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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선교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고찰-김용복

김노섭-열린문 2007. 9. 27. 21:56


커뮤니케이션 선교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고찰

김 용 복 박사 (기독교아시아연구원 원장)

 


현대역사의 경험은 '커뮤니케이션혁명'에 따라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활자인 쇄술의 발전에서부터 현재 전개되고 있는 첨단기술에 의한 새로운 매체(New Media) 의 출현, 정보화사회의 도래라는 혁명적 변화는 교신(交信: Communication)하는 존재 로서의 인간과 그 역사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하고 있다. 이 과제는 당연히 원초적, 원형적 커뮤니케이션 공동체로서 기독교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재검토 하게 한다. 또한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질서와 과정은 인류의 삶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선교적, 참여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더 나 아가 커뮤니케이션 공동체로서의 신앙공동체가 현대세계의 커뮤니케이션 질서로부터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 식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I. 커뮤니케이션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신앙공동체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신앙과 신앙의 경험을 소통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한다.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동안 교 회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복음선포의 수단이나 기술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커뮤니케이션이 신앙의 본질과 신의 존재에 결부되어 있다는 인식은 최근에 들어서 였 다. 이에 여기서는 교신, 즉 커뮤니케이션 공동체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성서적, 신학 적 자기 이해를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인간을 상대로 하는 자기 커뮤 니케이션(Self-Communication)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에 신음하고 울부짖을때, "야훼 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고통에 신음하고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굽기 3:7) 바로 이 야훼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사건은 히브리백성 의 에집트 탈출이라는 구원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실로 성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여기서 형성된 것이 소 위 계약공동체(Covenant Community)인데,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Faithfulness)이 자유롭게 소통된다. 여기에 단절이나 왜곡이 생 겼을때, 즉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 Communion )이 파기되었을 때, 인간은 신에게서 소외된다. 때문에 이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제사적 매개과정이 필요하게 되며, 여기에 고백과 용서와 관계의 새로운 정립이 있게 된다.

창세기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우주적, 역사적 주권은 '말씀'으로 이루어 진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아담과 이브와의 인격적 교신을 실현하였고, 그들을 자신 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인격적 교신의 동반자로서 혼연일체가 된 커뮤니케이션 공동체 를 이루셨다. 이것이 에덴에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모든 다른 피조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 커뮤니온(Communion), 그리고 샬롬(Shalom)이 충만하였다. 사실 이런 에덴의 공동체는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고, 하나님에게 저항하여 하나님 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이 파괴되고 왜곡된 공동체, 그리고 그 결과 공동체 내 부에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이 파기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카 인과 아벨의 갈등과 살생, 하나님에 대항하여 바벨론탑을 구축한 인간 집단속에서의 언어의 혼란과 공동체의 파괴는 바벨론제국 체제의 본질을 표출시킨 것이다. 여기서 바벨탑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배반의 상징인 바벨탑은 언어의 획 일에 의한 인간의 지배체제를 의미하고 그것은 언어의 혼란과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결과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배반하였을 때, 그의 구원의 행위로 서 스스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Initiate)하신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하시고, 카인에게 도 하시며, 그의 백성이 스스로 소외의 굴레를 쓸지라도, 그리고 종교정치체제 (Babylon= Oriental Despotism)가 그의 백성을 포로로 만들어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 킬지라도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를 여신다.

