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21세기 가정 사역의 전망과 원리
김종환 목사 - 서울신대 교수(상담대학원장)-임상목회학(Ph.D.)
우리는 밀레니엄버그니 Y2K니 하는 컴퓨터 시대의 재앙을 염려하며 다음 21 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다. 인류가 미래에 관하여 관심이 중대된 것은 사실은 1999년이 되어 2000년을 앞둔 지금 보다도 앞선 일이다. '미래학'이 학문화한 것은 '70년 중반이었다. 이는 제1,2차 오일쇼크로 인하여 인류 존망의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I. 미래 사회
미래학의 주관심은 21세기를 의미하는 미래사회(terminal society)이다. 미래학이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것은 검증할 수 없는 미래이어서 그 학문성 여부 논쟁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미래학이 세계적인 학문으로 관심을 집중하는 배경에는 인류 문명이 위기에 처한 탓이다.
미래학은 크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하바드 대학의 H. Khan 연구소가 긍정적인 입장을 대표한다. 1978년 미독립 200주년에 발표한 보고서 '이후의 200년(The Next 200 Yesrs)'에 의하면 인류는 곧 탈산업사회(脫産業社會/post industrial society) 맞이하고 그 후에 초산업사회(超産業社會/super industrial society)를 맞이할 것으로 본다. 이런 배경에서 인류는 지금 타임머신을 상징으로 하는 4차원적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Roman Club이 부정적인 입장을 대표한다. 200명의 미래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Roman Club의 중요 업적은 그들의 연구보고서 '성장의 한계'이다. 이 보고서는 인구 폭팔, 자원 고갈, 환경오염 등의 절망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미래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미래에 관한 제3의 입장을 알고 있다. 이는 지구촌의 地上에 관한 미래가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이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과 지상의 천년왕국 그리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희망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래에 관한 부정적인 입장과 긍정적인 입장의 통합을 보게 된다.
우선 우리 인류는 부정적 입장의 Roman Club이 전망하는 종말적인 후기산업사회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은 H. Khan연구소가 전망하는 4차원적인 미래사회,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정을 뛰어넘는 긍정을 본다. 우리는 위기 시대를 맞이할 것이나, 그 뒤의 새 시대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당분간 지구촌의 세태는 지속될 것이다.
지금 지구촌의 세태는 사회학의 '붕괴하는 사회'로 대변되고 있다. 이는 사회의 근본 바탕을 사회 정책이나 행정 이전의 정신적 도덕성에 두고 현대 사회의 도덕적 붕괴가 사회 붕괴를 가져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공감대가 넓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서구 사회가 이에 앞서 '교회의 붕괴'를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에 교회 출석률이 10%로 급락하더니 지금은 5%를 넘지 못한다. 이를 교회 성장학은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마이너스 성장이란 감소, 퇴소 그리고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 붕괴'로 표현 한다.
교회사에는 '사라져버린 교회'가 하나의 장(章)으로 언급된다. 최초의 사라져버린 교회는 A.D. 4C경의 북아프리카 교회이다. 북 아프리카 교회는 당시 오순절을 체험했던 디아스포라들(행2:9-11)이 돌아가 세운 교회로 많은 감독과 주교를 배출했던 당시 가장 부흥된 교회였으나 7C경에 이르러 사라져버린 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에도 사라져버린 교회는 교회사에 반복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구러시아 교회가 붕괴되어 70년 동안이나 사라져버린 교회로 기록되었으며, 최근 러시아 재건과 함께 회생되었으나 여전히 러시아 선교에 걸림돌로 알려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라져버린 교회들은 반드시 그 사회의 멸망을 가져왔다. 교회 붕괴는 사회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 역사의 공식이다.
II. 미래 사회와 가정 사역
왜 서구 교회가 이렇게 붕괴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 서구 교회의 붕괴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예고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정 붕괴 현상'이다. 1960년대에 이미 서구 사회는 이혼율이 50%에 육박했었다. 최근의 이혼율이 미국 52%, 자주 가정 교육의 모델로 언급되는 이스라엘이 47%로 보고되는 등 가정 붕괴 현상은 온 서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등식을 발견한다.
