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제 담당 교수님은 ‘수녀’였습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수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에 노란색 썬글라스를 낀 키가 약간 짤막한 어떨 땐 ‘복부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분이셨지요. 그분 성씨가 ‘심’가여서 우리는 ‘심 카리스마’라고 불렀습니다.
교수님께서 한 번은 유치원에 갔답니다. 애를 낳은 것도 아니고 수녀가 무슨 유치원에 가셨을까 싶은데 사실은 그 유치원 원장이 대학원 제자였나 봅니다. 그 원장 제자가 하도 조르고 졸라 어쩔 수 없이 간 거죠. 와서 유치원 아이들 앉혀 놓고 ‘좋은 얘기(?)’ 몇 자락을 청했던 것 같습니다. 하도 들 볶여 유치원에 도착을 했고 딱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그 유치원 ‘표어’가 눈에 들어왔답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자.’
교수님께서 영 거슬리셨던지 제자에게 물으셨다더군요. “어떤 게 착한 어린인데?” 원장 제자 왈.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착한 어린이죠!” 그러더랍니다. 그러자 교수님 왈 “말 잘 들어서 어디에 써 묵을라고? 표어 고치라!” 하시면서 써 주셨답니다. “웃는 어린이, 정직한 어린이, 책임감 있는 어린이.” 그러면서 저희들에게 “이것이 상담가의 기본 자질이야!”라며 수업을 이어가셨습니다.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을 원합니다. 그래야만 손해가 가도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 년 전(벌써 이 일이 1년이 되어가는군요.)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이 시대의 ‘착한 아이 신드롬’이 만들어 낸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냥 선실에 머물러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던 ‘착한 아이들’은 결국 그 선실을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 선생님의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최근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폐지’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선별적 무상 급식을 통해 낭비 되는 복지 예산을 아끼고 EBS 교육 방송 청취권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법으로 아낀 예산을 학생들에게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핵심적 논리는 ‘선별적 무상 급식’이 낳을 ‘선별적 박탈감’의 문제가 결국 학생들의 인권과 연결되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과연 경남 도지사가 그 핵심 논리를 몰랐을까요?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착한 도민’들은 내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고맙게 받을 것이라는 착각에서가 아닐까요?
이 땅의 위정자를 비롯한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 속에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다.”라는 정의(定意)가 마치 공식처럼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정과 정책에 대해 아무런 이의 없이 따를 것이라는 ‘만용’이 자라갑니다. 정말 ‘착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은 당할 수 밖에 없고 늘 손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많은 목사들이 ‘착한 성도’를 원합니다. 문제는 ‘착한 성도’를 원하는 목사들이 ‘착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강단에서 무슨 말을 해도 성도들과 일대일로 만나 무슨 대화를 해도, 심지어 성희롱에 성폭행을 해도 가만히 있을 ‘착한 성도’를 원하는 목사들은 착하지 않습니다. 같은 목사의 입장에서 정말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합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우리네 속담도 있듯이 나도 배울까 심히 두렵고 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이리’와 같이 물어뜯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도 ‘순결’을 먼저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혜’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예수의 뜻을 따라 ‘목자’로 불리움 받은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지혜’를 먼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순결’을 강요하는 ‘삯꾼 목자’이 많은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요즘 들어 대학원 시절 그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웃는, 정직한, 책임감 있는 어린이’가 많이 생각납니다. ‘착하지 않은 세상’도, ‘마냥 착한 국민’도 배워야 할 세 단어 ‘웃음, 정직, 책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땅에 많은 정책 결정자들이 국민이 정직하게, 자신의 책임만 다해도 웃을 수 있는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국민들도 나의 결정이 결국 내 미래를 결정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투표해야 정직하게 살아도 웃을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라만 그럴까요? 목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지혜’로 무장시켜 ‘이리’와 같은 세상에서도 웃으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추종하는 ‘착한 좀비’로 만들면 안됩니다. 그것은 ‘이단 교주’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착한 성도’를 만드는 것에 있어선 안 됩니다. 참 예수의 제자는 ‘지혜와 순결’에 균형 잡힌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뜻에 무작정 ‘아멘’하는 성도가 아니라 오히려 ‘뱀 같은 지혜’로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되뇌어 보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성도가 결국 ‘이리와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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