계약공동체가 계약을 파기하여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이 붕괴되었을때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뜻은 예언자들을 매개로 한 예언운동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하 나님의 역사적 개입은 정의를 위한 예언,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나 타난다. 정의가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운동은 정의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이었으며, 동시에 그 운동에 있어서 정의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본 필수조건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깨지고, 인간이 이 커뮤니케이션을 자기의 이익과 권력을 위하여 왜곡하여 인간 공동체가 정글(Jungle)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희생의 제물과 제사를 통해 화해를 이루고, 새롭게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셨 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온을 실체로하는 공동체를 회복하신 것이다. 그것 은 정의의 심판과 화해와 용서의 말씀을 통하여 실현된다. 여기서 사제는 예언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자기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자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 그 의 백성의 공동체안에는 진정한 평화(Shalom)가 가득찬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즉 수육(Incarnation)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의 교신행위였던 것이다. 그것이 "말 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요한복음 1:14)는 말의 뜻이다. 기독교의 복음 은 복된 소식, 바로 좋은 소식이다. 이 좋은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기독 교의 선교이다. 이 복음(Good News)이 예수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 전하여 지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이 알려지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가 선포되었다."(누가 4:18- 19) 예수의 탄생, 그의 치 유활동,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고난을 나누고 고난에 동참하 며,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세력에 승리하는 하나님의 인류와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교신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초대 기독교공동체의 실체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곧 코이 노니아(Koinonia),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즉 모든 갈등과 분열과 소외 가 사라지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Perfect Communication)이 이루어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왔기에 언어가 달랐음에도 불 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벨탑 이야기에 나타난 바, 언어에 혼란이 생기고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공동체와는 대조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배와 말씀나누기, 성례전과 친교를 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였다. 초대교회는 인간공동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으며, 주인 도 종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차별받지 않으며, 유태인도 이방인도 구분되지 않는 공동 체의 실체를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체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커뮤니케이션의 실현에서 가능하게 된다. 또한 초대교회는 로마제국하에서 모든 억압 과 불의를 극복하고 올 미래의 비젼 메시아 왕국을 전달하였다. 그것은 절망 가운데 희망을 전달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계시록 21:3- 4)는 말씀의 나눔인 것이다.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인간이 깨닫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 (役事)는 교통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과 공동체 가운데 성령은 하나님의 커뮤니케이 션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을때 다른 언어 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각기 자기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사도행전 1장) 이처럼 성령은 인간에게 영감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교신의 사역을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영감과 감동에 의하여 교신된다. 때문에 기 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적 존재이며,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신의 삼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적 실체(Communicative Entity)라고 규정 지을 수 있 다.

이와같이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의 통전적 커뮤니케이션의 종교 이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인간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갈등과 소외로 말미암아 그 공동체의 본질인 커뮤니케이션을 붕괴 또는 왜곡했을 때 하나님은 그 구원의 역사를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룩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 고 평화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는 커뮤니케이 션(Community의 실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수단 적 과정일 수 없다.

Ⅱ. 커뮤니케이션 공동체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전개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를 모두 여기서 자세히 취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형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초대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은 대개 로마 체제에 대한 Counter-Communication의 양상 을 보였던 것같다. 이스라엘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의 도시 저변사회에 위치한 공동 체들로서 독특한 메시아 왕국과 같은 고도의 유토피아적 언어와 밀도있는 성찬과 같은 성례전, 그리고 깊은 친교생활(Koinonia)을 가지고 특유한 해방적 삶의 양식과 윤리와 메세지를 퍼트렸던 것이다. 이것이 신구약 성서의 이야기였다.
로마제국은 이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처음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으 나, 그 저변이 확대되자 이 공동체가 로마의 지배 언어와 상치되며, 로마제국의 권위와 질서를 좀 먹는 것으로 파악되어 심한 억압을 하였던 것이다.

A.D. 313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기독교의 메세지는 점점 로마정치 체 제의 언어에 융합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희랍의 고전 문화를 변혁시키면서도 그 문화와 철학의 범주에 "포로"가 된다. 중세의 교회 체제는 점점 지배 체제에 유착되 면서 그 메세지도 지배 언어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즉 전통과 교리가 점점 중요시되 고 교황이나 교회의 제도적 권위가 중요시 되게 된다. 물론 중세교회의 언어가 완전 히 획일적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단적 견해의 커뮤니케이션을 억압하였던 것 이 사실이다.