가정 붕괴 => 교회 붕괴 => 사회 붕괴
요컨대, 현대 서구 사회가 물질과 과학 문명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나 붕괴하는 사회로 표현되는 것은 교회의 붕괴 때문이며, 이는 가정 붕괴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통계청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1996년 하루 평균 223쌍이 이혼하고 있다. 그러니 96년 연간이혼건수는 81.4천건으로 결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년전에 비해서는 13.4천건(19.7%), 91년에 비해서는 34.0천건(71.7%)이 늘어났으며, 약 10년전인 87년에 비해서는 40.2천건(97.6%)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증가 추세는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가 많다.
이런 견해는 최근 KBS제2라디오가 코리아 데이타 네트워크에 의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1천5백 가구를 대상으로 「한국의 가정 생활양식」에 관해 전화면접조사 결과를 보면 더욱 염려스럽다. 이 통계에 의하면 부부싸움 횟수는 1년에 평균 9번 정도. 도시가 연평균 7.4회, 농촌이 14.9회였다. 몇년에 한 번꼴로 부부싸움을 한다는 경우도 35%나 됐지만 1년에 1백회 이상 한다는 가정도 1.8%였다. 「사랑한다」는 말은 몇번이나 하느냐의 물음에 도시가장의 41.3%와 도시주부의 52%가 1년 내내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어 가정 세태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가정 세태는 우리 사회의 가정 붕괴 조짐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도 서구 사회처럼 50% 이혼하는 사회가 된다면 '붕괴하는 사회'로 가는 셈이다. 여기에 교회의 가정 사역의 시급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가정 사역과 교회 성장의 계를 생각하면 가정 사역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최근 한국 교회는 성장이 둔화되더니 드디어 감소되기 시작했다는 보고이다. 불교와 천주교도 같은 감소 현상을 나타낸다면 한국 사회 변동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가 않다. 불교와 천주교는 계속 성장하는데 개신교만이 감소되고 있다. 왜 개신교만이 성장이 둔화되고 감소하는가. 여기에는 관심과 전공 영역에 따라서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필자의 전공 영역의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人性의 문제이다. 최근 국내의 한 월간지에 의미 있는 수필이 하나 있었다. '한국인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현대 한국인의 얼굴은 본래 한국인의 얼굴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의 얼굴은 두 가지 유형이 대표적인데 '체념형'과 '투쟁형'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구조적으로 별다른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체념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체념형이 한국인의 얼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뜻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투쟁형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어 공감적이다. 예를 들어, 전철이나 시내 버스를 타고 살펴보면 실감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체념형의 얼굴이다. 그리고 소수의 투쟁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적어도 1/4은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가 될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다. 체념형과 투쟁형의 얼굴 속에 희망차고 따뜻한 얼굴의 크리스천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으로는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교인은 많으나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로서의 크리스천은 찾기가 어렵다.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이에 관하여 "온 백성의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고 하신다. 여기 '칭송'이라는 단어를 새번역에는 '호감'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우리 크리스천이 호감이가는 사람이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소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호감이 가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성서적인 성령 충만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소위 한국 교회가 언필칭 성령 충만이라는 하는 모습이다. 어느 세미나에서 이 질문에 한 분은 '아닙니다. 호감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반감이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요즈음 필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영적 편재와 성령 충만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호감이 가지 않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영적 편재(偏在)라고 한다. 영적으로 기울어졌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영적으로 편재된 사람이 아니고 전인적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다.
현실요법으로 유명한 William Glasser는 사람은 서로 사랑을 주고 받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Key Person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이 Key Person에 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E. M. Pattison은 20-30명과 의미있는 인간 관계를 맺는 정신사회망(Psychosocial network)을 형성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며, 노이로제 증후군을 지닌 사람들은 4, 5명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 관계의 폭이 넓으냐 좁으냐에 따라 그리고 그 관계의 질이 어떠냐에 따라 개인적 인성의 정상과 비정상을 진단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람은 소규모적이며 엄격하며 상호파괴적인 정신사회망 속에 갇혀있다고 하겠다.
