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례논쟁
|
목 차
Ⅰ.서 론·······································································3
Ⅱ. 본 론
1. 중세의 성례전론·····················································4
2. 루터의 성찬론························································6
3. 쯔빙글리의 성찬론··················································7
4. 성찬 논쟁······························································9
Ⅲ. 결 론····································································11
Ⅳ. 참고 자료······························································13
Ⅰ. 서 론
1517년 종교개혁 후 예배는 의식 중심에서 설교 중심으로 돌아오면서 말씀 중심으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초기 중교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늘날 교회들이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가 그것이다. 이중 성만찬은 회복해야할 보이는 말씀이 아니가 생각해 본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성례를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어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효력있게 나타내는 물리적인 표”라고 정의하였다.1)
1520년 대 초 개혁을 추구하는 인물들에게 중세의 성례전론은 중세교회 비판거리 중 그 중심이 되었다. 어째서 성례전론 문제가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졌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중세 신학의 모든 오류의 대표하는 것으로 개혁자들의 눈에 비춰졌다. 교부들을 비롯한 초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는 그리 중요시 다루어 지지 않았으나 중세로 들어서면서 스콜라 신학의 발달로 성례문제는 구원의 방편으로 중요시 다루어졌다. 물론 초기의 모든 저술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거스틴 같은 예외적 인물도 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의 의식중심의 예배에서 초대교회의 단순했던 예배형태로 돌아가 초기 신학을 회복하는 것이 개혁의 중심 내용이었다.
따라서 중세를 대표하는 스콜라 신학의 산물인 성례전을 버림으로써 초기 신학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둘째, 성례신학은 중세 교회의 얼굴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 교회의 바탕적인 힘이 되는 것이 미사였다. 미사는 모든 성례전 위에 있는 것이었다. 중세 교회의 미사는 ‘전례식문’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이 예식문은 라틴어로 되어있어 일반 평신도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미사를 진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화체설’은 받아 들일수 없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미사의 예식 전문을 버리고 미사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개혁자들의 초기 사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524년 말부터 루터의 말년까지 종교개혁 진영내부는 서로 성만찬의 이해의 이견을 보이며 소위 ‘성만찬 논쟁’에 휩싸인다. 두 진영의 지도자들은 성례론의 일치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만찬의 해석에 대한 이해는 서로 용답 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성경해석의 차이점 때문이지만 비텐베르크와 쮜리히의 사회적 여건의 상이함 등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의 원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중세의 성례전론을 개관적으로 살펴보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을 고찰하여 그들의 견해차를 개설하고 그 영향과 중요성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중세의 성례전론
중세의 어두운 단면을 뒤로 하고 밝은 면을 찾아보면 활발한 선교, 대학 설립, 필리오케(filioque), 즉 ‘성자가 성부는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모든 것이 동일하다.’와 같은 교리를 정립하여 교의(dogma)를 완성한 것을 들수 있다.2)
이외에도 여러 특징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중세의 성례전을 살펴보고자한다. 중세는 실천적 종교생활을 중시하였다. 현대의 카톨릭 역시 선행이나 고행 순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나 중세는 더욱 철저히 다루어 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신학 사상은 성례전을 중요한 위치로 만들었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고난을 의미 한다. 따라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논리를 정당화 시켰다.
여기서 성례전에 사용되는 물질은 그저 흔히 보는 물질중의 하난가 아니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서 성스러운 것이 된다.
성례전은 “원죄 및 자기 자신의 죄에 의해서 받은 상처에 대해 신은 치유의 수단으로서 성례전을 제정했다.”3) 성례는 구원의 길이며 치유의 수단이다.
스콜라 신학아래 성례전은 5가지에서 30가지로 분분 하던 것이 7가지로 정립되었다. 1439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에 의해 플로렌스회의에서 Peter the Lombard의 7가지 주장을 성례전론으로 공시 채용되었다.
모든 성례전은 신적인 것이 경험 되는 행위로서 죄용서와 치유의 힘을 갖고 신의 불가시적 은총이 성례 물질로 인해 가시적, 감각적, 실제 속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성례전은 신의 은총을 전하는 매개체로서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성례전을 마술적 성격을 가진 행위로 만들었다.
모든 성례전 위에는 미사가 놓여 있으며 미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으로서 교회 현존의 바탕이며 교회가 서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성례전은 다음과 같다.
