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 론
개신교에서는 성례전이라함은 세례의식과 성만찬을 말한다. 하지만 성례전은 홀로 거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성례전은 예배와 함께 거행되는 예식이다. 다시말해서 개신교에서의 성례전을 말하기에 앞서 예배를 말하여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말씀선포와 성만찬이다. 이것은 예배를 떠받치는 두 기둥과도 같다. 초대 교회시대에서부터 이 두기둥은 상당히 중요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말씀선포라는 한쪽 기둥만을 너무 많이 의존하며 더 중요시하여 왔다. 성례전에 있어서도 성만찬은 예배의 한부분인 것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사도시대에서부터 성만찬은 예배 가운데 필히 거행된 예배의 요소였다. 현대교회에서는 이 성만찬을 거행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성만찬의 의미와 집행자와 참여자 모두가 올바른 자세로 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성례전의 중요성은 오늘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탄생하던 때로부터 종교 개혁시기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초점이 되어 왔었다.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8), p.153.
현대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성례전이 얼마큼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심하며, 성례전에 대한 진정한 의미부여와 올바른 집행을 본 소고에서는 다루고자 한다. 본 소고는 우선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성례전의 의미를 논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차례로 논하도록 한다. 본 소고는 역사적인 고찰대로 따르지 않고 주제별로 세례와 성만찬을 논하면서 필요한 내용만 삽입하도록 한다.
Ⅱ.성례전의 어원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
성례전은 예수님께서 몸소 자신의 교회에게 주신 예식이며, 예배의 핵심으로 이루는 요소가 된다.김재철, “한국교회 성례전 갱신에 관한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 1988), p.1.
성례전의 어원적 의미는 성례전이란 말은 라틴어의 sacramentum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sacraments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으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한 그 예전을 가리켜 성례전(sacramentum)이라 불렀으며, 어거스틴 이후로는 성례전이 순수한 세례와 성찬의 예전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경험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엄숙한 예전으로 이해되어 왔다.정장복, pp.154-155를 참조.
신학적 의미로는 다섯가지로 간단히 열거한다. ①성례전이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②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이 나타나는 현장이다. ③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④성례전은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다. ⑤화육적(incarnational respect) 관계 형성이 성례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Ⅲ.세례와 성만찬의 기원
A.세 례
1.용 어
세례를 헬라어로 βαπτισμα라고 한다. 이 용어의 뜻은 ‘씻음’, ‘깨끗하게 함’, ‘물에 가라 앉히다’, ‘물에 잠그다’의 의미로 쓰인다. 종교적인 정화의 상징으로서 물을 사용하는 의식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입문하는 의식으로 불리고 있다.본 용어 설명은 기독교문사에서 편찬한 ‘기독교 대백과 사전’과 아가페출판사에서 편찬한 ‘아가페성경사전’의 세례 부분을 참조.
2.기 원
세례의 용어로 보아 세례는 기독교만이 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이방종교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소고의 중심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간략하게 예만 들어 보이겠다.
용어에서 살펴 보았듯이 세레는 물을 사용한다. -물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는 관념은 고대 동방종교에서 그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몸을 물에 잠그고 씻음으로 신생의 종교적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다. 특히 밀의종교에서는 침수의식을 통하여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들과 신도들이 합일 상태에 들어간다고 믿었다. 이렇한 영향이 그리스도교 세례에 어느 정도 미쳤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리스도교 세례의 직접적인 배경은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들의 세례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이하를을 통해서 알수 있다. “사도행전에 가면 단순히 세례만 집행되지 않고 사도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가 나온다. 백성들은 설교를 듣고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고, 이런 일들은 계속되었다. 세례가 때로는 손으로 안수하고 또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기도 했다. 학자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절차가 회개, 세례, 성령의 은사였다고 말한다.로버트 앤 솨퍼, 「예배의식의 변천사」 김기곤 역 (서울:세종문화사, 1993), p.72.
실질적으로 오순절 이후에 행하였고, 설명된 세례가 비로소 기독교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의식은 기독교 고유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조금 살펴 본 바와 같이 기독교 이전의 많은 종파들이 세례 형태의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특히 근동의 종교 의식과 유대교 종파들이 행했던 세례가 기독교의 세례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오자흥, “세례의 중요성과 그 適用” (신학석사학위논문, 목원대학신학대학원, 1983), pp.24-25.