개인 전도를 떠나서 교회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Key Person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 전도는 Key Person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기도하는 만큼, 성령 충만한 만큼 Key Person이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Key Person의 확장 없이 이루어 질 때에 일시적인 현상으로 멈추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 성장을 위한 Key Person 진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을 통하여 확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너무 좁은 정신사회망 속에 갖혀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거듭나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정신사회망이 4, 5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영적 편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과 정신사회망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가 되니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들을 통하여 구원 받는 사람들을 더하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목회상담학자 H. Clinbell은 {통전적 전인성(Holistic Wholeness)}라고 한다. 이는 영적 자아를 중심으로 인간 관계가 확장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성서적인 성령 충만한 人性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요컨데, 한국 교회가 성장을 계속하려면 우리들이 도덕성과 호감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가 될 수 있는 {통전적 전인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의 중요성을 재발견 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덕성과 호감의 여부를 결정하는 개인의 통전적 전인성이란 생후 60개월까지 형성되어, 18세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인성이란 가정의 산물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껏 장기적인 스테디셀러인 가정 사역에 관한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V. Satir의 '사람 만들기(People Making)'란 책이다. 사티어 여사는 두부를 두부 기술자가 두부 공장에서 만드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 만드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 양육자가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하는 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된다. 가정 환경이 가장 강한 영향력이다. 한 그루 나무가 육림가의 손길에 따라서 귀한 정원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쓸모없는 나무가 되기도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무의 성장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 그 나무가 쓸모 있는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묘판에서부터 제대로 육림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이 때에 비뚤어진 나무는 이양지에 가서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바른 나무가 되기는 어렵다.
사람의 생리적 성장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 신생아가 모태에서 8, 9주 되었을 때에 혹 어머니가 풍진과 같은 병을 앓게 되면 그 아이는 농아와 맹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 시기가 눈과 귀가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성의 결정적 시기가 있다. 인간 행동론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인성의 결정적 시기>이다. 인성의 결정적 시기는 바로 母胎로부터 생후 60개월이다. 인성이란 다른 말로 한 사람의 정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인성의 결정적 시기가 생후 60개월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배경이 있다. 하나는 생리학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먼저 사람은 생리학적으로 그 인성이 발달 단계 초기에 형성되게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로서 사람과 동물의 출생과 성장을 비교하면 그 비밀이 나타나게 된다.
의미요법으로 유명한 V. Franckle은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 고 말한 바 있다. 사람과 고등 동물은 그 출생과 성장에 있어서 특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 중에 재미있는 것 하나는 동물은 대부분 낳을 때부터 신체 균형이 어미와 정비례한다. 그러나 사람은 신체 균형이 성인에 비하여 머리 크기가 훨씬 크다. 과분수이다. 왜냐하면 인성의 생리적 바탕이 되는 1.1Kg 정도되는 뇌(Neurons)의 형성기가 생후 60개월이기 때문이다. 뇌가 생후 60개월을 전후하여 가장 먼저 형성이 되고나서 다른 신체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최근 심리학적인 것은 생리학적이며, 생리학적인 것은 심리학적이라는 두 관계가 많은 연구를 통하여 입증되고 있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더욱 생후 60개월이 결정적 시기로 나타난다. 사람의 정신 구조가 Id, Ego 그리고 Super Ego 모두의 형성기가 모두 60개월 이내 이기 때문이다. 선천적 요소라고할 수 있는 Id는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며, Ego는 36개월을 전후하여 그리고 Super Ego는 60개월을 전후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옛 말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하고 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볼 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하신다.(골3:21)
III. 가정 사역의 원리
가정 사역( family ministry)이란 일반적인 개념과 전문적인 개념이 있다. 일반적인 개념은 어떤 특정 과정을 이수한 전문직으로서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을 의미한다. 가정 사역이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나의 가정을 주신 것이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직장 생활이 아니라 직장 사역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가정 생활이 아니라 가정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져야 함이다. 가정 생활은 기독교인에게 단순한 삶 이상의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전문적인 가정 사역의 의미는 '역기능 가정(逆機能 家庭/dysfunctional Family)'을 '순기능 가정(順機能 家庭/functional family)으로 변화 성장 시키는 '상담(相談/counseling)과 심리 치료(心理 治療/psychotherapy)'를 도구로 하는 치유 사역(治愈 使役/healing ministry)을 말한다.
치유 사역은 예수의 사역에 뿌리둔 것으로(마9:35), 그 원리는 오크로스의 전인적 욕구(need)에 대한 반응(response)이었다. 이 N-R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의 중요한 교회 사역은 가정 사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데로 가정 붕괴가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기능 가정이란 {결핍기능 가정}과 {병든 주기능 가정}으로 구분된다.