1) 성례성사(Baptism)
성례성사는 원죄를 씻는 것이며, 그에 대한 죄와 처벌을 모두 완전히 용서하는 것으로 세례(침례)를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선을 행할수 없던 인간이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을 부려 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제에 의해 행해지나, 비상시에는 평신도 혹은 불신자도 베풀수 있으며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4)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는 신자로서 충만한 사랑과 완성에 이르는데 필요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게 된다. 후에 유아 세례에 대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데 유아에게 베푸는 세례는 세례 받는 자의 믿음보다 부모의 신앙결심이 동기가 되어 세례가 가능케 한다.
2) 견진성사(Confirmation)
기독교 신자로서의 공적인 책임을 완수 하루 있도록 영적 성숙을 위해 부여된다. 즉 세례 때 받은 은혜가 더욱 굳게 나타나도록 하기위해 행하는 성례이다. 신자로서의 생활에 필요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고 견진성사 때 영혼에 성령이 파견되고 이때 영혼은 믿음 안에 그리고 믿음 위에 확고히 서며 믿음을 변호 할 힘과 용기의 은총을 받는다.
견진성사 수령자는 봉사의 의무가 주어지는데 이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3) 성체성사(the Eucharist)
성체성사는 미사이며, 미사는 본질적으로 갈보리의 희생과 같은 희생이다. 따라서 날마다 영적 필요에 따라 시행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유익을 재생산하여 참여자에게 그 효험을 발휘하는 영속적 제사이다. 이것은 참여자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효력이 있다. 미사의 크라이막스는 성찬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성사이다. 사제가 떡을 들고 “이는 ····내 몸이니”하면 그 순간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고, 포도주를 들고 “이는 ····· 내 피의 잔이니”하면 그 순간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된다. 성찬 참여자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 전체를 받아드리고 합일 된다.
세례성사가 일생에 단 한 번의 성사라면 성체성사는 매일 가능한 성사여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4) 고해성사(Penance)
'제2의 세례성사‘라고도 하며 참회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죄를 씻는 행위다. 이때 죄를 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것은 때로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성사이다. 상응하는 대가는 그리스도나 성자의 공로가 사용된다. 그리스도나 성자들은 자기 자신의 참회를 위한 필요 이상의 공가가 있으므로 이러한 공로의 상용을 위임받은 교회에서 사제가 발하는 고행을 감수해야 한다. 이 고행을 감수하면 죄가 사해진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에게는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면죄부가 판매되고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돈으로 사고팔게 된다.
5)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종부 성사는 미처 사하지 못한 죄 찌꺼기를 씻어낸다. 주교가 축복한 울리브 기름이 사용되며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신자에게 딱 한번만 베풀 수 있다. 즉 중병으로 고통을 앓고 있는 신자에게 고통을 덜어주고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맡기는 성사로서 죽음의 위험에 처한 경우 한번만 받을 수 있다.
6) 신품성사(Ordination)
신품성사는 사제직의 책임을 온전히 수행 할 수 있도록 권위를 주는 성사로서 사제직과 부제직에 수여한다.
7) 혼인성사(Marriage)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체를 모델로 삼아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애정이 변치 말도록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길 바라며, 또한 부부의 성적행위를 간은의 차원에서 옮겨 경건한 후손을 번성시키는 거룩한 행위로 변화시킨다.
이상의 7가지 중 종교 개혁자들의 성만찬 논쟁을 다루기 위하여 중세의 성만찬을 조금 더 살펴보자. 중세의 성찬론은 5세기부터 종교 개혁 때 까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그 형식에 있서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동방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구분하여 두던 것을 잔에 빵을 적셔 넣어 포도주와 함께 숟가락으로 떠서 신자에게 주었다.
서방교회는 초대교회의 미교적 간단한 의식을 ‘미사’로 발전시켰으며 이그나티우스의 화체설을 받아드려 1215년 라테란 공회의에서 공식적 교리로 확정되어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었다.
화체설은 로마 카톨릭의 공식 교리로서 사제에 의해 성별의 기도가 드려지고 나면 그순간 성찬 물질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 된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갈보리 산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수난의 실재적인 재현이라 하였다.