B.성만찬의 기원
1.기 원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카톨릭의 많은 성례전들을 수용하지 않는 개신교에서도 세례와 성만찬만은 주님의 명령으로서 엄수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전통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에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을 지켰던 저녁 식탁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제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빵을 나누는 예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에는 카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예배형식인 미사가 되었다. 개신교의 성만찬도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미사와 공통점을 가진다.송종남, “성만찬의 현대적의미와 회복에 관한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원, 1990), p.4.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의 근원으로 받아들였지만, 근래에 와서 어떤 학자는 키디쉬(kiddush)라고 불리우는 유대인들의 랍비와 제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것을 성만찬의 근원에 두는 견해가 있다. 이 키디쉬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선비인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을 함께 하면서 모였던 것이다. 이때 이들은 간단한 식사로써 빵을 먹었으며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서로 돌려 가면서 마셨고 그 후에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모임은 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경건한 생활의 지속을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었다.정장복, p.183.
2.유월절 만찬과 키디쉬의 식사비교
이 두 만찬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
유 월 절 만 찬
키 디 쉬
· 언제나 가족 중심의 축제였다.
· 어린 양을 잡아 사용했다.
· 누룩 없는 빵을 사용했다.
· 여러 개의 잔이 사용되었다.
· 출애굽의 말씀을 읽었다.
· 연 1회의 축제였다.
· 남자들만의 친구들이 모이는 식사였다.
· 어린 양을 잡지 않았다.
· 언제나 누룩있는 빵을 사용했다.
· 단 하나의 잔이 사용되었다.
· 그러한 말씀의 봉독이 필요없었다.
· 매주일 가졌었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최후의 만찬이 형식에 있어서 키디쉬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의 역사적 기원을 한 견해로 확정시켜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간에 분명히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며 그 식탁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단순한 식사만을 나눈 것이 아니였고, 그것을 하나의 성례로 제정된 최후의 만찬이였다는 사실이다. 최시영, “성만찬 예전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원, 1991), p.34.
Ⅳ.로마 카톨릭의 성례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관은 스콜라 신학의 성례관을 쫓았으며 이들은 어거스틴의 성례관을 그대로 따랐다. 로마 카톨릭의 성례의 수는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5종에서 30종까지 꼽을 수 있다. 7성례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자는 Peter the Rombard이고 이 개인적인 의견이 일반적인 의견이 되었고, 마침내 1439년에 플로렌스회의에서 7성례를 공식적으로 채용하였다. 7성례는 다음과 같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신품성사, 혼인성사, 종부성사이다.
A.세례성사
세례성사는 성화은총의 생활과 주입된 신학적, 윤리적 덕행과 성령의 은사들을 세례받는 이에게 부여한다. 이와 같이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는 처음부터 기독인 생활의 충만과 사랑의 완성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이리하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 때문에 불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불리어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의화되었으며, 믿음의 세례로써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고 하나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하게 삶으로써 받은 성덕을 보존하며 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B.견지성사
견진성사는 세례시에 받은 은혜가 더욱 굳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이해되어지는 성례이다. 영혼은 세례성사 때, 성령의 은사들을 비롯해서 영성생활의 완전한 초자연적 기능을 부여받는다. 그렇지만 견진성사 때 개인적 성령의 강림처럼 성령이 영혼에 파견되고 이 때 영혼은 믿음을 증거하고 믿음 안에 확고하게 머물고 또 믿음을 변호할 용덕의 은총을 받게 된다. 견신성사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견진성사는 그 수령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제직과 왕직에 참여케 해주는 성례이다.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여 모든 이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C.성체성사
성체성사는 성사와 희생의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는 미사이며, 미사는 본질적으로 갈보리의 희생과 같은 희생이다. 신자들과 미사 집전자들에겐 미사의 정점이 성체배령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성화 은총의 은사를 통하여 각 신자는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에 참여하고 이리하여 성령의 거처가 된다. 오늘날 안이하고 빈번한 성사적 성체배령이 신령성체의 관습을 덜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이것은 권장할 만하다. 영성체가 영적이고 성사적이 아닐 때라도 성사적인 영성체를 지향함으로써 그 가치를 얻게 된다. 신령성체의 효과는 거룩한 성사에 대한 각자의 믿음의 강도와 각자의 사랑의 열기에 달려있다. 이것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또 전세계 어디서나 성부의 영광과 찬미를 위해 제헌되는 미사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탁월한 방법이다.