11세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분열된다. 동방교회는 어느정도 서방교회와는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을 가지지만 그 언어는 근본적으로 비쟌틴제국의 지배언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동방정교의 예배전통은 오늘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도 그 커뮤 니케이션의 기능을 잘 감당하고 있는 듯하다. 그 중요한 예가 러시아 정교의 경우이 다. 동방정교의 예배의식은 상징직인 Ikon과 구체적으로 발달된 섬세한 성례전들로 가득차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의 물결속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운동은 초대교회의 원래적 메세지와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성서의 계시를 절대적으로 중시하고, 중세교회의 전통과 교회제도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을 지양하려고 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은 중세교회에 대한 Counter-Communication 이 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등의 가치를 추구하여 자유주의 사회철학 의 발전과 깊이 관련되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종교적 기반을 형성하여 주었다. 그 만큼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은 개신교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를 말씀의 종교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서는 개신교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서구 근대 민족국가(Nation State), 즉 기독교 국가체재 (Christiandom)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개신교가 세계선교의 무대에 나서게 되 었을때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서구 식민지 지배언어와 문화에 포로가 되었다. 오늘 기 독교의 토착화(Indigenization) 문제, 맥락화(Contextualization)의 문제가 이래서 야기되 는 것이다.

세계 제 2차대전이후 제 3세계의 신생 독립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기독교의 메세지와 커뮤니케이션은 민족주의, 소위 전통 재래종교들의 부흥에 의해 심각한 도전 을 받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복음의 메세지를 서구의 지배문화에서 해방시켜서 제 3세계의 민족들과 민중들에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는 과제가 중대하게 부각 되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기독교 성서의 역사적 맥락속에서 해석이라는 과제, 토착적 문화 를 성서해석의 범주로 선정하는 과제, 제 3세계의 교회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 운 신학적 방법을 개발하는 일등의 과제가 구체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부각되 었다.
오늘 제 3세계에서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서구 지배문화와 언어에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 메세지를 어떻게 탈출시키느냐는 소극적 과제와 제 3세계의 사회경제 적, 민중문화적 맥락에서 기독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과정을 어떻게 매개하느 냐는 적극적 과제를 안고 있다.

Ⅲ. 민중의 참여와 연대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역사의 주체인 민중은 자신 위에 군림하려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질서를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민중은 독자적으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창출했는데, 그 구체적인 예로는 구전 전승, 민중미술, 민중음악, 야사(野史), 종교적·문화적 상징 등을 들 수 있다. 민중적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역사는 별로 연구되지 않았는데, 그 이 유는 민중의 문화사가 민중의 시각에서 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중 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권력자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억압을 받아왔다. 그들은 지배 엘리뜨들을 통하여 통신수단을 통제하고 문화·종교 단체들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수단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민중은 여 러가지 독창적인 방식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자신들의 주체성을 발현한다. 민중운동의 발생과 발전은 흔히 민중 종교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관된 새롭고 창조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수반하였다.

본래 민중 속에서 종교공동체의 경전은 그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가진 커뮤니케이 션의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였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한국의 동학, 그리고 아시 아 국가들에서 발생한 이와 비슷한 운동들의 이야기와 저술들은 민중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communication paradigm)의 표현이다. 성서는 그중 가 장 탁월한 예이다.

민중의, 민중에 의한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특징은 민중이 커뮤니케이션 과 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과 긴 중간 매개과정이 없이 메시지가 직접 전달된다는 것이 다.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해방적 공동체의 결속, 다시 말해 민중의 통전적 연대이 다. 그러므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세 가지 근본적인 특징은 직접적인 참여, 연대, 그리고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Ⅳ 현대 정보화사회와 기독교의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하나님의 살림살이(household of God)의 두 가지 토대를 민중의 참여와 그들 의 상호 연대라고 본다. 이 두 가지 토대 위에 정의, 인권, 평화, 주체성, 생명이라는 다섯 가지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요소들을 현존하는 세계 커 뮤니케이션과 정보 질서의 맥락에서 성서적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발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말하고 있는 맥락은 정치적 선동, 상업적 선 전, 그리고 정보기술을 통하여 전개되는 권력과 민중의 "문화전쟁"(Cultural War)이다. 이 문화전쟁은 이데올로기적, 혹은 선전 전쟁의 형태를 띠고 국가적 차원과 세계적 차 원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그것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생산된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 혹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정신과 욕구를 순치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리하여 시장을 통제 하고 정복한다. 교육제도는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정신을 지배하려 한다. 전 통적인 문화 과정과 종교 제도들 역시 권력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전쟁의 가장 중요한 양상은 신문, 전신,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현대 매스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에서 드러난다.