2. 루터의 성찬론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520년 교회의 바빌론유스란 논문을 통해 카톨릭의 성례전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세 가지 성례(세례, 성찬, 고해)을 인정했고 후에 두 가지 성례(세례, 성찬) 만 인정 하였다.
“나는 일곱 성례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다만 세 가지 성례 곧, 세례, 고해, 성찬(the bread)이 있다는 주장을 제출한다........ 성례란 이름은 표들이 부착된 하나님의 약속들로 한정시키는 것이 옳은 것 같다.......하나님의 교회에는 세례와 성찬이란 오직 두 개의 성례만 있다”5)
루터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첫째, 빵만 나누는 성찬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12세기 까지 보편적으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미사 참석자에게 허락되던 것이, 11세기 제기된 화체설로 인해 빵만 허락되게 되었다. 분잔 도중 일부 평신도들의 실수로 포도주를 흘리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자 화체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성전 바닥에 흘리게 되므로 13세기 이르러 분잔을 금하게 되었다.
루터에 따르면 분잔을 거부하는 것은 성도들을 위해 흘린 그리스도의 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죄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루터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같은 신비였다. 이러한 성찬의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에 화체설은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졌다. 루터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한 본성 안에 연합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의 실체가 성찬 물질과 연합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성찬가운데 실제로 임재 하신다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불에 달구어진 쇠를 예로 설명한다. 쇠를 불속에 놓으면 쇠는 달구어지고, 달구어진 쇠는 쇠와 열, 두 가지를 가진다.6)
셋째, 루터에게 성례는 사죄의 약속이며 참여자가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지 사제들의 선행과 봉사와 같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다. 루터에게 성례는 믿음을 산출하며 양육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보았다.7)
루터는 로마 교회에서 말하는 ‘성찬은 갈보리 희생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미사 속에 선행이 존재한다는 관념’, ‘화체설’, ‘성찬 후에 남은 떡 속에 그리스도의 몸이 계속 남아 있다’는 교리 등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 자체의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았으며 성찬을 보여 지는 말씀으로, 예배의 중심으로 계속 유지하였다.8)
화체설의 교리는 루터의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지는 것이지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 받는 것이지 미사를 통한 행위적 희생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루터에게 성찬 물질은 화체설처럼 떡이 몸으로, 포도주가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며, 떡은 계속 떡이고, 포도주는 계속 포도주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주님의 몸과 피가 들어 있으므로 은택을 입게 되는데 후대의 해석가들은 이것을 공재설(consubstan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떡과 포도주 속에서, 함께, 아래와 주위에, 그리고 위에 임재 한다는 루터의 성찬이론을 묘사하였다.
이제 개혁세력내의 분열의 쟁점이 되었던 ‘실제적 임재’에 대해 알아보자.
루터는 1507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1519년까지의 그의 글에서 전통적인 가톨릭 미사의식에 회의를 품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 ’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당시 성례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초가 되었다. 1517년 스콜라 신학의 반박(Dispa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py)에서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이것은 제4차 라테란공의회 (Fourth Lateran Council,1215)에서 정의된 화체설 교리는 ‘본질’과 ‘우유성(의양)’을 구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 철학’을 거부한 것이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근본사상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루터는 이것을 ‘실재적 임재’ 사상으로 보았다. 루터는 이와 같이 실재적 임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재 방식에 있어서 로마 교회와 의견을 달리 했다. 실재적 임재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같은 성경 본문에 담긴 의미라고 보았다.9)
3. 쯔빙글리의 성찬론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루터만큼 독창적인 사상가도 아니었고, 예언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어느 정도 루터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한 휴머니즘의 여향도 받았다.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스트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10)
우리는 성찬식에 사용된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상징일 뿐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의식일 뿐이고, 주님께서는 오직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쯔빙글리의 성찬론 이해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성경해석과 통찰력, 명석한 논리와 신학적 진지한 자세를 생각한다면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쯔빙글리는 로마 교회가 주장하듯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재로 임재 하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변화 없이 살과 피를 상징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성찬의 의미는 먹고 마심에 있지 않고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하고 