D.고해성사
고백성사는 ‘제2의 세례성사’라고도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자신의 생활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성사이다. 그리스도의 권능하에서 교회가 사제의 권위 있는 선언을 통하여 세례받은 후에 범한 죄를 참회할 때 그 죄를 제거해 주는 성례이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을 거쳐 초대 교회에서부터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와 사제들에게 전해졌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의 길인 고백의 성례를 제정하신 것이므로 구원에 필요한 용서하는 권한은 사도들로부터 그 후계자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백성사를 통해 은총의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대죄 전에 지녔던 것과 같은 정도의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사를 받을 때의 실제적인 마음 준비에 따라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활전환과 관련시켜 볼 때, 개선의 의향이 없으면 고백은 무효이다.
E.신품성사
신품성사는 이것을 받는 이들에게 완전히 혹은 제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부여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만이 그리스도교적 사제직을 완전히 지니고, 따라서 위임된 지역교회를 사목하고 가르치는 임무가 그들에게 속해 있다. 성직제도적 사제직은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주교에서 나오고 사제들은 자신들의 사제직 수행에 있어 주교들에게 의존한다. 부제직은 신품의 가장 낮고, 가장 제한된 단계로서 사제직에 나아갈 사람들에게 혹은 사제를 도와 강론하고 성사를 집행하고 전례를 집전하는 부제직에 종신토록 머물려는 이들(평신도 부제)에게 수여된다.
F.혼인성사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천상원천에서 솟아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체를 모델삼아 구성된 다각적 사랑에 풍부한 축복을 내리셨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사랑과 충실의 계약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도와 주셨듯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교회의 정배께서 혼인성사로서 신자부부를 도우려 하신다. 그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부부도 역시 서로의 애정과 변치 않는 충실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진정한 부부애는 하나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구원능력과 교회의 구원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 이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수행에 있어서 도움과 힘을 얻을 것이다.
G.종부성사
종부성사는 초기의 크리스찬 관습으로 되돌아감과, 중대한 질병을 앓고 있거나 노쇠하여 무력하게 된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큰 사랑의 관심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다. 더욱이 병자는 피할 수 없는 것인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및 죽음의 공로를 통한 구원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가장 효과있는 길인 통고의 어머니께서 자신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성화시킬 수 있다. 혹은 자신들의 죄와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서 고통을 바칠 수 있다. 연옥에서 받아야 할 영혼의 고통을 완전히 깨달을 수만 있으면 병자들은 어떤 일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다.
Ⅴ.세례를 통한 영성
A.세례의 영적의미
세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죽음의 효력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며,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죄의 어두움으로부터 정결케 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림으로 죄악을 정화시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조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명령에서 확립된 세례의 원리에 표현된 그리스도와 연합의 본질보다 낮은 어떤 개념은 너무 제한된 개념을 줄 것이다.John Murray, 「기독교 세례론」 이길호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15.
기독교 세례의 독특성은 그 형식에서가 아니라 거기에 부여한 기독교의 신앙적인 의미에 있다고 하겠다. 세례가 단순한 회개나 개종 혹은 입문 의식에 머물지 않고,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신앙과 심판이요 죽음인 ‘물’과 ‘구름과 바다’가 오히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행동으로서의 ‘구원의 표’가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이 믿는자의 ‘구원의 표’요 곧 세례라고 말함으로서 기독교 세례의 독특한 의미를 설정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활동이 은혜로서 확신되게 하는 성례전의 하나다. 즉 세례는 신앙에 대한 강한 상징적 확증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승리 안으로 한 개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오자흥, p.25.
