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신학

[스크랩]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라

김노섭-열린문 2014. 9. 16. 22:41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라”

□ 사 55:1-9 □

                                    김근주(장신대 박사과정)

본문 사역


1 오호라!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그리고 은없는 자도 오라

사서 먹으라 와서 사라 은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2 어찌하여 너희가 양식아닌 것에 은을 지불하느냐 배부르도록 못할 것에 너희의 수고한 것을(지불하느냐)

정성다해 내게 들으라 그리고 좋은 것을 먹으라 그러면 네가 너희영혼의 풍성함가운데 심히 기뻐하리라

3 너희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내게 오라 너희 영혼이 살기 위해서 들으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다윗을 위한 견고한 은혜라

4 보라 내가 그를 백성들을 위한 증인으로 삼았으니 백성들의 지도자요 명령자라

5 보라 네가 모르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르리라 그리고 너를 알지못하는 한 민족이 너에게로 달려오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서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위해서이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음이라

6 그가 찾아질 수 있는 때에 여호와를 찾으라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한 자는 그의 길을 떠날 것이라 그리고 죄인은 그의 궁리를 (떠날 것이라)

그리고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러니 우리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라) 그가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

8 나의 생각들은 너희들의 생각들과 다르며 너희의 길들과 나의 길들은 다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나의 길들은 너희의 길들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들은 너희의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⑴“오라”: 히브리어 성경(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은 단락기호를 써서 이 단어를 다음에 이어지는 동사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 경우, “오라 사라 그리고 먹으라 그리고 오라 사라”식으로 된다. 그러나 동사가 이렇게 중복된다면, 각 동사의 쓰임새가 다소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오라”라는 명령을 그 앞의 내용과 연결시켰다. 히브리어 성경의 편집자인 윈튼 토마스(D. Winton Thomas)도 이 동사를 윗 줄에 배열하여 ‘은없는 자도 오라’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⑵사역에서 괄호로 된 부분들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문맥상 당연히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뜻한다.

⑶히브리어에서 강조를 표시하는 고유한 용법인 부정사 절대형의 용법은 대개 우리번역으로는 강조의 부사로 표현된다. 여기서는 ‘듣다’라는 동사와 이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이 쓰인 본문을 ‘정성다해 듣다’로 옮겼다.

⑷‘그리고는’과 ‘그러니’는 히브리어 본문에서 동일한 접속사 <와우 ו>가 쓰였다. 문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옮긴 것이다.

본문의 짜임새


본문을 읽을 때 두드러진 특징은 명령형이 여러 번 나온다는 점이다. 1-3절안에 모두 11번의 명령이 나오고, 6절에 가면 다시 2번의 명령이 나온다. 7절의 ‘떠날 것이라’와 ‘돌이킬 것이라’는 문법적인 형태는 명령형이 아니지만 실질적인 의미로 보자면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한글 개역과 표준 새번역은 이 부분을 모두 명령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짜임새를 나눌 때 이러한 명령들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1-5절이 전반부, 6-9절이 후반부를 이룬다. 각 절의 명령들을 살펴보자. 7절도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물로 나아오라, 오라

   사서 먹으라, 와서 사라

2 정성다해 내게 들으라, 좋은 것을 먹으라

3 귀를 기울이라, 나에게 오라


6 여호와를 찾으라, 그를 부르라

7 그의 길을 떠나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본문에 나타나는 명령들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선 앞부분의 명령들은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뒷부분의 명령들은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어간다. 다시 말하면, 1절에 나오는 ‘물로 나아오라’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3절에 가면 ‘정성다해 내게 들으라’, ‘나에게 오라’라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 여호와께로 가는 것의 의미는 6절에 가면 ‘여호와를 찾으라, 그를 부르라’로, 7절에서는 ‘(이전에 행하던 악한) 길을 떠나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첫 부르심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일상생활의 한 부분을 들어 전달되고 이것이 점차 구체화되어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이 뚜렷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물로 나아오라여호와께로 오라여호와를 찾으라길을 떠나 여호와께 돌아오라