1. 결핍 기능 가정
복된 가정이 되려면 가정은 다음 세 가지의 필수 기능이 있다. 이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역기능 가정이 된다. 가정 사역의 기본 원리는 결핍된 기능을 보완하도록 돕는 일이라 하겠다. 가정이란 사회 구성의 기초적인 집단으로서 1차적인 정서 집단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흔히 운명 공동체라고 불리게 된다. 이는 가정이 삶을 위한 필수적인 기능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기능은 우선 제도적 특징(instrumental features)에 근거하는 외적인 의무를 위한 '생식과 양육의 기능'과 '경제와 휴식의 기능'이 있다. 이를 육체적 기능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가정은 표현적 특징(expressive features)에 근거하는 내적 의무를 위한 '애정의 기능(affectional function)이 있다. 이를 심리적 기능이라고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적 특징에 근거하는 외적인 의무를 위한 기능보다도 표현적 특징에 근거하는 내적 의무를 위한 기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이는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외적 기능의 충족이 보편화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적 특징(spiritual features)에 근거하는 신적 의무로서의 '종교적 또는 영적 기능'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된 데로 이 세 가지 가정의 기능은 인간의 統全的 全人性(holistic wholeness)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서적 인간 이해의 요점인 '영, 혼과 몸'(살전5:23/히4:12)이라는 세 가지 단위가 서로 상호 작용과 상호 관계 속에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통전적 요소의 욕구(need)가 충족이 필수적이다. 다음의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어느 하나의 기능이 결핍되면 역기능적인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능을 일용할 양식으로 비유한다면 {가정의 세 가지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겠다.
1) 육체적 기능
육체를 지닌 인간은 누구라도 세끼 밥을 먹지 않고서는 건강하게 살 수 없다. 물론 사람은 밥을 굶으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금식하며 모든 욕구를 승화(昇華/sublimation)할 수 있다.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지만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매 해 수난 주간이 되면 금식하면서 더욱 깊은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갑자기 일어난 재난으로 수십 일을 굶주리고서도 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잠시 뿐이요. 사람은 적어도 40일 이상을 굶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란 육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2, 30년 전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잘 풍요로운 나라가 아닌가 한다. 우리 보다 G.N.P가 몇 배 많은 나라들보다도 더 풍요롭게 산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개신교 윤리가 몸에 베어 있어서 청지기 정신과 절제 정신으로 매우 검소하게 산다. 미국의 청교도 정신 또한 그렇다. 우리보다 훨씬 부자인 일본도 매우 근검 절약한다. 이들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 흥청거리며 산다. 그러다가 우리는 I'm F를 맞은 것이다. M. Weber의 지적대로 자본주의 정신은 개신교 윤리이다. 그는 그 근간을 청지기 사상과 절제 사상이라고 했다. 이 윤리 실천 운동이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회복되어 우리가 선진국 사람들 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근검 절약하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잘 살게 되었는데 옛날 가난하던 시절보다 더 불행해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문제로 고통 당하고 있다.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라는 단어에 익숙해졌고, 더 많은 아이들이 가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더 많은 가정들이 이혼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서구 사회화 되어 이혼율이 50%를 넘어서는 사회가 된다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사람답게 사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이 복되게 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肉饍이 가득한 집'이 아니라 가난하여도 화목한 가정이 되는 것이라 했다(잠17:1)
2) 종교적 기능
사람의 영적 일용할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요6:33) '생명의 떡'(요 6:35,48)이시고 '산 맥'(요 6:51)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떡은 은혜의 수단 되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그 누구라도 이 떡을 먹어야 비로소 실존적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이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죄책감과 삶의 무목적이라는 실존적인 늪에서 방황하게 되어 영인성 질환(靈人性 疾患/puneuma-somatic disorder)을 앓게 된다. 이 질환은 성공하였지만 허무하고, 부자가 되었지만 살맛이 없고, 목적하던 정상에 올랐지만 의미가 없는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증후군을 나타낸다. 칼 융은 "인생의 후반기 즉 35세 이후에 인생의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는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성경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정신은 '영과 혼'을 말한다. (살전 5:23) (히 4:12) 사람의 혼은 뇌세포의 생리적 기능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으로 영(靈)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진 내용물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죽어 뇌세포가 썩어 없어져도 혼은 영과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처럼 영과 혼은 둘이면서도 하나인 셈이다. 따라서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려면 우선 영적 건강이 선행되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V. Satir 여사도 현대 가정의 가장 무서운 병은 영적 자아의 상실에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가정 붕괴는 이 영적 기능의 결핍이 주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현대 서구 사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애정 표현에 익숙한 가정 문화를 이루었으나 영적 기능의 결핍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나는 가정의 영적 기능을 {가정의 선교 선언(mission statement)}이라 부르고 싶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이 선언이 건강과 행복 그리고 성장의 근본이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3) 심리적 기능
사람은 내적으로 '영적인 양식'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양식'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매우 은혜를 많이 받아 영적 양식이 풍족하여도,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양식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정신적으로 애정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 새 계명은 영적 양식과 관련된 "하나님-사랑"과 정신적 양식과 관련된 "사람-사랑"으로 요약하게 된다.