B.세례의 형식
1.성례자료 : 물
교회 초기의 가르침은 물이 자연수이기만하면 신선하던지 또는 염분이 있든지 간에 어떤 종류의 물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허락하고 있다.이는 가장 오래 된 훈련 교법서인 디다케(Didache)에서 나오는 형식을 참조한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생수로 세례를 주되 생수가 없으면 다른 물로, 찬물로 할 수 없으면 따뜻한 물로 하시오”
물은 상징성을 가진 세례의 도구이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심연의 물 속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은 성서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하나님을 증오하는 레비아탄의 거주지인 바다의 혼돈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한다. 반대로 물은 생명을 가져다주고 또한 열매를 맺게 한다. 교회가 세례에 있어서 생수 즉 흐르는 물을 사용하여 왔다는 관례를 보건대 교회는 일찍부터 생명의 근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물을 채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죽음과 생명은 물의 이중적인 상징성 속에 잘 드러난다. 물의 이중적인 상징성 속에서만 죽음과 부활의 일치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 세례 받는 사람에게 경험된다.오자흥, p28.
2.물의 사용법Ibid., pp. 29-34 참조.
세례를 행할 때 물의 사용법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침수례이다. 이는 물에 잠그는 방법으로 수세자의 온 몸을 물 속에 잠그는데 수세자의 머리를 물 속으로 한번 혹은 세번 넣는 것이다. 침례의 정당성을 말하는데에서는 침례가 그리스도의 장사와 부활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물에 잠기는 침례라야 한다. 침례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씻어 주신바 죄를 씻어 없애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꼭 물에 잠기는 침례만이 그것을 정당하게 나타낸다. 확실히 세례의 의미와 부합되는 점이 많은 방법이다. 가능한 한 침수례를 거침으로서 보다 생생한 신앙적 경험과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관수례이다. 붓는 방법으로 물에나 또는 땅위에 서 있는 수세자의 머리에 물을 붓는 방법이다. 세례의 형태에 대한 최초의 설명인 디다케에서도 ‘머리에 세번 물을 뿌리라’고 함으로서 초대교회가 이미 물을 붓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침수례 때에 삼위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수면에서 물 속으로 세번 수세자의 머리가 잠기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관수례 때에도 집례자는 수세자의 머리에 세번 물을 부으면서 삼위일체를 언급한다.
세째는 살수례이다. 뿌리는 방법으로 수세자의 머리에나 얼굴에 물을 뿌린다. 이는 수세자가 허약하여 침수례나 관수례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 행해지던 세례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소간 경멸을 받았던 증거가 있다. 살수례에 대해 3세기 중엽의 키프리아누스의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에서 정결케 해주는 것은 물의 양이 아니요 물의 사용방법도 아니다. 또한 물을 뿌리는 세례가 구원의 씻음과 같이 널리 시행되고 있으며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신앙이 건전한 경우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믿음의 진리에 의해 유효하며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C.물세례와 성령세례
1.성령세례
성령세례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근원에 둔다. 그러나 앞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성령의 임재이고,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순서를 밝혀 준다.
세례는 성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세례의 효능은 물에 있지 않고 말씀과 성령안에 있다. 이 은혜의 표징인 세례는 성령의 능력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동시에 세례는 성령의 수여를 동반한다. 일반적으로 물세례가 성령을 받기 이전에 행하여졌다. 교회생활에서 세례이후에 성령 수여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체험하는 내용이다.신영춘, “성례전이 치유에 미치는 영향” (치유선교학문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1993), p.63.
성결교회 예식서 가운데 세례예식에 문답 순서가 있는데 문답 6번에서는 ‘형제자매들은 세례를 받으므로 성령의 내주 하심과 주와 한몸 됨을 믿느뇨?’라고 묻고 있다.“헌법”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출판부, 1991), p.86.
2.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성
두 세례의 관계성은 바르트의 의견을 따르도록 한다.
바르트는 세례를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논술 하면서도 상호 관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그리스도인 생활의 객관적인 요소로 물세례를 그 주관적인 요소로 서술 하였다. 또한 물세례를 인간의 복종과 신앙의 행동으로 이해하였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된 한 신적인 행동이며, 그분 안에서 말씀 되어진 하나님의 한 말씀을 언급 하지만 세례가 그와 같은 사업과 말씀이 아니라 복종하고 그에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사업과 말씀이라고 한다.김남철, “개혁교회의 세례의식에 관한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한신대학신학대학원, 1988), p.37.
D.유아세례
유아세례는 교회의 전통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역에 있어서나 교의에 있어서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오늘날 탈그리스도교화와 속세적인 풍조를 고려하여 한낱 형식적 예전으로 끝나기 쉬운 유아세례를 꺼리는가 하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조에 따라 세례를 성년기에 자의적으로 받게하자는 주장이 강력해지기도 한다.오자흥, p.34.