한편 본문의 각 절에서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각 부분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나누는데 도움이 된다. 1-4절의 내용은 일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5절에 가면 하나님이 삼인칭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의 6-7절에서도 하나님은 삼인칭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8-9절은 다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일인칭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본문의 전반부는 1-4절, 5절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고, 후반부역시 6-7절과 8-9절의 둘로 나눌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중심으로 본문의 짜임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다음에서 ‘전’, ‘후’는 각 절을 둘로 가를 경우 각각 ‘전반절’과 ‘후반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1-5)

           하나님의 부르심(1)

           하나님의 진단(2전)

           나에게로 오라(2후-3전)

           하나님의 약속: 다윗 언약(3후-4)

           다가올 구원 선포(5)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요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6-9)

           하나님께로 돌아오라(6-7)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름(8-9)


본문의 배경


이사야서의 통일성에 관한 논의는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 왔다. 오늘날에 와서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최소한 둘로 나누어 생각한다. 1-39장과 40-66장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근거들이 제시되지만, 지금 이 글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다룰 수 없고, 다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할 때에 적어도 이사야서의 내용이 단일 저자이건 여러 저자이건 뚜렷이 구분되는 주제를 담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1-3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말씀이 주어지는 데 비해, 40장 이후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나아가, 40-55장까지와 56-66장의 본문도 그 주요 내용에 있어서 다른 중심을 지니고 있다고 보인다. 그 정확한 저작 시기를 떠나서 이사야서의 세 부분이 각각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주의하는 것은 이사야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보인다.

특히, 44장 28절과 45장 1절에 등장하는 ‘고레스’라는 이름은 이사야서 후반부의 구원 약속이 주전 6세기 고레스의 등장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견해대로 주전 8세기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미래 예측이든, 아니면 주전 6세기를 살던 이름없는 예언자(이른바 ‘제2이사야’)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든, 이사야서의 후반부를 이해하는 배경은 고레스의 시대라는 점은 분명하다.


주전 8세기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다름아닌 남왕국 유다의 멸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멸망은 단순히 나라의 힘이 약한 결과라기보다는 유다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유다의 멸망이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의 현재의 처지를 초래한 원인에 대한 냉정한 반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반성은 다시 이스라엘땅으로 돌아온 이들의 역사회고에서 잘 드러난다(스 9:7, 느 9:32-37).


그러나 죄로 인한 나라의 위태로움과 뒤이은 멸망, 대다수 국민이 포로로 이방땅에 끌려가게 된 현실의 와중에서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심판의 자욱한 안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소망의 빛을 발견하였다. 이사야서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구원의 말씀이 주전 6세기에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소망의 신앙은 이미 나라의 위기시에서부터 알려지고 간직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 신앙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이 행하실 구원을 기대하며 그들을 둘러싼 역사를 주의깊게 관찰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파괴한 느부갓네살이 죽은 이후 바빌론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7년동안에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바빌론 종래의 마르둑신앙대신에 달의 신 신(Sin)을 숭배하는 의식을 도입한 나보니두스의 집권시기는 이러한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바빌론의 혼란은 그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을 강화시키는 기회가 되었으니, 이 시기에 성장한 나라가 바로 고레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였다. 주전 550년경 메대 제국을 장악한 고레스는 주전 547/6년 리디아로 진격하고 이 과정에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수리아, 길리기아등에서 바빌론의 세력을 무찔렀다(존 브라이트, 박문재역,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485). 바빌론 주민들과 바빌론에게 멸망당한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푼 그의 정책에 따라 환호와 환영의 물결속에 고레스는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그는 그의 재위 첫해에(주전 538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공동체 및 제의의 재건을 명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 이른바 ‘고레스 칙령’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고레스를 지명하여 불러 그에게 칭호를 주었다고 이사야는 전하고 있다(45:4). 고레스에게 주어진 칭호는 다윗왕가의 왕들에게 주어지던 ‘기름받은’ 자(사 45:1), 여호와의 ‘목자’(사 44:28)등이었다.


