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출판사는 지금 ‘6시간 근무제’ 실험 중
시사저널 노진섭 기자 입력 2012.03.25 11:17
1980년대 < 9 to 5 > 라는 팝송이 나왔다.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 퇴근하는 봉급생활자의 시계추 같은 삶이 노랫말에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직장인들의 공감을 받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이처럼 출퇴근 시간은 불문율이 된 지 오래다. 이 불문율을 깨는 일은 신문에 날 정도로 이슈거리였다. 삼성이 1993년 출퇴근 시간을 오전 7시와 오후 4시로 바꾸었고, LG전자는 1995년 출퇴근 시간을 직원이 정하도록 했다. 이런 출퇴근 시간의 변화는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샀다. 그러나 하루 8시간 근무라는 근간에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이 없다. 근로자나 경영자 모두 8시간 일하고 봉급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개인과 가족생활은 물론 사회가 8시간 근무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 틀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다.
경기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보리출판사 직원들이 퇴근 시각을 알리는 시계를 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
미국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본떠
최근 보리출판사가 하루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이 틀을 깼다. 이 회사의 임직원은 지난 3월1일부터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한다. 점심 시간 한 시간을 빼면 일하는 시간은 6시간이다. 주 5일제 근무는 오래전부터 지켜왔기 때문에 주당 근무 시간도 기존 40시간에서 30시간으로 줄었다.
미국과 캐나다 등 외국에는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회사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사례이다. 6시간 노동제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여러 기업이 도입했다. 대표적인 곳이 1930년대 이 제도를 도입한 미국 켈로그라는 회사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1985년 중단되었지만, 이를 기록한 책( < 8시간 VS 6시간-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 )이 계기가 되었다. 보리출판사의 전 직원이 지난해 5월부터 이 책을 읽었다. 이후 토론회를 열고 6시간 근무제를 마련했다.
지난 1988년 설립된 이 출판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어린이 책, 생물 세밀화 그림책 등 3백여 권을 펴냈다. 살림살이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데다 대표를 포함한 직원 수도 32명이다. 대기업의 일개 부서에도 못 미치는 규모이다.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을 일해도 부족할 판에 근무 시간을 2시간이나 뚝 잘라냈다. 퇴근 시간 이후에 일을 더 하면 그 시간만큼 적립해두었다가 휴가로 쓸 수 있다. 연장 근무를 너무 오래 하면 6시간 근무제의 의미가 없으니 연장 근무 시간도 월 18시간 이내로 묶어두었다. 일을 적게 하니 월급이 줄어야 마땅한데, 월급을 줄이지도 않았다.
일의 양은 같은데 일할 시간이 줄어들면 일의 강도가 세지기 마련이다. 일의 양은 부서마다 달라서, 오후 4시에 퇴근해도 지장이 없는 부서가 있는가 하면 일에 압박을 받는 부서도 있다. 이 회사는 일 자체를 줄여 일의 강도도 낮추기로 했다. 한 해에 20권의 책을 낸다면 한두 권 덜 출간하는 식이다. 영업 부서도 하루에 5~6곳의 서점을 관리하던 일을 3~4곳으로 줄일 수 있다. 이 출판사만의 콘텐츠에 매력을 느낀 마니아층이 두텁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놓은 책 중에 절판된 책은 2종뿐일 정도로 꾸준히 팔린다. 이들에게 마케팅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 시행하는 제도이니 만큼 처음에는 삐걱거릴 터이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완충 기간을 두었다. 특히 첫 한 달 동안은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막내 사원이 '칼 퇴근'을 해도 눈치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6시간 일하면서 스스로 체험하는 시간을 둔 셈이다. 6개월 후에 모여 평가하기로 했다.
겨우 보름 남짓 지난 지금, 이미 몇몇 장단점이 생겼다. 일을 줄여도 그날 해야 할 일은 있게 마련이다. 빨라진 퇴근 시간 전에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더 긴장하고 집중해서 일을 처리하는 직원들이 나타났다. 중간에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인터넷으로 연예인 가십거리도 보지만, 그런 시간이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능률이 오른 셈이다. 부작용도 나타났다. 연장 근무 시간을 적립하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 연장 근무를 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직원으로 비칠까 우려된다는 소리가 나왔다. 직원에게 압박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6개월 동안, 일을 줄이지 못하거나 연장 근무가 밥 먹듯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고치고 개선하더라도 6시간 근무제를 포기하지는 않을 심산이다.
자기 실현의 시간 찾으면서 삶에 큰 변화
이쯤 되면 다른 직장인들은 부러워한다. 지난 3월13일 오후 4시 퇴근하기 시작하는 이 회사 직원들을 사무실 창문 너머로 쳐다보는 다른 회사원들의 눈빛에 부러움이 묻어났다. 이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다른 회사 근로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다. 이 출판사도 그 점을 잘 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알리는 이유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다. 자기 실현의 시간을 줄여야 할 정도의 노동은 '나쁜 노동'이라는 메시지이다.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야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8시간 근무에 묶인 고정관념을 바꿔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렇다고 8시간 근무제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마저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문제라고 한다. 주 40시간 노동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예외 규정과 편법 등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말단 사원이 눈치를 보지 않고 퇴근 시간에 사무실을 나서기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어림없다.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근로 시간을 늘리더라도 임금을 더 받겠다는 근로자와 추가로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도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하려는 고용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그러니 제조업계의 초과 근무나 연차 휴가 수당이 임금 총액의 11.8%를 차지할 정도이다. 또 한국 근로자의 노동 시간은 1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취업자 기준 1인당 노동 시간은 연간 2천1백93시간으로 OECD 국가 평균(1천7백49시간)보다 4백44시간이나 많다. 자기 실현은 접어두고라도, 많은 근로자가 일과 돈에 얽매여 있으니 삶이 풍요로워질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리출판사 임직원들은 자기 실현의 장을 연 셈이다. 고작 두 시간 일찍 퇴근하지만 삶에는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늘 밤에만 밟아보던 집 주변 골목길을 낮에 접하는 기분이 좋다고 한다. 또 어린아이를 저녁도 못 먹이고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던 일도 없어졌다. 가족이 모여 넉넉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직원도 있다. 병원에도 가고, 야간 대학에 다니고, 취미 생활을 즐기려는 직원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가족과 회사를 더욱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회사는 20여 년 전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출판사이다. 일반 회사처럼 이 출판사에도 경영인이 있고 말단 직원이 있지만 소유자는 없다. 모든 임직원이 주인인 셈이다.
"8시간 근무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조혜원 보리출판사 기획부장 인터뷰
ⓒ 시사저널 임준선 |
일을 많이 해야 매출도 늘고 직원의 삶도 좋아지지 않을까?
한국이 외국보다 일을 많이 해서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졌는가? 그렇지 않다. 경쟁적으로 살다 보니 일과 돈에 묶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8시간 근무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 특히 기업인과 정책 책임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분명히 보내고 싶었다.
6시간 근무제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떤가?
대다수 사람은 8시간 근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바꾸니 주변에서 관심이 많다. 연봉이 많은 회사를 보면 부러워하지만 놀라지는 않는다. 그런데 근무 시간을 줄이면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임금을 줄이지 않은 점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시간과 돈에 묶여 살아왔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 시간과 일을 줄이면 삶은 행복해진다.
6시간 근무제로 과연 삶이 행복해질까?
일하는 시간을 줄인 만큼 일도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 강도가 세져서 오히려 삶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이 제도를 실험하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잘못된 부분은 개선할 생각이다.
노진섭 기자 / no@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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