만약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옳다면 세례의 의미는 어른들에게 베푸는 세례와 유아세례가 동일하여야 한다.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에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를 수 없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지체가 되는 표와 인이다. 만약 유아세례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인치는 표시로서 어른들과 동일하게 유아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John Murray, p.68.
1.할례와 유아세례
아브라함을 통한 할례의 언약은 구약의 교회가 참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충분한 연령과 지적인 수준에 있는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아들까지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할례언약의 영적인 축복(아브라함과의 언약-할례-으로 인해 가정과 세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음)이 사실상 외적인 특권을 지니고 있으며, 구별된 민족과 종족의 실체로서 선택받은 백성을 구별하여 표시하였다. 이는 세례가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할례를 통하여 죄악들을 제거하는 상징적인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과 연합함과 교통함을 굳게 하는 언약의 합당한 표가 되었다. 그리고 할례는 믿음의 의를 인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4:11). 그러므로 할례는 믿음의 인치는 것이다.Ibid., pp.69-71 참조.
이상에서 살펴본 바로 할례와 세례와의 밀접한 유사점이 있다. 특히 중심적인 개념에서 같다는 것이 의미있다. 할례와 세례의 중심개념은 서로 ‘주님과 연합됨과 교통함’이다. 할례의 축복과 인치심이 구약에서 유아들에게 실시하게 된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유아세례를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이 된다. 그 원리에 있어서 세례의 의미와 같은 뜻을 갖는 할례는 언약의 관계와 특권 아래에 태어난 유아들에게 실시된다.Ibid., p.72.
2.성서적 근거
복음서나 사도들의 서간에는 유아 세례를 정식으로 취급한 대목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시대의 교회 안에서 유아세례를 허용하고 실천했다는 견해를 찾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세례를 할례와 결부시키면서 복음 아래에서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한다고 했다(골 2:11-12). 어린이들이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므로 여기에 비추어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아 마땅하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유대 개종자들은 집안의 어린 아이들 까지도 세례를 받게했다. 신약에서도 ‘온식구’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설명이 많다. [행 16:15]의 루디아의 집과 [행 16:30-33]의 빌립보 간수의 집이다.오자흥, p.35.
3.전통적 근거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속사도시대 교회의 초기에서도 나타난다. 180년 이레니우스는 ‘예수는 자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중생되는 모든 자들, 유아들과 어린이들 또한 청년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신다’라고 했다. 215년 로마에서 편찬된 ‘사도들의 전통’에서 교회의 관례를 보면, ‘우선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말할 줄 아는 어린이는 그들이 대답하게 하고, 말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나 친척이 대답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자신도 유아 때에 세례를 받은 오리게네스는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시대로 보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초대교회에서는 유아 세례를 거행했고, 또한 사도시대 교회에서 내려온 관례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아세례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에도 나타나 있다. 그 예로 아우구스브르코 신앙고백 제 9 조의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며 아동들은 세례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지며 하나님의 은총 속에 영접된다.’고 명시하고 있다.Ibid., pp.36-38 참조.
4.신학적 근거
요한 웨슬레는 ‘세례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5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첫째, 유아들도 역시 원죄의 영향 아래있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 원죄에서 씻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유아들도 역시 복음적 계약아래 있으며, 지금도 그 계약의 영원한 인장인 세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 셋째, 유아들도 역시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올 수 있으며, 또 엄숙한 성례전적 봉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도 세례의 본래적 대상이 된다. 넷째, 유대인들이 유아에게 할례를 주었듯이 사도들도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분명한 세례의 대상자이다. 다섯째,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인 실천이 되었다면, 그것은 사도들의 실천에서 유래된 것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신에 일치하는 것이다.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성광문화사, 1994), p.293.
유아 세례를 집전하는 교회는 세례와 관하여 명확한 구원관과 그것을 실생활과 연결시켜야 할 양육적 책임 의식을 분명히해야 한다. 유아 세례는 기독교 가정을 떠나서, 그리고 장래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보장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오자흥, p.41.
E.개신교의 세례갱신
1.개신교의 세례에 대한 반성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반성할 점이 있다.