기념하여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쯔빙글리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먹고 마시는 성찬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십자가에 희생 재물로 바쳐진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그 길에 이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강조해도 성찬 행위는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성찬은 믿음의 결과이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성찬에 참여함으로 믿음이 일어나 구원에 이른다면 행위에 의한 것이 되므로 쯔빙글리는 행위구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거부하였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 자체가 믿음을 일으키며 죄의 용서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우상숭배의 절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화체설이니 공재설이니 모두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
쯔빙글리에게 성찬행위는 감사의 행위이며 기쁨의 회상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루터는 마 26:26 “이것이 내 몸이니라.”의 해석을 몸으로 해석했으나 쯔빙글리는 “이것이 내 몸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태복은 26장의 ‘이것은 내 몸이니라’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은유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어느 편으로든지 해석 될 수 있다. 이 문맥 속에서 ‘이다’가 문자적으로 해석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이미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드시 은유적 혹은 비유적 해석을 따른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그 빵을 의미하며 ‘몸’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다’는 문자적으로 받아드려질 수 없다. 그 빵은 그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11)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려 했던 쯔빙글리는 영적인 것은 영적이어야지,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표현된다면 우상숭배에 가까워질 것으로 우려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 영의 법과 율법, 혹은 육체의 법을 강력하게 대비시킨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불신하는 그로서는 화체설이나 공재설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12)
루터는 속성교류의 교리에 의지하여 인성이 신성에 참여하여 무소부재하게 되며 편재성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 속에도 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낸 반면, 쯔빙글리는 451년 칼케돈 회의에 확정된 정통교리에 의해 두 본성 사이에는 어떠한 융합이나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 곁에 계시는 동안에는 땅위에 계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성찬을 포함하는 성례는 신앙의 표징이며, 중계며, 신앙을 강하게 하는 방편이라고 보았다. 성찬을 상징적으로 해석했듯이 세례도 기념행위라고 보았다.
4. 성찬논쟁
논쟁의 발달은 1520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터는 새로운 약속에 대한 설교 (Sermon van dem Neuen Testament)에서 이전의 성만찬에 대한 설교와는 다른 관점에서 성만찬론을 제시하였다. 루터는 성도들의 참여 혹은 교제로서의 이전 성만찬 이해로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신앙의 상호관계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본격적으로 이전의 성찬론을 비판하고 소위 공재설을 발전시킨 것이 1520년 가을 출판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란 글이다. 여기서 보다 강하게 성만찬에서 약속과 믿음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게 되며, 약속 혹은 말씀을 표지위에 두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다.
1523년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체에 대한 경배에 관하여란 글에서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호엔(Cornelius Hendricxz Hoen)의 성만찬의 상징적 해석과 보헤미아 형제단의 영적 임재 해석에 반대하여 비판과 더불어 포도주 위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인 임재를 주장하였다. 로마 교회와 루터의 대치상황에서 새롭게 개혁자들 내부의 성만찬 해석에 대한 이견은 1524년 치열한 논쟁으로 치닫게 된다.
초기에는 칼슈타트(Andreas Bodenstein bon Karlstedt)가 공개적으로 루터의 실제적인 임재설을 비판하므로 부터 시작된다. 루터의 입장에서 칼슈타트의 영적인 임재 주장은 복음의 본질을 위협하고 개혁의 성과를 위태롭게 하는 일로 받아 들여 졌고, 쯔빙글리가 1524년 이를 지지한 사건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루터는 칼슈타트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1524~1525년에 천상의 예언자들에 대한 반대란 글을 발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무리들에게 일침을 가하였다.
한편 호엔의 의견을 지지한 쯔빙글리와 바젤의 외코람파트을 중심으로 남서부 독일은 성만찬 이해를 둘러싼 논쟁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호엔의 서약개념은 쯔빙그리의 글 전체에서 공명되는 사상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만찬을 통해서 그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으며, 그들의 확신이 약해질 경우를 대비해서 한 서약을 그 약속에 더하셨다. 이는 한 신랑이 한 신부를 확신시키기 위해 그녀에게 반지를 주고 ‘이것을 받으시오. 당신에게 나를 줍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방법이다. 그러면 그녀는 그 반지를 받고, 그가 그녀의 것임을 믿으며, 그녀의 마음을 다른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리며, 오직 남편만을 기쁘게 하며, 그에게만 밀착한다.13)
칼슈타트의 등장은 슈트라스부르크 개혁자의 지도자 마틴부처(Marthin Bucer, 1481-1551)와 볼프강 카피트 (wolfgang Capito, 1478-1541)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고 쯔빙글리, 외크람파트, 부처, 카피트는 점차 영적 임재라는 성만찬 이해를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루터와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구원의 핵심이 되며 그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하였다.
