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목회

기도로 교회가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김노섭-열린문 2011. 10. 23. 17:30

 

 

2007년 7월, 파송을 받은 백인교회는 Half Time 목사를 모셔야 할 만큼 연약한 곳이었다. 영어회중 목회가 처음이라, 말로만 듣던 Dying Church가 어떤 곳인지 실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당하는 고통은 방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는 중고물품들에서 풍기는 냄새로 두통에 시달렸고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 물건들은 교회 재정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Free Market, Garage Sale, Auction, Yard Sale, 익숙하지 않은 낱말로 간판을 내걸고 두 주일에 한 번씩은 판매하는 상품들이다. 위원회도 없었고 회의도 안 하고 특정 두 부부가 간판을 내걸면 교인들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내가 불편해 하는 모습을 눈치 챈 교인이 귀띔을 했다. “세일에는 절대 신경 쓰지 마세요. 전에 목사들도 그래서 쫓겨나갔어요. 묵묵히 목회만 하세요.” 교회는 중고품 창고였고 시장바닥이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세일이 우선이어서 추수감사절 예배도 아무렇게나 지나갔다. 크리스마스 때는 바로 전날 Christmas Fair라는 금-토 이틀간의 가장 큰 행사 때문에 피곤해 교회에도 나오지 못했다.

매주 목요일 아침 기도회를 시작했다. 세 명의 교인이 참석했다. 기도회 날이면 불편한 영어로 인도해야 하는 어려움에다 이래저래 눈물 쏟기를 계속했으니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목사는 울고 오히려 교인들이 기도회를 인도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동안 바로 그 목요 기도회에서 희망의 빛이 당겨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도 소리는 꽁꽁 얼어 붙었던 얼음이 조각나며 부서져 내리듯, 캄캄한 절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숨구멍을 뚫는 역할을 했다. 이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울지 말고 말씀을 해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도울 겁니다.” 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울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의 몸 된 성전이 그렇게까지 침략당하고 있음을 처음 본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들어가면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고, 라디오의 볼륨을 최고로 높여 복음성가 CD를 24시간 틀었다. 벽 한쪽에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다 - 막11: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적은 배너를 붙였다. 찢어져 펄럭거리는 교회 간판을 새로 주문해 갈아 끼웠고, 다른 모양의 새 간판을 더 주문해 교회 앞뜰에 꽂았다. 옥합을 깬 여인에 관한 성경구절로 설교한 후에는 거금을 들여 트럭으로 세 번 옮길만한 분량의 꽃 모종을 사다가 일주일간 교회 주변에 돌려 심었다. 모두 한심해 했으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중고품 세일에 관해서는 절대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니, 교회 안은 청소도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진행하는데 내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비상금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교회에서 받는 Half Time 월급으로는 택도 없었고 교회에서 지출을 논할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

목요 기도회에서 교회론에 관해 처음으로 말했다. “교회 안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교회 밖에서는 선교해야 한다.” 교회란 건물 크기와 교인 수와 교회 재정과 관계없이 선교, 즉 Outreach 또는 Community Service 등등을 하는 곳이라는 평소의 내 신념을 나눈 것이다.

바로 그 무렵 홈리스 선교에 동참을 원한다는 편지 한 장이 사무실에 날아 들어왔다. 그들의 모임에 목요기도 회원 한 사람과 참석해 대환영을 받았다. 스스로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교회가 Hosting Church가 되고 싶으니 방문해 주세요.” 호스팅 교회란 홈리스들을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재워야 하는 곳이다. 참석 첫날 교인들 허락도 없이 말해 버렸다. 그들은 교인들 없는 대낮에 방문했고 물건만 치우면 최상의 장소라고 했다. 목요 기도회의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었다. 그때가 11월이라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어린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 잠자는 가정들이 있다고 심방할 때마다 교인들과 대화를 했다. 내 말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교인을 만났다. 그가 앞장을 섰다.

다음 날 건물을 함께 쓰기 위해 새로 입주한 뉴하이드팍 한인교회 조영철 목사님과 아침 식사를 나누며 홈리스 선교를 함께 하자고 권했다. 쾌히 동의를 해주자 바로 홈리스 돕기 크리스마스 콘서트 프로젝트를 내밀었다. 12월 20일로 날짜를 정해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나, 한인교회는 한인들을 위한 한국음식과 한인들을 위한 홍보 및 프로그램을, 저희 힐사이드교회는 미국인들을 위한 음식, 본부와의 연대 및 미국인들을 위한 홍보 등을 맡았고 10불짜리 티켓을 돌렸다. “200명은 와야 할 텐데...” 많은 악조건을 넘겨야 했다. 크리스마스 캐롤 콘서트 후에는 저녁 만찬을 가짐으로써 성탄 축하를 커뮤니티와 하는 것이 중요 목적 중 하나였기에 음식 장만이 큰 관건이었다. 티켓이 나간 중간 집계 결과 400명은 올 것 같았다. 음식을 두 배로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 교인들은 후식 밖에는 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추위를 무릅쓰고 교회 주변의 식당을 돌면서 음식 도네이션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풍성한 International 음식이 준비되었고, 음식은 한복을 입은 한인과 백인들이 섞여 나누어 주는 모습이었으니 아름다움 자체였다. 프로그램도 최상의 캐롤들, 핸드벨 콰이어, 청소년 오케스트라 등 한인 200여 명과 백인 300여 명, 약 500여 명으로 교회가 터져나갈 듯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홈리스들의 숙소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중고품을 교회 밖으로 치울 수 있었다. 교회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콘서트는 대성황이었고, 참석자들이 풍성히 먹고도 남을 만큼이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게 했다. 그날 후원금까지 모두 합쳐서 5,000불을 홈리스 선교회에 보냄으로써 활력을 보태주었다. 2009년에는 “Amahl & the Night Visitors” 공연으로 홈리스 돕기 크리스마스 행사를 같은 컨셉으로 해서 역시 성황을 이루었고, 올해는 흑인 복음 성가단을 초청해 세 번째 성탄 행사를 계획 중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일주일간 어린이들을 키우는 홈리스 가정들이 Guest로 머물다 간다. 그 기간은 천사들을 대접하는 거룩한 기간이다. 교인들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신바람이 나있다.

파송 받은 때부터 2년간은 중고품을 모두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했고 다음 해 일 년간은 교회 수리를 했고, 이제 4년째를 맞이하는 Hillside UMC는 Multi-Ethnic Church를 향해 “To provide service for people or organization that are in need”로 방향을 정했다. 이름하여 Building Ministry! 현재 백인교회, 한인교회, 인디안 청소년그룹, 브라질 포르투갈어 예배 등 200여 명의 다양한 민족들이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각자 자기들의 언어로 기도, 예배, 찬양이 울려 퍼진다. 여름성경학교, Easter Egg Hunt, Country Ho-down Dance 등 다양한 행사가 연이어 있어 문을 잠그고 있을 수가 없다. Open Mind, Open Eyes, Open Door 슬로건을 벽에 내걸고 실천하는 교회로 방향전환을 하고 Community를 위한 다양한 봉사를 통해 교회가 살아나는 소리가 들린다. 예수님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을 선언하셨고, Hillside UMC는 “만인이 예배 드리는 집”을 선포하고 실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시길 기도하면서...

글쓴이: 여금현 목사, Hillside UMC, NY, hennahahn@gmail.com
올린날: 2010년 11월 19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