역사의 변혁기속에 여러 세력이 명멸하고 그 가운데 역사의 구체적 세력들을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이사야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본문 풀이

하나님의 부르심(1절)

개역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 1절은 <호이 יוה>라는 감탄사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늘 탄식의 내용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상(喪)을 당해 곡을 하는 사람들의 ‘아이고’소리에 비할 수 있다(왕상 13:30, 렘 22:18). 다른 경우들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전달할 때 쓰이며 ‘화있을찐저, 슬프다’등으로 옮겨진다(사 10:5, 17:12, 렘 22:13, 암 5:18). 그렇지만 지금의 본문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55장이전의 내용에서도 아무런 심판과 연관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 단어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곡을 할 때에, 탄식을 할 때에 쓰이는 어구를 사용함을 통해 이어질 내용에 대해 주목시키면서 말하는 이의 애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심판을 넘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사랑을 전하기 위해 <호이>가 쓰인 또 다른 예를 스가랴 2장 10절과 11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간절한 외침은 무엇인가?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는 것이다.

1절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명령형동사의 반복이다. “(물로) 오라, (은없는 자도) 오라, 사라, 먹으라, 오라, 사라”-이같이 한 절안에 모두 6번의 명령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반은 <할라크 ךלה>동사의 명령형인 <레쿠 וכל> 즉, “오라”이다. 동사의 이러한 반복으로 인해 쿰란사본이나 칠십인역, 시리아역같은 사본들은 이 동사들중에 끝의 둘을 빼버리고 있다. 그 경우, 본문을 읽기가 훨씬 부드럽고 수월한 것은 분명하다(“...물로 나아오라 와서 사먹으라 은없이 값없이...”). 그러나, 여러 동사의 중복이 전해주고 있는 강한 호소력은 그 만큼 삭감되고 만다. 베스터만은 1절의 상황이 시장에서 자신의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외침에서 따온 것으로 본다(C.Westermann, Isaiah 40-66, London: SCM Press, 1969, 281-282). 자신이 가진 물건을 팔기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외쳐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다. 거리에 서서 지나는 사람을 외쳐 부르는 하나님의 모습은 잠언 8장에서도 잘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목마른 이들에게 물로 나아오라고 부르신다. 목마른 이가 물로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그렇지 않기에 이렇듯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을 파시는 이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그러나 이 물을 사는 데에는 은이 필요없다. 1절안에 동사가 여러번 반복되는 것 외에 지불할 필요없다는 의미도 세 번이나 반복된다(“은없는 자도..오라”, “은없이 사라”, “...값없이”). 장사꾼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위해 외칠 가장 핵심적인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과 그 물건의 값일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목마름을 해갈할 물을 파는 이이며 그 값은 거저라는 것을 간절히 외치고 계신 것이다.


처음에는 물로 나아오라고 하였지만 1절 마지막으로 가면 이 ‘물장수’는 포도주와 젖까지도 거저 주는 이임이 드러난다. 포도주는 즐거움과 풍성함을 상징한다.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이는 자신의 돈으로 포도주를 사서 여호와앞에서 즐거워하며 가족과 함께 이를 마신다(신 14:26). 길거리에 서서 어리석은 자를 부르는 지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와서 자신이 주는 포도주를 마시고 생명을 얻을 것을 권한다(잠 9:2,5). ‘젖’으로 옮긴 <할라브 בלח>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산물이다(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 3:8, 13:5, 민 13:27, 신 6:3, 렘 11:5, 겔 20:6). 그러므로 포도주와 젖은 풍성함과 평안을 나타내는 소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아 5: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가운데 임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의 산들에서는 포도주와 젖이 흘러 나올 것이다(욜 3:18).


