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을 말하다

[스크랩] 북아일랜드 30년 피의 분쟁.. 평화 상징 된 흰 손수건의 신부님

김노섭-열린문 2016. 10. 1. 17:12
북아일랜드 30년 피의 분쟁.. 평화 상징 된 흰 손수건의 신부님
http://v.media.daum.net/v/20160910043823837

출처 :  [미디어다음] 사설칼럼 
글쓴이 : 한국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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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 ‘트러블(trouble)’은 아주 넓은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피부에 생긴 뾰루지, 사소한 말다툼이나 골칫거리, 사람이 죽어나가는 분쟁이 다 트러블이다. 분쟁으로서의 트러블은 책임의 경중과 윤리적 판단을 유보ㆍ회피하거나 적극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새로운 트러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어권에서 ‘The Troubles’는 북아일랜드 분쟁, 즉 196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북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해온 소수파 가톨릭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영국의 유혈 대립을 통칭한다. 영국 잔류를 희망하는 신교파 주민들의 준군사조직으로 IRA와 다름 없이 전투와 테러를 자행해온 얼스터 방위동맹(UDA)까지 삼파전으로 뭉뚱그릴 수도 있다. 저 30년 사이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테러와 보복 테러 납치 암살로 한 해 평균 100여 명, 약 3,500여 명이 숨졌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상시 검속과 초법적 구금ㆍ고문도 자행됐다. 북아일랜드는 유럽 같지 않은 유럽, 영국 같지 않은 영국이었다.

북아일랜드 에드워드 댈리 전 주교는 IRA와 영국 정부의 분쟁 한복판에서 평화와 정의의 자리를 넓혀온 사제였다. 그는 신교 통합파들로부터 기만적인 정치신부라 비난 받고 IRA로부터도 순응적 평화주의자라 성토 당했지만, 폭력이 정치적 목적에 쓰여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켰다. 물론 그의 소신은, 예나 지금이나 아득한 이상일지 모른다.  그는 72년 피의 일요일의 희생자 '재키 더디'의 사진(뒤편 작은 액자)을 늘 곁에 두고 살았다. 유튜브.
북아일랜드 에드워드 댈리 전 주교는 IRA와 영국 정부의 분쟁 한복판에서 평화와 정의의 자리를 넓혀온 사제였다. 그는 신교 통합파들로부터 기만적인 정치신부라 비난 받고 IRA로부터도 순응적 평화주의자라 성토 당했지만, 폭력이 정치적 목적에 쓰여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켰다. 물론 그의 소신은, 예나 지금이나 아득한 이상일지 모른다. 그는 72년 피의 일요일의 희생자 '재키 더디'의 사진(뒤편 작은 액자)을 늘 곁에 두고 살았다. 유튜브.

하지만, 저렇게만 말하면 ‘트러블’이 맞나 싶지만, 북아일랜드 가톨릭계라면 아무래도 억울할 것이다. 1169년 헨리2세의 아일랜드 정복 이래 이어져온 민족적 탄압, 1566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스터(북아일랜드 지역) 정벌 이후의 토지 몰수와 차별. 1641년 크롬웰은 얼스터 반영 폭동을 진압하면서 인구의 5/6를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 추방했고, ‘아일랜드 토지자산처분법(1654)’으로 경작지의 2/3를 강탈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신교도 이주민에게 불하했다. 아일랜드에서도 반영 정서가 가장 맹렬했던 얼스터가 그렇게 식민화됐고, 수적 절대 우위를 차지한 장로교 신교도들은 1920년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에도 영국 잔류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가톨릭계의 투쟁은 그들 편에서 보자면 저항과 독립운동이었고, IRA도- 훗날 여러 분파로 나뉘면서 올드IRA라 불리지만-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The Troubles’는 근 1,000년, 줄여 잡아도 400년에 이르는 일방적 수난의 역사를 배제한 채 일개 무장 분파와 영국 정부의 30년 분쟁을 등가로 놓아버린 용어였다.

