia)를 촉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신앙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런 면에서 로너간(Bernard Lonergan)이 프락시스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게 위해 '인격적 변형'으로서의 '회심'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영성적 프락시스를 적절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성적 프락시스에 응답하기 위한 기독교교육의 활동은 적어도 다음 세가지 형태로 고려될 수 있다. 첫째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영성적 프락시스이다. 기도와 묵상 등이 대표적인 개인적 차원의 영성적 프락시스이다. 둘째는 신앙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영성적 프락시스이다. 여기에는 신앙공동체의 예배 및 성례전에 참여하거나 선교 및 봉사에 참여하는 활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영성적 프락시스로써, 사회의 구조가 정의와 해방을 지향하도록 실천하는 활동이다.


V. 마치는 글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결정을 해야할 전환기에 서 있다. 그것은 현상유지(status quo)와 도약이라는 선택의 길목이다. 만약 여기서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면, 과거에 당연시되었던 기독교교육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기독교교육의 목표를 성장에서 성숙으로 전환하고, 기독교교육의 현장을 교회학교에서 평생교육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교육의 개념을 전도의 수단에서 기독교적 앎과 기독교적 삶의 통합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연구자는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을 제안하였다. 이 접근은 적어도 세가지 프락시스(의사소통적 프락시스, 해방적 프락시스, 영성적 프락시스)의 통전성을 강조한 것으로써, 그 실천에 있어 프락시스 간의 균형성을 유지하는 것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과거의 프락시스 접근이 어느 하나에만 치우친 나머지 다른 프락시스 접근을 소홀히 한 결과, 왜곡된 기독교적 신앙을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는 바른 앎과 바른 삶의 연결은 바른 신앙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것이 '영성적 프락시스'를 통해 가능할 것임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박종천교수가 '바른경험'(orthopathy)이 '바른 앎'(orthodoxy)과 '바른 실천'(orthopraxis)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따라서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은 세가지 프락시스의 통전성을 중시하면서도 영성적 프락시스의 중요성을 보다 강조하는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접근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관계로 어느정도 효율성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기독교적 앎과 삶을 연결시키는데에는 분명히 기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헤쉘이 암시한 것처럼, 신중심적 프락시스 접근은 하나님을 배제한 실천이 아니라, 창조와 해방, 그리고 성화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프락시스를 유비적으로 따르는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보람있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행동의 유비'(analogy of praxis, 연구자추가)로 해석되어야한다. 인간은 그 행동(실천)에서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이 자비하듯 너희도 자비하여라.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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