하나님은 목마름을 해갈할 물을 거저 주시는 분이시며 나아가 포도주와 젖을 주시어 목마른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며 결실케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하나님의 진단(2절 전반절)

하나님은 왜 이다지도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신가? 2절 전반절은 이스라엘의 실상이 나타나 있다. ‘무엇무엇이 없는(without)'을 의미하는 어구인 <벨로 אולב>가 1절 후반절에 두 번, 2절 전반절에 두 번 쓰이고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사용은 1절 후반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2절 전반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상 사이에 명확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1절 후반절:     은없이     /     값없이

                  ↕                ↕

2절 전반절: 양식이 아닌 것 / 배부르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목마름을 해결하시고 풍요함을 주시건만, 정작 이스라엘은 아무 소용없는 것에 그들의 모든 정성을 다 쏟고 있다. 자신들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서 먹을 것을 사지만 그것은 배고픔을 해결할 양식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힘들여 모은 산물을 지불하지만 그것을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유다의 멸망시기에 유다안에서 여러 움직임들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바빌론에게 붙어서 안위를 도모하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애굽을 의지하여 살 길을 찾으려는 이들도 있었다(사 30:1-2, 31:1). 바빌론을로 잡혀가는 동족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살 길을 찾아 애굽으로 도망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난국을 초래한 까닭을 알지 못한 채, 열방이 섬기던 우상에게 자신의 돈주머니를 털어 금을 내고 은을 내며 자신의 구원과 평안을 빌었던 것이다(사 46:6,7). 이사야서의 후반부는 살 길을 찾아 헤메되 헛되이 우상에게 힘을 쓰고 있는 이스라엘의 처량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40:18-20, 41:29, 42:17, 44:9-20, 45:20, 46:1-7). 이사야서 전체안에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만 그 지적 내용은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1-39장안에서 지적되는 이스라엘의 죄의 주된 것은 ‘불의한 행실’이다(1:10-17,21-23, 3:14-26, 5:8-12,18-25, 10:1-2, 28:1-8, 33:1). 이웃을 압제하고 공의를 세우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다시피, 40-55장의 경우,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의 핵심은 그들을 지으신 여호와를 그들이 의지하지 않고 헛된 우상에게 무릎끓고 엎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56-66장부분에서는 우상을 의지하는 죄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각각의 부분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대해 주어진 말씀임을 깨닫게 한다. 40-55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 여호와외에는 이스라엘에 신이 없다는 것이다(44:8).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이는 여호와시며(45:5-7), 여호와는 자기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신다(42:8, 48:11).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45:13, 52:3).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신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사 51:12).


나에게로 오라(2절후반절-3절 전반절)

이스라엘의 살 길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귀기울이는 것이다. 1절에서 물로 나아오라고 외치던 하나님의 소리는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나에게 들으라”로 나타난다. 물근원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사 49:10). 물을 사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먹으라던 외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그를 통해 좋은 것을 먹으라는 외침으로 되었다.


“심히 기뻐하리라”로 번역된 <티트안나그 גנעתת>는 <아나그 גנע>동사의 재귀사역형(hithpael)으로, 커다란 기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인해 크게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욥 22:26, 27:10, 시 37:4,11, 사 58:14, 66:11). 특히 이사야 66장 11절은 아이가 어미의 품에서 젖을 넉넉히 빨고 난 뒤의 넉넉함같이 풍성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기름짐”을 의미하는 <데셴 ןשׁד>도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와 비옥을 상징한다(삿 9:9, 욥 36:16, 시 36:8, 63:5, 65:11, 렘 31:14).

이스라엘이 구하고 찾은 것은 그들을 전혀 배부르게 못할 것이었지만, 하나님께로 와서 그 말을 들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배부르게 하시며 기름진 것으로 풍요하게 하신다.


3절 전반절은 2절 후반절을 다른 말로 다시 전하고 있다. “나에게 들으라”가 여기서는 “나에게 오라”로 표현되었다. “정성다해 들으라”를 “네 귀를 기울이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듣는 것”이다. 들으면 우리 영혼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3절 후반절-4절)

본문을 보면서 알 수 있듯이, 본문은 우선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그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인상적으로 알리며, 그에 이어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이 물과 포도주, 젖을 거저 파는 장사꾼의 비유를 통해 전달되었고, 이것은 자신에게로 나아와서 그 말을 들을 것을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로 구체화되었다. 그들이 누리는 유익은 처음에는 배부름과 해갈로 표현되었고, 2절 후반절과 3절 전반절에서는 영혼의 기름짐으로 인한 기쁨으로, 영혼이 살게 될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이제 3절 후반절에서 이 유익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 그 말을 듣는 이스라엘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이전에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은혜와 자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다윗을 만민의 지도자와 명령자로 삼으신 것이다(삼하 7:8-16, 23:5, 왕상 8:23-26, 시 89). 이제 나라가 위태하고 망하여서 그 영원한 언약이 희미해져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대로 다시 하나님께 나아와 그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시며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과 풍성함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언약관계의 회복이다. 주는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어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아래 거하는 것이 그 백성들의 생명인 것이다.