북아일랜드의 신부 에드워드 댈리(Edward Daly)는 저 30년 테러와 억압의 ‘트러블’ 한복판에서 끈질기게 평화를 호소해온 주변인이고 회색인이었다. 그는 북아일랜드 인이자 가톨릭 사제로서 영국의 억압과 차별 정치에 맞섬으로써 다수 개신교 주민들에겐 반(反)통합의 정치신부로 비난 당했지만, 동시에 IRA 활동의 가장 성가신 걸림돌이기도 했다. 그가 어느 한 편의 테러에 희생되지 않은 것은 성직자라는 신분 덕도 컸겠지만, 반(反)폭력의 정의라는 좁고 가파른 능선을 지키려는 고집과, 진영적 이해 너머 선량한 다수가 지녔던 그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있어서였다. 총이 아닌 방패로써,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북아일랜드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에드워드 댈리 전 주교가 8월 8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지난 8월 이탈리아 지진 참사 현장에서 찍힌 한 장 사진으로 구원의 상징으로 유명해진 수녀 마르자나 레시처럼, 댈리의 이야기도 1972년 1월 30일 이른바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의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될 수 있다. 북아일랜드 북서부, 아일랜드와의 국경도시 데리(Derryㆍ영국이 바꿔 붙인 공식 명칭은 런던데리)에서 가톨릭계 주민들이 벌인 공민권촉구 평화행진과 유혈 진압.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참극 현장. 시민들이 호송하는 부상자가 17세 소년 재키다. 댈리는 사제 서품을 받던 날 어머니가 이름을 수놓아 선물한 흰 손수건을 흔들며 영국 공수부대의 총구 앞에 섰다. 위키피디아.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참극 현장. 시민들이 호송하는 부상자가 17세 소년 재키다. 댈리는 사제 서품을 받던 날 어머니가 이름을 수놓아 선물한 흰 손수건을 흔들며 영국 공수부대의 총구 앞에 섰다. 위키피디아.

1920년 제정된 ‘아일랜드 통치법’은 아일랜드 독립 이후 얼스터 6주의 영국 분할 통치 기본법이었다. 최대 도시 벨파스트에 자치 정부와 의회(스토몬트 의회)가 섰지만 신교 진영의 독점적 권력기구일 뿐이었고, 이후 산업화와 투자ㆍ개발도 신교도 밀집 지역에 편중됐다. 선거권은 1인 1표가 아닌 ‘1호주 1표제’로, 경제적 어려움과 종교적 이유로 대가족 단위로 살던 가톨릭 진영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60년대 말 유럽의 혁명 기운이 북아일랜드로 번지면서 구교파 시민들은 IRA의 폭력노선과 별개로 선거권 등 제도 개혁을 통한 권리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67년 설립된 ‘공민권협의회’가 대표적 예였다. 협의회는 선거제도 개선 시위를 벌였고, 그들을 진압한 경찰의 90%는 신교도였다. 시위 양상이 격해지고 IRA의 테러가 이어지자 영국은 69년 군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얼스터 방위대(UDR)와 왕립 얼스터경비대(RUCR)를 창설했다. 공민권 운동이 독립ㆍ통일운동 양상으로 확산되자 영국은 예비검속을 강화하면서 시위 자체를 불법화했다. ‘피의 일요일’이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80년 5월 광주에서 그랬듯, 그날 영국 공수부대원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4명이 숨졌고 17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행렬이 성 유진 대성당(St. Eugene Cathedral)을 지날 즈음 대열에 합류했던 보좌신부 댈리는 총상을 입은 17세 소년 재키 더디(Jackie Duddy)와 시민들 앞에 나서 피 묻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맨 몸으로 군인들의 총구 앞에 섰다. 그 극적인 장면은 ‘피의 일요일’의 참상과 북아일랜드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 이미지가 됐다. 그날 그는 거리에서, 더디 등 숨이 멎어가던 희생자들의 종부 성사를 행했다.

그날 이후 평화 노선을 지지하던 적지 않은 가톨릭계 시민들이 총에는 총으로 맞서야 한다고 믿게 됐고, 이전까지‘종이 군대(Paper Army)’에 불과하던 올드 IRA는 독립파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준군사ㆍ테러조직으로 탈바꿈했다. 며칠 뒤인 2월 4일 아일랜드 더블린 주재 영국 대사관이 불에 탔다. 댈리도 유명해졌고, 훗날의 고백처럼 “평생을 두고 감사해온 신앙의 새로운 차원”이 그날 그 자리에서 그렇게 열렸다. 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달라진 생각과 상반된 길을 선택했다. “총알이 사람 머리를 관통하는 장면을 본다면, 당신이 폭력에 대해 가졌을지 모르는 그 어떠한 낭만적인 생각도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 폭력은 절대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Irishtimes.com, 2016.8.8(http://www.irishtimes.com/news/social-affairs/religion-and-beliefs/edward-daly-an-accidental-bishop-who-disliked-the-limelight-1.2749143))