첫째, 지원자들에게 세례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 실시와 종래 전통적인 교육 방식 지향과 세례 지원자의 교육 기간을 연장하여 교육 부재를 방지해야 한다. 둘째, 세례 예전시에는 교회 공동 예배와 밀접하게 해서 공예배시에 정식으로 집례되어져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처럼, 세례 성례전이 큰 축제로서 공개적으로 집례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례 받은 사람들을 공동체 안으로 환영하여 회중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례를 하나의 개인적이며 심성적인, 즉 개인적인 구원개념으로만 이해하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적인 삶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김남철, p.62.
2.세례갱신
앞으로 교회들은 21세기를 향한 전세계의 복음전파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세례를 받은 자는 사도적인 삶을 실천하여야 하는데 사도적인 삶이란 곧 복음전파(선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세례갱신은 선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네가지 차원에서 살펴 본다.
첫째, 성만찬과 동일하게 세례도 케리그마를 구현한다. 그 이유는 세례도 또한 주님이 다시 오실때 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타자와의 동화, 고난, 타자를 위해 죽으면서 사는 생활의 성례이다. 둘째, 세례를 받음으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파하며 이 세상에서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의 직무를 지닌 존재가 된다. 즉 기독교인은 세례를 받음으로 제사장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성원들이 선교를 위해서 성별된 것을 의미한다. 넷째,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이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직무에 참여하는 것이다. 곧 세례는 개인적인 구원이 강조될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선교와 공동체의 공동적 생활과 관련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행 2:38). 이와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선교운동에 내 보냄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는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증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개인의 영적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것이다. 성결도 역시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개념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사람은 바깥을 향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세례의 본질과 그 의미, 세례가 가지고 있는 선교적 차원을 꾸준히 가르치는 데서만이 세례의 갱신과 선교의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Ibid., pp.63-65 참조.
Ⅵ.성만찬과 영성
세례가 교회 입문의식이라면 성만찬은 교회의 계속적 의식이다. 이 의식은 그리스도께서 배신당하시던 날 밤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성만찬을 준수하는 가운데 교회는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교회 자체와 세상에 기억 시켜 준다. 그러니까 이 성만찬은 영구적인 의미이다. 또한 이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가장 고귀한 은총의 핵심이다. 이것의 효능과 이것을 행하므로 얻는 전인적 축복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신영춘, pp.53-54 참조.
A.예배에서의 성만찬
이는 역사적인 고찰을 제시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서 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만 살펴보도록 한다.
1.초대교회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만찬 위주로 거행되어 왔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행2:42,46, 고전11:20). 이 기록들에 의하면 당시의 성만찬은 일정한 기간으로 행해졌으며 아마도 매주 빵이 나누어지는 분배였고, 이것에 의해 공동의 잔이 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유다서 12절에는 애찬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성도들은 매주 첫날(주일) 가정집에 모여 자기들이 준비하여 온 음식을 서로 나누며 공동식사를 하였는데 성경에는 애찬이나 주의 만찬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최시영, p.44.
사도시대 이후의 성만찬 예전은 주후 2세기에 기록된 디다케(Didache)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디다케는 12사도의 가르침을 나타내며, 100-150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으로 신자생활의 제반규정, 즉 윤리생활과 기도생활에 관한 규정들을 전해준다.
디다케 Ⅸ-Ⅹ ‘성찬기도’ : 성찬례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감사드리시고. 먼저 잔에 대해 :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대로 당신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주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있으소서.
나눠진 빵에 대해 :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생명과 지혜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있으소서....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성찬에서 먹지도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에 대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Ⅹ’ 여러분은 만족히 먹은 후에는 이렇게 감사드리시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신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해 또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생명과 믿음과 불멸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있으소서. . .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영적인 음식과 음료를 당신 종 예수를 통하여 베풀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당신께 감사드리는 것은 당신이 능하시기 때문입니다. . .Ibid., pp.44-45.
2.중세시대
5세기부터 종교개혁시까지 예배의식은 더욱 정교해지며 화려해져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가 발전하였다. 중세는 동·서방교회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1)동방교회 - 4세기 이후 동방교회의 성찬형식에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전까지만해도 빵과 포도주를 구분하여 두던 것을 이제는 빵을 잔에 넣어 포도주와 섞은 후 숟가락으로 떠서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었다. 이 동방교회 예배는 구원의 전체 드라마를 다시 회상시켜주고 초월자에 대한 신비감을 갖게 한다는 단순히 상징적이요, 신비스런 색체만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경축의 영역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Ibid., p.51.