다가올 구원선포(5절)

5절은 다윗언약의 회복이 현실의 삶속에서 의미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한 민족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한 민족의 이름을 칭송케 되며, 그 민족이 이스라엘에게로 달려올 것이라는 것이다. ‘달리다’로 옮긴 <루츠 ץור>동사는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로 급히 뛰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사자들이 특정한 메시지를 들고 ‘뛰어간다’(가령, 삼하 18:21-26). 그러므로 ‘한 민족이 이스라엘에게로 달려온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사명을 띠고 빨리 이스라엘에게로 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신 이는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5절 후반절).


이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는 바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사야의 독특한 용어이다. 이 이름은 구약안에 33회 나타나는데 그 중 이사야서를 제외하고는 시편에 두 번(71:22, 78:41), 예레미야서에 두 번(50:29, 51:5) 나타날 뿐이다(열왕기하 19장22절에도 나타나지만 이것은 이사야서 37장23절과 같은 구절이다). 모두  28회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1-39장에 13번, 40-55장에 13번, 56-66장에 2번 쓰인다. 이 이름이 담고 있는 맥락도 차이난다. 1-39장의 경우, 이 이름은 대체로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치 못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징벌하신다는 것이다(사 5:24). 그러나, 40-55장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서 쓰이는 이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다. 이 본문들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구별되신 분, 천하열방가운데 오직 이스라엘을 건지시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분이신 하나님을 전하고 있으며 ‘구속자’라는 이름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사 41:14, 43:14, 47:4, 48:17, 49:7 54:5). 40-66장에 나타나는 이 이름중에 80%이상이 40-55장에 나타난다는 것은 이 부분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근거가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임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증하고 있다. 왜 그분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가? 이는 그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사 55:5, 60:9).


다윗언약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일으키실 한 민족의 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역시 이사야 40장이후의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41:1-4,25, 46:11, 48:14, 55:5). 이 민족은 고레스로부터 시작된 페르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인다. 와츠같은 이들은 구체적으로 페르시아의 다리오1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52장 13절-57장 21절은 다리오와 아하수에로재위기간인 주전 518-465년의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J.D.Watts, Isaiah 34-66, WBC 25, Waco: Word Books, 1987, 219-246). 그러나 이사야서안에서 아주 세밀한 역사적 연대를 본문을 통해 확정하는 것은 지극히 불확실하다.


단지, 이 민족이 페르시아라는 것은 대체로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복잡한 세계정세가운데서 이것을 움직여가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열방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하지만, 정작 세계를 움직이시고 고레스를 비롯한 페르시아의 왕들까지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6-7절)

하나님의 구원이 곧 다가온다. 이제 곧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이며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앞에서 물로 나아오라던 외침이 내 말을 들으라는 말로 발전한 것을 보았거니와, 이제 하나님을 찾고 부르라는 말로 보다 구체화되며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나라가 평안하고 번영하던 시기가 아닌, 나라가 망하여버린 지금, 열방의 말발굽소리가 드높은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이다.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요, 부르면 들으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계신 때가 지금인 것이다. 위태롭고 패망한 듯한 시기가 오히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때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커다란 수치와 굴욕을 당하는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찾으면 찾을 수 있는 때인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악인이 그 가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죄인이 그 하던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들이 가던 길은 우상에게로 가는 길이요, 열방을 향해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이다. 이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어찌하면 그들이 살꼬? 어느 나라가 자기들에게 유리할꼬? 저 나라를 강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믿던 화려한 우상때문이로구나, 저들의 화려한 제사때문이로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사 43:22-24). 이사야를 통해 거듭되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구속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언급,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광대한 선포가 울려퍼지고 있는 것이 이사야 40-55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해야할 가장 큰 일을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방법과 궁리를 버리는 것이다.