사람은 영적 자아와 신체적 자아 그리고 심리적 자아를 지닌 영리(靈理)와 생리(生理) 그리고 심리(心理)적인 일용한 양식이 필요한 존재이다. 사람의 영과 혼 그리고 몸은 상호 작용하는 삼투압(osmosis) 속에서 항상성(恒常性/homeostasis)을 유지하고 있다. 이 항상성 작용에 의해서 이 세 단위는 셋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셋인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양식이 모두 풍족하여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전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기능 가정이 되는 법이다.
2. 병든 주기능(主機能/main function) 가정
좀더 구체적인 의미의 순기능 가정이란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기능들이 주기능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가정을 말하며, 역기능적인 가정이란 주기능이 취약하여 모든 기능들이 손상을 입는 가정을 말한다. 가정의 위기는 가정의 주기능에 대한 무관심과 오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가정의 주기능에 달려 있다. 무엇이 가정의 주기능인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다(창2:18). 존 밀턴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천지 창조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최초의 것이 아담의 고독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니시는 에덴 동산에서 왜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까? 창세기 2장은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으니 영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불행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 안에서 주님을 모시고 만족하게 살고 있으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4:12)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전 13:12上)라는 아직은 '부분적으로'(:12下) 주님을 알고 있음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친히 거니시는 동산에서 하나님을 친견(親見)하며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2中)라는 기도가 이미 성취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었으니 그 영적인 만족은 가히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담은 지금 영적으로 대단히 만족한 상태였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에덴 동산은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쾌적한 동산이었으며, 모든 것들은 무공해 완전 자연 식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육체적인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담의 불행은 영과 육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담의 혼(魂)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인 애정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담은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서로 애정을 주고받고 살 수 있도록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만들어 주셨다(창2:18,25).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의 근본적인 주기능과 주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영육간에 건강하게 하시고]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그러니 혼의 결핍으로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의 문제는 현대인의 문제인 셈이다. 애정이 가정의 주기능이다. 주기능이 손상되지 않아야 순기능 가정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가정의 주기능이 다른 기능들로 인하여 손상되면 역기능 가정이다. 역기능적인 가정은 불행한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IV. 주기능의 수단 - 애정의 수단(愛情의 手段/ means of affection)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서의 말씀과 성례전이 필요하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완성된 사건이지만 만약에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과 성례전이 없다면 구원의 사건은 우리에게 공급될 수 없는 것이다. 은혜의 전달을 위하여 공급 수단이 필요한 것처럼 애정의 전달을 위해서도 공급 수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발전소에 전기가 넘쳐 나며 팔당 댐에 물이 넘쳐 나면 무엇하랴. 전기는 전선을, 물은 수도관을 통하여 공급되지 아니하면 나에게 빛과 생명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성령 충만하여 마음속에 그 열매로서 사랑이 넘쳐 나면 무엇하랴. 마음속의 사랑은 발전소의 전기나 팔당의 물에 지나지 않음이다. 애정이란 '애정의 수단'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야 비로소 정신적인 양식이 되는 법이다. 이를 '愛情의 手段(means of affection)'이라고 한다. 무엇을 통하여 마음속의 애정을 상대방에게 전달 할 수 있을까? 애정의 수단은 바로 communication이다. 이는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구별된다.