한편 슐레지안 출신의 슈벵크 펠트 (Kaspar von Schwenckfeld)가 루터의 저작물에 감동을 받았으나 성만찬의 해석 이해는 쯔빙글리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1526년 2월 “Syngramma" 독일어판에 서문을 통해 쯔빙글리의 추종자들을 향한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첫 번째 공개적인 비판이었다. 1526년 10월 루터는 열광주의자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에 관한 설교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 임재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에 계심과 같은 기적이라고 이해하였다. 이에 반응하여 1527년 쯔빙글리는 우정 있는 주석을 통해 루터를 공격하였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한 명백한 교훈이란 글에서 자신의 성만찬론을 전개해 간다. 그는 전통적인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따라 상징과 사물자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없다. 그는 경험론적, 성서해석상으로 “이다.”란 것이 본질적인 의미로 이해된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자체로서 육체적으로 보여 지고, 만져지고, 혀로 느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쯔빙글리는 몸은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는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지상적인 것으로 비유, 상징하셨듯이 이 말씀도 “의미한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신경의 고백을 통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몸으로 임재 할 수 없다.이것은 루터의 속성교류를 거부한 것이며 한 인격, 두 본성으로 계신 그리스도께서 본성의 전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리스도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쯔빙글리가 바라보는 루터는 아직, 로마교회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졌다.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루터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작용을 강조하지만 루터는 이것이 외적인 ‘빵’과 ‘포도주’에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쯔빙글리는 단지 영적인 ‘먹고 마심’에 관하여 말할 뿐이며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영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마지막 논쟁의 저술은 1528년 3월에 나온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 고백이다. 이글에서 루터는 적대자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이 본질적인 적이며, 그에 의해 선동되는 그들은 열광주의자라는 기본 입장을 고수하고 이전보다 더욱 치밀하게 그들의 상징론을 반박하게 된다. 그들의 인성과 신성의 날카로운 구분은 성육신의 기적에 의해 실제적으로 결합된 것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루터는 보았다.
이처럼 루터가 염려한 것은 성만찬이 가지는 위로와 신앙 강화의 기능이 상징적 해석을 통해 약화될까 하는 점이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실재론이 우상화이며 로마 가톨릭의 우상숭배의 퇴락과 같다고 여겼다.
이같은 강렬한 논쟁을 마틴부처는 중재하여 개혁자들의 일치를 위해 노력한다. 부처의 판단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먹고 마심’ 에 초점을 두어 루터의 의견에 회의를 가졌으나 급박한 정치적인 정세는 부처로 하여금 신학적 대립을 피하고 개혁자들 내부의 단결을 촉구하도록 작용했다.
즉, 1529년 제2차 슈파이어제국회의에서 보름스 칙령14)을 새롭게 집행하려는 황제 측의 시도에 개혁을 지지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은 퇴장하면서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하는 방어 동맹 결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으로 개혁가들 사이에 골이 깊어가는 것을 당시 정국은 신교도들의 연합을 절대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1529년 10월 1일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쯔빙글리 양 진영은 헤센의 필립의 중재를 기회로 논쟁의 일치점을 모색하게 된다. 헤세의 랜드 그레이브 필립은 모든 신교도들을 단합시켜 황제에 대항하는 공동방어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필립의 정치적 야망을 알고 있었으나, 필립의 요청에 순응하여 마르부르그 성으로 갔다. 루터는 10월 4일 15항목을 작성하고 14개항에 일치를 보았다. 15번째 항목인 성만찬교리는 의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마르부르크 종교회담의 실패는 제1차 슈말칼덴 동맹의 좌절이란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세는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 이후 보름스칙령을 다시 관철시키려는 황제의 의도가 분명해지자, 개혁 도시들 간에 자기 방어를 위한 군사동맹은 절박하게 흘러갔다.
이러한 상황은 부처로 하여금 중재 노력을 더욱 불 질렀고, 1535년 아욱스부르크 목회자들이 성만찬 논쟁의 종식과 합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섬으로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결국 부처는 슈바벤의 개혁자 브렌츠를 합의 추구 세력으로 끌어 들이는데 성공하였으나 여전히 스위스의 개혁자들은 냉담했다.