40장이후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본문 7-8절은 이 내용가운데서도 특이하다.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선포의 내용으로 가득한 후반부 40-55장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같이 구체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55장은 그 이전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결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이 그 생각을 버리고 죄인이 그 길을 버리라는 명령은 신명기등에서 나타나는 이와 유사한 명령과는 다르다. 신명기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지켜야할 율법규정을 준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비해, 본문의 명령들은 자세한 율법규정의 준수를 명하고 있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할 것을 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8-9절의 내용과 연관하여 볼 때, 7절의 악인과 죄인은 이스라엘 모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얕은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그들을 구원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부를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긍휼이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리함>은 여성의 자궁을 뜻하는 단어에서 연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어머니가 그 배에서 난 자식을 향해 쏟는 사랑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55장 2절후반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기쁨은 어머니의 젖을 넉넉히 먹은 아이의 평안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거니와, 본문의 말씀들도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그 품으로 돌아오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듯이, 하나님은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다(사 49:14-15). 왜냐하면 그에게는 용서하심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8-9절)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판단과 지혜들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제한해 버린다.


8-9절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사람의 판단과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생각과 길’은 한 존재의 전부를 표현하는 관용적인 어구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 생각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간다. 하나님께서도 계획하시고 ‘생각’하시며 그 정하신 ‘길’을 따라 행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기릴 때, 절대적인 수식어로 기리기보다는 사람에 견주어서 찬양하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인간을 위한 크신 구원역사임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궁극적으로 사람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9절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하늘과 땅은 함께 묶여 있는 틀이라는 점을 유의할 만 하다. 땅이 없다면 하늘의 하늘됨은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길과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 깊은 신비가운데 사람을 구원하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행하심의 신비함을 찬양할 때, 늘 그의 구원하심과 지키심에 대한 경외가운데 기려진다(시 92:1-5, 그리고 롬 11:33).


사람의 생각과 길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에 대한 본문의 고백은 이미 이사야 40장 6-8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에 예비되고 있다. 하나님은 비할 바 없으신 분이시다(사 40:18-25).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부르심은 간절하시며 지속적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는 까닭은 이전에 맺은 언약 때문이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에게 닥친 큰 심판가운데서도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신다. 본문에서 보았듯이, 지금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시고 찾으신다. 목이 말라 헤메이는 자들이 이리저리 방황할 때 여기로 와서 아무 대가없이 물을 마시라고 외치는 이를 생각해보라. 우리가 물을 찾은 것인가, 아니면 샘물근원이신 그가 우리에게 오신 것인가.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갈증을 해소하지도 못하는 것에 우리 정성을 쏟고,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 것에 우리의 수고를 붓고 있다. 자신들의 위기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가를 지불하고는 끙끙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것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위해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녔으나 병은 낫지 못하고 도리어 재산만 다 날려버린 한 여인의 모습과도 흡사하다(막 5:25-26).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라고는 없는 채 빈 배로 돌아와야 했던 베드로도 이에서 다르지 않다(눅 5:5). 세상에서 통용되는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도 무슨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하여 선뜻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나의 생각과 궁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라. 그분은 그를 찾는 자에게 선하신 분임을 인정하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은 어느때에 가까이 계신가? 나라가 기울어 버리고 온 백성이 산산히 흩어져버린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때였다. 죄로 인해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가운데 도리어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이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 아들을 징계하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이 어려움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다시 부르고 찾는 것이다. 나름의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건져내신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을 세우심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살 길을 찾느라 은을 쓰고 금을 쓰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밖의 사람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신다. 그러므로, 본문은 급변하는 역사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가르친다. 이 역사의 주관자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일이다. 역사의 변화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아무런 가진 것이 없고 핍박과 박해가 잇따르던 시절, 오직 하나님의 손길만을 구하던 교회처럼, 이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위기와 어려움은 도리어 그릇된 길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 때가 바로 가까이 계신 때인 것이다.

출처 : 대민성결교회
글쓴이 : 진리수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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