1.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
미국의 어느 가정 상담가는 비유하기를 사람은 '빵-기계와 국수-기계'로 구별된다고 했다. 이를 우리 문화로 해석하면 사람은 '따뜻한 밥'과 '찬밥'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는 '따뜻한 밥'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찬 밥'과 같은 사람으로 대별할 수 있다. '따뜻한 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데 '찬 밥'에서는 냉기가 나는 법이다. 사람이 따뜻한 애정의 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지 냉기를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찬밥을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신자라고 한들, 만약 '찬 밥'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물론 자기야 구원받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는 사명을 하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는 '좀 더 따뜻한 얼굴, 부드러운 음성'이라는 구체적인 변화와 성숙이 아쉽다.
2.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
1)가장 중요한 애정의 수단 - 칭찬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간접적인데 비하여 직접적이고 구체성을 지니는 수단이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가장 효과적인 애정의 수단은 바로 "칭찬"이다. 칭찬은 많은 수고가 필요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위력은 대단하다. 애정을 공급하는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파이프( main pipe)가 칭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녀노소 누구나 칭찬을 받으면 행복하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모든 가족 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된다. 칭찬은 기적을 가져온다. 마치 시들었던 화초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면 줄기가 힘을 얻고 잎이 활짝 피어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꾸준한 칭찬을 통하여 애정이 재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자주 보게 된다.
(1) 칭찬의 기적
필자는 가정 상담을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칭찬이라는 숙제를 하도록 하고 있다.
어느 날 자기 부인에 대하여 온갖 불평을 털어놓는 남편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분에게도 예의 칭찬 숙제를 내주었다.
그 날 밤늦게 귀가한 그 분에게 부인은 습관적으로 된장 찌개를 다시 데워서 밥상을 차려 내었다. 남편이 먹어 보니 된장은 너무 짰다. 무심코 찌개를 다시 데웠으니 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보. 오늘 된장 찌개가 참 맛있어요. 혹 장모님께서 다녀가셨오. 장모님 맛인데...." 하면서 칭찬을 했다. 물론 속으로는 "되게 짜다. 짜...." 했을 것이다.
부인이 들으니 오늘은 참으로 남편이 이상했다. 그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준비하여도 평생 "맛있다."는 칭찬은커녕 언제고 음식 타박만 하던 남편이 갑자기 칭찬을 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참으로 웬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도 칭찬은 계속되었다. 부인은 고마우면서도 그 칭찬의 수준에 맞는 음식을 하려니 아무래도 정성껏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정성을 드려서 안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사람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빌4:13)
삼일 째 되던 날 저녁 식탁의 된장 찌개에 기적이 일어났다. 참으로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는 된장 찌개가 올라온 것이다. 고마움의 표시로 '맛있다'고 한 간단한 칭찬이 "된장의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더욱 중요한 일은 부인의 마음속에 나타난 변화였다. 그 때까지 음식을 준비하려면 "내가 이 집의 가정부인가? 내가 저 못난 남자를 위하여 평생 음식이나 만들어야 하나..."는 짜증스럽던 억울함이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는 에너지가 솟아난 것이다. 이 세상에 된장 찌개 하나를 맛있게 끓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가정의 기적은 계속되었다. 며칠 후 저녁이었다. 그 날도 늦은 귀가여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까지 모두 저녁 식사를 하지 않고 밥상에 둘러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초등 학교 다니는 아이에게 식사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 최근에 우리 가족이 너무 행복하여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깜짝 놀라는 아버지께 "얼마전 까지는 아버지께서 저를 보실 때마다 숙제는 했느냐 손은 씻었느냐 하시며 꾸중만 하셨는데요, 요즈음은 저희들을 보실 때마다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 기쁘고 행복하여 아버지 오시기를 기다리게 됩니다."라고 했다. 이런 칭찬의 기적을 소개하려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칭찬을 실천해 보시라. 기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2) 제눈의 안경