부처를 비롯한 중재자들의 노력으로 남부 독일 도시에서는 비텐베르크 합의신조가 수용되었으나,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개혁자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종국에 무산되었다.
1538년 말 루터는 공의회와 교회에서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블링어 (Heinrich Bullinfer) 일파를 네스토리우스주의 이단으로 낙인찍었으며, 1541년 터커인들에 대항하는 기도에의 권고에서 쯔빙글리와 재세례파를 정죄했고, 1544년 성만찬에 관한 짧은 고백이라는 소책자에서 또다시 정죄하였다.
이후 루터교의 근본입장은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새로운 개혁교회 기수로 등장한 칼빈은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강조하면서 독자적인 성만찬론을 발전시킨다.
Ⅲ. 결론
루터의 경우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의 임재’는 단순한 교리중의 하나로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인식하였다. 성만찬의 이해는 기독론과 관계 하여 이해되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쯔빙글리와 그 세력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거부하는 것은 성육신 사건과 인성과 신성의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에 반해 쯔빙글리와 그 추종자들은 루터의 입장을 로마 가톨릭의 잔재로 보았다. 이들은 루터에게 있어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자들이며, 개혁의 성과를 붕괴시키는 무리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서로의 극단적 이견 속에서 마티 부처의 중재 노력은 현대의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루터는 가르치기를 성찬은 복음의 보이는 설교이며 그리스도의 은택을 입으며,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실재 임재 하시므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루터는 속성교류에 근거하여 주장을 펴나갔으며 쯔빙글리는 물질 비하 개념을 들어 맞대응하게 된다.
쯔빙글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본질에 의해서 그리고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신앙의 관건에서만 현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 성만찬은 과거 사건의 상징적 반복으로서 믿는 자의 정신에서만이 일어나는 것이다.15)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터와 쯔빙글리의 이견 배경에는 첫째, 육적 실존과 영적 실존 사이의 관계의 문제였다. 영과 육의 이원론적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회학적 요인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 아직 독일은 귀족주의적 사회체제였으나 스위스는 상업이나 공업 중심지의 도시로 발전해 가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독일은 소작농, 가부장적 문화가 반영되는데 반해 쯔빙글리나 칼빈의 저서는 상업도시의 시민으로서 새 지평을 열어 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분명 루터와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주역이었으며 중세의 어두운 신학을 바로 잡는데 높이 들린 깃발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이 오늘날 우리에게 개혁신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찬 교리로 인한 분열은 종교개혁의 오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왜 그리도 성만찬 교리로 싸웠는가!’ 되새겨야 한다. 성만찬의 해석과 적용은 서로를 정죄하고 갈라질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셨으며 어떤 식으로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임재의 경험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것을 잊고 있다. 성례는 보이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예배의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성례는 소흘히 여기면서 열린예배니 목장 예배니 엉뚱한 예배의식에 열심을 내는 것은 왠지 두고 보기에 껄끄러운 모양새다.
물론 현대교회에서 필요는 하겠으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각성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성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례의 예배로 인정해 각 교회에서 자주 성례가 시행됨으로 성도에게 유익이 되기를 소망한다.
Ⅳ. 참고자료
1) 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대한 기독교서회, 1993.
2) 후스트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은성, 1995.
3) 루이스 W. 스피츠, 종교개혁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4) 잉게베르크 C. 헤넬,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 교사상사, 1998.
5) 윌리엄 R. 캐논, 중세교회사,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6) 앨리스터 맥그래스, 종교개혁사상, 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7) 김의환, 기독교회사, 총신대학교출판부, 2006.
8) http://blog.naver.com/mokpojsk?Redirect=Log&logNo=120015598507
'목회자료 >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례주일] 성찬의 의미 (막 14:22-26) (0) | 2007.08.30 |
---|---|
[스크랩] [★일반상식★] 교회력에 관한 고찰 - 김충환 교수 (호남신학대) (0) | 2007.08.30 |
[스크랩] 성례전과 영성개발 (0) | 2007.08.30 |
[스크랩] 하나님 나라 잔치의 예시로서 성례전 (0) | 2007.08.30 |
[스크랩] 심리학자 눈에 비친 영성가의 특징 (0) | 2007.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