세계적 규모로 운용되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웍은 세 가지인데,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정부들의 정치적·군사적 정보망, 다국적 기업세력들의 경제적 정보망, 그리고 세계 종교들의 종교문화적 네트웍은 세계적 차원에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세계화는 모든 차원에서 하이테크 미디어를 통한 전자기술의 집중시대를 가져왔다. 총천연색으로 된 상징, 영상, 사진, 동시통역된 언어, 그리고 시 나리오와 연속기획물로 재구성된 사건들은 즉각적으로 대중에게 전달되고, 대중은 이 러한 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의 공세 앞에서 희생양이 된다. 전자기술집약적 (technetronics- intensive)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는 집중도와 처리속도의 고도화를 통한 부가가치 증식 과정(value-adding process)의 세계적 네트웍을 포함한다. 그러한 커뮤 니케이션의 세계적 네트웍은 갈수록 민중의 삶을 옥죄어가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지 각과 이성의 눈을 가리고, 마침내는 민중의 의식, 정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해 들어가 그들의 생활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내적 실현은 기독교의 원천적 Koinonia의 경험, 하나님의 메 시지를 받는 경험의 회복에서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기독교공동체가 현실지배체제, 지 배언어와 문화에서 해방되는 경험임과 아울러 억압적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질서에 얽 매인 사람들에게 해방의 커뮤니케이션을 맛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세계의 커뮤니케이션 질서를 판단하는 가치의 준거로서 기독교 복음의 커뮤니케 이션은 인간공동체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교신하는 행 위이다. 정의, 인권, 평화, 주체성, 생명 등은 하나님나라의 가치로서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인 동시에 목표이다. 때문에 기독교의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억압하고, 분열시키 며, 소외시키는 커뮤니케이션 질서와 과정에 저항하고 대결해야만 한다.

종교적 신앙의 본질 때문에 기독교의 커뮤니케이션이 일반사회의 그것과는 다른 커 뮤니케이션 언어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커뮤니케이 션이 인간구원과 역사해방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것은 현재의 커뮤니케이션 질서와 체제에 대한 대안을 형성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 만의 고립 된 소위 순수한 종교적 Communication Network이 아니라 기독교적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 바탕한, 인간공동체를 위한 독립적인 Communication Network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현존하는 어떤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메 시아왕국이라는 미래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현재의 비인간적, 억압적 현실을 타개해 나간다. Hi-Tech에 의한 New Media와 정보화사회의 도전에 대해서도 기독교는 이같 은 비젼 속에서 기독교의 가치에 역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파헤치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독점에 의한 비민주화, 비인간화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대안적 커뮤니케이션 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해 나가야 한다.

Ⅴ. 결론에 대신하여

(1)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 32). 하나님의 교신은 모든 부분적 진리 왜곡된 진리, 오류와 허위의 것을 노출시키시는 진실과 진리의 교신이며 해방의 교신이다.

(2) 하나님은 생명계의 생명들과 교신하여 생명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교신활동은 생명운동의 교신이시다. 하나님은 죽음과 파괴와 오염의 언어, 전쟁과 억압, 기아와 빈곤으로 부터 생명을 해방하는 교신을 하신다. 하나님은 화해와 치유의 교신을 하신 다.

(3) 하나님의 교신은 성서와 신학적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과 생명 의 모든 언어와 상징을 통하여 교신하신다. 다른 종교나 이념이나 모든 과학적 언어 를 통하여 교신하신다. 하나님의 교신은 초월적이고 포괄적이며 총체적이다. 하나님 은 모든 교신의 장벽을 허신다. 그리하여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통하게 하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