칭찬의 기적을 말하면 자주 나오는 반발성 질문이 있다. '나의 남편을 몰라서 그렇지. 나의 남편은 칭찬할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칭찬할 것이 있으면 나도 남처럼 칭찬하면서 행복하게 살지 이렇게 살겠느냐. .'고 말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먼저 가정은 학교도 직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과 학교에서의 칭찬은 애정의 수단이 아니고, 보상의 수단으로서 하는 것이다. 가정의 칭찬은 애정의 수단이기 때문에 무조건 모든 가족들이 심리적인 양식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직장과 학교에서는 칭찬 받을 사람이 있고, 못 받을 사람이 있는 법이나, 가정은 모든 가족이 칭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든 인간은 칭찬 받을 면과 비난받을 면이 있는 양면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 양면이 매우 정확하게 반반이 되도록 하셨다.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만점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전인적으로 보면 50:50인 셈이다. 예를 들어, 구약을 대표하여 아브라함을 신약을 대표하여 베드로를 보자. 두 분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사람이란 글 잘하면 말이 어둔하고, 말 잘하면 글이 어둔한 법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고 '나'인 셈이다. 어느 반을 보고 사느냐는 것이다. 칭찬할 반을 보고 사는 이는 복된 사람이다. 그러나 한사코 작정하고 칭찬할 면은 보지 않고 비난할 반면만을 보고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아가 편재된 민망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란 그렇게 사는 법이 아니다. 좋은 면과 고마운 것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기에도 '인생이란 겨우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이라는 단 한 번 주어진 짧은 기회인데, 어느 세월에 비난할 것을 찾아 들춰 미워하고 비난하며 살아갈 시간이 있겠는가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사는 자아의 경향성을 '제눈의 안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내적 심상(心象/self image)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행동의 경향성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제눈의 안경은 '칭찬의 안경'과 '비난의 안경'이 있으니, 다행히도 "칭찬의 안경"을 쓰신 분은 감사할 일이며, 불행히도 '비난의 안경'을 쓰고 있는 분은 '제눈의 안경'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제 '칭찬의 안경'을 썼으니 상대방의 비난할 것은 보이지 않고 칭찬할 것만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칭찬의 안경'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노력만큼 쉽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엉겁결에,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비난의 안경'을 사용하게 되는 사람이다. 이런 케이스는 전문가의 상담을 통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제눈의 안경'을 T/A(거래분석론/Transactional Analysis)에서 에릭 번(E. Berne)은 '비난의 안경'을 C.P(Critical Parent)로, "칭찬의 안경'을 N.P(Nurturing Parent)라 한다. 이 C.P는 생후 60개월경에 형성되어 18세경에 완성되는 것으로 성장 과정의 산물이다.
찰스 셀(C. Shell)이 말한 것처럼 '과거는 현재 이상의 것'으로 불행한 성장 과정을 통하여 C.P가 고착(固着/fixation)된 경우에는 '비난의 안경'을 벗고 '칭찬의 안경'을 사용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사례를 자아 편재(自我 偏在)라고 한다. 자아 편재를 수정(修正)하기 위하여 T/A는 매우 유용한 상담 기법이다. 먼저 Ego Gram 검사 도구를 활용하여 C.P를 측정하고, 그 편재 수준에 따라서 첫기억과 이드 분석 접근으로 어렵지 않게 자아를 수정할 수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편재된 '제눈의 안경'(자아)을 수정해야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다.
2) I-Massage와 No-Loser's Model
칭찬이란 심리적인 일용할 양식이기에 일상 생활화하여야 한다. 우리가 마치 육체적 일용할 양식을 매일 세끼 꾸준히 섭취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칭찬을 일상 생활화하려면 이 두 가지의 실천이 필요하다.
(1) I-Massage는 1인칭을 주어로 하는 언어의 생활이다.
우리의 메시지는 1인칭 언어(I-Massage)와 2인칭 언어(You-Massage)로 나눌 수 있다. 2인칭 언어를 사용하면 메시지는 왜곡되고 애정이 차단되게 된다. 마음속의 생각과 애정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 '저' '내 생각'으로 시작되는 1인칭 언어를 습관화하여야 한다. 무심코 '당신' '너' 또는 2인칭이 생략된 '왜'로 시작되는 언어는 마음에도 없는 비난이 썩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쉽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일 오후에 교회에서 하루 종일 예배와 봉사로 피곤하여 집에 돌아왔다. 자녀들은 반가워 엄마에게 안겨 오면 올 것이다. 이 때 당신은 무심코 '애들이 왜 이래. 저리가'라는 2인칭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아이를 사랑하고 있고, 아이가 반기는 것과 같이 반가운데 단지 피곤할 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전혀 전달이 되지 못하고, 아이들이 받는 메시지는 엉뚱하게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싫어한다' '너는 가치가 없다'는 마음에도 없는 뜻이 전달되게 된다. 지금 엄마는 단지 피곤할 뿐이지 교회에서 은혜 받고 더욱 자녀를 사랑하려는 다짐을 하고 귀가하였을 것이다.