댈리는 1933년 12월 5일 아일랜드 국경마을 퍼매너(Fermanagh) 카운티 벨릭(Belleek)에서 식품가게를 운영하던 부모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탈리아 로마 아이리시 칼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5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피의 일요일 당시 38세의 그는 데리의 성유진대성당 보좌신부였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처럼, 시위가 벌어지면 열 살도 채 안된 아이들까지 경찰이나 군인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곤 하던 시절이었다. 댈리의 선친도 올드IRA 멤버였으니, 그가 60년대 공민권 운동에 동참한 것도, 당일 행진에 가담한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행진 대열에는 그 외에도 6명의 젊은 신부가 더 있었다.

참사 직후 BBC 인터뷰에서 댈리는 “그들이 스스로를 군인이라 여긴다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내가 거기 있었기에 한 치 의혹 없이 말할 수 있다. 시민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바빴고, 군인들은 그들의 등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https://www.theguardian.com/uk-news/2016/aug/08/the-most-rev-edward-daly-obituary)”고 말했다.(가디언, 16.8.8)

하지만 석 달 뒤인 72년 4월, 잉글랜드와 웨일즈 검찰총장 존 위저리(John Widgery(https://en.wikipedia.org/wiki/John_Widgery,_Baron_Widgery), 1911~1981)는 영국군의 발포가 시위대의 총격에 따른 정당한 응전이었다는 요지의 ‘위저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시민을 살상한 영국 공수연대 1대대 지휘관은 훈장을 받았다. 비무장 평화행진이었다는 시민들의 주장은 철저히 묵살됐고, 댈리 등은 거짓 선동가로 매도 당했다(http://www.irishtimes.com/news/social-affairs/religion-and-beliefs/dr-edward-daly-presidents-recall-qualities-of-perfect-pastor-1.2749476).

이듬해 교황청이 댈리를 아일랜드 공영 방송인 ‘RTE’ 종교담당 자문역으로 지명하고 한해 뒤 데리교구 주교로 파격 임명한 데는 구교 탄압을 일삼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댈리는 자신이 유명해진 것도, 주교가 된 것도 못마땅해했다. 훗날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그 사진 때문에 나는 익명성을 잃어버렸다. 끔찍한 일이었다”고 말했고, “보좌신부로서 목회활동을 하는 게 무척 행복했는데, 하루 아침에 공적인 인물이 돼버렸다”(Irishtimes, 위 기사)고 말하기도 했다.

주교로서 그는 교파와 진영을 초월해 일체의 폭력에 반대했고, 모든 폭력의 피해자를 품어 안고자 했다. 70년대 말~80년대 초 수감돼 있던 IRA 대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하라며 영국 정부를 성토했고, 81년 메이즈(Maze)교도소 수감자 10명이 단식 끝에 숨지자 존 흄(John Hume, 1937~) 등 공화파 정치인들과 연대해 유럽연합 인권위원회에 영국 정부를 제소했다. 73년 잉글랜드 버밍엄 폭탄테러(시민 21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 당했다) 용의자로 영국 경찰이 북아일랜드인 6명을 증거도 없이 체포해 심문 조작 끝에 무기징역을 살게 하자 앞장서 그들의 무죄를 주장했고, 재심 재판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했다. ‘버밍엄 식스(https://en.wikipedia.org/wiki/Birmingham_Six)’로 불리는 그들은 17년 만인 1991년 무죄로 풀려났다.