이럴 때에 '엄마는 지금 피곤하단다. 조금 엄마가 쉬도록 해주면 좋겠다'라는 1인칭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1인칭 언어를 사용하면 자기의 상태가 정확하게 전달되면서도 애정의 차단을 막을 수가 있게 된다. 이 때에 아이들은 엄마의 상태를 이해하고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섭섭하거나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엄마를 편히 쉬시도록 도울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너무 늦게 귀가하게 된 남편들은 부인의 따뜻함을 기대하지는 못한다. 사람이란 실패와 실수하여 비난받을 짓을 하였을 때에 이에 합당한 벌을 무심코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또 바가지를 한바탕 긁히겠지'라고 생각하고 집에 오게 된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기대한 것처럼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매우 만족하여 잠을 잘 자게 된다.
정서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물질이다. 기대에 합당한 비난을 받으니 충족감에 잠이 잘 오는 법이다. 마치 배고파 어서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지 하고 기대하던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곤히 잠드는 것과 흡사하다. 그래서 비난 많이 받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행동 수정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배고파 집에 왔는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빈속에 잠을 청하게 되면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것과 같이 정서적으로도 당연히 비난을 기대했으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빈속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그 빈 공간을 반성으로 채우게 되는 법이다.
밤늦게 귀가하는 가족에게 "당신 왜 늦었오" "너 또 늦었구나"라는 2인칭 언어가 아니라 "제가 걱정 많이 했습니다"라는 따뜻한 1인칭 언어를 사용하면 매우 행동 수정에 효과적이다. 물론 걱정한 것이 사실이니 걱정했었음을 전달하는 것이 바른 언어이다. 걱정하였으면서도 무심코 비난이나 전달하는 2인칭 언어는 이제 그만 반복하자.
(2)No- Loser's Model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칭찬하면서 1인칭 언어를 사용하면서 행복하여지던 가정에 위기가 닥쳐올 때가 있다. 한 가정은 공동체로서 의견을 조정하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족간에 의견이 달라서 누군가는 패자(敗者)가 되는 위기가 올 수 있다.
가정은 승(勝)과 부(負)를 가리는 곳이 아니다. 모든 가족은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정은 직장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다. 가정은 경쟁하는 곳이 아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의 패자가 되면 조만 간에 승자가 되었던 가족도 조만 간에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승부법(No-Loser's Model)이 중요한 애정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가족 모두가 승자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즐거운 휴가를 앞두고 장소를 결정하는 중이다. 좀처럼 의견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남편과 산을 주장하는 부인이 서로 양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음 약한 부인이 양보하고 바다로 결정되었다고 하자. 남편이 승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휴가 내내 패자가 되어 있는 부인에게 남편은 미안하여 결국 자기도 패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다. 부모도 자녀도 패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승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나의 의견이 '제1의 방법'이고, 상대방의 의견이 '제2의 방법'이라면 나와 상대방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제3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장소를 찾으면 될 것이다.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제3의 방법을 찾으려는 습관이 몸에 베지 않고 서로 승자가 되려는데 있다. 제3의 방법은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No-Loser's 모델로 대접받고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다. 어린이 때에 자녀를 인격적으로 양육한다는 의미는 아이의 자기 결정권(self- determination)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아이를 패자로 양육하면 승부를 내려는 심보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제3의 방법은 어린이 때부터 몸에 베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가 맞이 하는 미래 사회에 있어서의 가정 사역의 중요성과 교회 성장의 관계 그리고 가정 사역의 원리들를 생각하는 이 아침에 우리 가정 사역자들이 해야 할 역할을 내다 보면서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러기에 앞으로 [한국가정사역연구소]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