90년 10월, IRA는 42세 구교도 패트릭 질레스피(Patrick Gillespie)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 그에게 폭발물 차량 자살테러를 감행하게 했다. 그 테러로 질레스피와 영국 군인 5명이 숨졌다. 미사에서 댈리 주교는 “살인자들이 새로운 악의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들은 스스로 신의 사도라 말할지 모르고 또 일부는 위선자의 얼굴로 지금 여기 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과 행위는 악마를 좇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고 설교했다.(NYT, 16.8.8(http://www.nytimes.com/2016/08/09/world/europe/edward-daly-bishop-northern-ireland-troubles-dies.html?_r=0)) 87년 IRA 대원들의 장례미사 도중 한 대원이, 울분에서인지 추모의 의례로 그랬는지, 교회에서 총을 쏜 일이 있었다. 그는 주교로서 모든 교회의 IRA 장례미사 집전을 중지시켰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테러 가담자의 파문 여부를 결정하는 주교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IRA와 불화했던 그는 “소통(communicate)이 파문(excommunicate)보다 낫다”며 파문에는 한사코 반대했다. 영국 언론(Fleet Street)은 그런 그를 또 기만적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69년 8월 소요사태 와중에 한 시민의 집이 전소되자 보좌신부 댈리는 일가에게 교구 소유의 가옥을 제공했고, 90년 자살테러의 가해자이자 희생자였던 질레스피의 유족도 가족처럼 보살폈다. 질레스피의 아내 캐슬린(Kathleen)은 “댈리 주교는 수시로 집에 들러 우리를 위로했고, 도자기 잔에 차를 대접하면 늘 머그잔에 달라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고 말했다(http://www.irishtimes.com/news/social-affairs/religion-and-beliefs/derry-mourns-bishop-edward-daly-a-saint-and-a-hero-1.2749253). 피의 일요일의 희생자 재키 더디의 동생 케이(Kay)도 “형이 숨진 뒤로 댈리 주교는 내 가족의 특별한 친구가 됐다.(…) 그는 나의 성인이자 영웅이고, 늘 겸손한 이웃이었다”고 말했다.

댈리는 9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주교직을 내려놓았고, 회복 후 포일(Foyle) 호스피스 병원 신부로 숨질 때까지 재직했다. 사제 서임 50주년이던 2007년 인터뷰에서 그는 “주교 사임 이후 10~12년 동안 사역 신부로서 가장 충만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98년 4월, 영국과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8개 정파가 분쟁 종식에 합의(벨파스트 협정(https://en.wikipedia.org/wiki/Good_Friday_Agreement))했다. 이듬해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북아일랜드 권력분점 자치정부가 수립됐다. 2005년 IRA도 무장투쟁 중단을 선언했다. 신구파 기독교인들의 에큐메니컬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IRA 강경파인 RIRA(Real-IRA) 등 일부 분파가 아직 남아 있지만, 댈리의 평화는 승리했다. 그 공로로 존 흄(사회민주노동당 당수)과 데이비드 트림블(얼스터 통일당 당수)이 98년 노벨평화상을 탔다. 댈리는 공민권운동 시절부터 친구이자 조언자로서 흄을 도왔고, 벨파스트 협정 성사의 분기점이던 IRA의 94년 휴전 서약을 받아내는 데도 기여했다. 흄은 “힘들던 시절, 댈리는 나와 수많은 이들에게 거대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친절했다”고 말했다.(RTE, 16.8.3(http://www.rte.ie/news/2016/0808/807690-bishop-edward-daly/))

2007년 북아일랜드 경찰조사위원회 옴부즈먼 알 허친슨(Al Hutchinson)은 9명의 희생자를 낳은 72년의 데리시 클라우디(Caludy) 거리의 폭탄 테러에 한 신부(James Chesney)가 가담했고, 가톨릭교회와 영국 정부가 그를 파문하려 했다는 경찰 정보 보고서를 공개했다. 댈리는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정보와 증거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옴부즈먼은 왜 그 긴 기간 동안 조사를 했으면서 단 한 건의 증거조차 발견하지 못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나는 법의학적 증거에 근거했다는 법원 판결조차 훗날 완전히 뒤집히는 예들을 보아왔다. 체스니 신부는 체포된 적도 심문 받거나 기소되거나 유죄 선고를 받은 적도 없다. 그리고 30년 전 숨져 지금 자신을 변호할 수조차 없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가 그 범행에 가담했다고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항변했다.(bbc, 16.8.8(http://www.bbc.com/news/uk-northern-ireland-37007791))

2010년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은 장장 12년에 걸쳐 진행된 ‘피의 일요일’재조사 보고서(일명‘Saville Inquire’)를 하원에서 낭독했다. “피의 일요일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결코 정당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악행이었다.” 가톨릭계 주민들에 대한 수상의 사죄 장면은 당일 데리 시청광장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방영됐고, 환호하는 군중들 속에 댈리도 있었다. 그는 “숱한 새로운 상처를 낳았던 위저리 보고서는 이제 쓰레기통에 던져지게 됐다”며 기뻐했다.(가디언, 위 기사)

그는 2000년과 2011년 두 권의 회고록을 썼다. 2011년 책(‘A Troubled See: Memoirs of a Derry Bishop’)에서 그는 가톨릭 사제의 독신규정 완화(http://www.belfasttelegraph.co.uk/news/northern-ireland/bishop-edward-dalys-celibacy-silence-slammed-28657547.html)를 제안하기도 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