(2)서방교회 - 초대교회 때는 비교적 간단한 의식이였던 주의 만찬이 ‘미사’로 발전하면서 성만찬은 서방교회예배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부각되었다. 서방교회는 미사를 제사로 생각한다. 이 서방교회의 성만찬 신학은 이그나티우스의 화체설이 받아들여져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 교리로 확정되어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Ibid., p.53.
3.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자들중에는 루터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세력은 로마 카톨릭 예전을 거의 답습하며 부분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쯔빙글리 같은 개혁자는 급진적인 예배개혁을 시도하여 중세 카톨릭적 요소를 제거하고 예배에서 상징을사용하는데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대체로 어떻게하면 교회가 성서적이요, 초대교회의 본래 예배형태에 가깝게 성만찬 의식을 회복하려 했으며 성만찬 신학을 분명하게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지만 본래 의도대로 예배의식을 개혁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B.성만찬 논쟁송종남, pp.21-25 참조.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개혁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결과 오늘날까지 교단의 계열에 따라 그 신학적 이해를 달리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는 네가지 성만찬의 신학적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1.화체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공식적 교리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사제가 성별의 기도를 하고 나면 성찬의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된다고 믿는다. 이 교리는 1215년 로마에서 열린 정식 카톨릭 라테란에서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정식 카톨릭 교리로 채용되었다. 성찬의 요소인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봉헌을 통해 그 본질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화(化)한다는 화체는 곧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수난의 실재적인 재현이라고 하였다.
2.기념설
이것은 쯔빙글리의 입장인데 그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희생의 기념표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동을 회상케 할 뿐이라고 한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성만찬 성물을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성만찬은 단지 기념적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서 단수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다.
3.공체설
루터의 입장으로 쯔빙글리의 의견을 단호히 반대하면서 카톨릭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공체설은 성만찬 제단 위의 성물은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음식일 뿐이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눈에 보이는 그 성물안에, 그리고 그 성물과 함께 한다는 해석이다. 카톨릭의 화체설로 인해 성만찬이 사제들에 의해서만 참여가 되었던 것이 모든 교인들도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단순히 성물을 먹고 마심으로써 용서가 이룩된 것이 아니고 성만찬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죄의 용서가 이룩된다는 점이다.
4.영적임재설
이것은 칼빈의 입장으로서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입장이다. 칼빈의 주장은 쯔빙글리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만찬 이해에 좀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학적 견해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동시에 루터의 그리스도의 임재(현존) 개념을 수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의 성례전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고 그 사실을 경험하는 예전으로서 말하고 있다. 특히 그는 루터의 임재개념을 수정하면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믿으나, 실체로서의 현존이 아니라 그의 권능과 효험이 신앙을 통해서 현존한다고 보았다.
C.리마예식서
리마예식서에 관한 논고는 지면의 할애가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리마예식서의 의의와 현대적 이해만을 간단히 살펴본다.리마예식서의 예배 진행에 대한 모델과 설명을 전부 기록하기에는 지면이 상당히 많이 할애되고, 예전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록한 것 외에 리마예식서에 대해 자세히 고찰하기 원하면, - 박근원. 「리마예식서」 서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1. -를 참조하기 바란다.
1.의 의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교 문서로서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승인했던 마틴 루터의 ‘95개조 논제’에 버금가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1982년 남미에 있는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총회에서 채택한 ‘세례·성만찬·교역(영어의 첫자를 따서BEM이라고 약칭)’이라는 소위 리마 문서를 가리킨다. ‘리마 성만찬 예식서’는 위에 말한 위원회 총회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서 거기서 성취된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공감대를 설명하려는 데 주요 목적이 있었다. 리마 예식서가 리마 문서의 정신을 반영한 유일한 예전적 표현일 수는 없다. 다만 리마에서 이룩된 ‘신학적 일치의 수렴’을 우리의 예배에 표현할 수 있는 가능한 형태 내지 실례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예식서가 지니고 있는 틀, 내용, 언어 등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역사가 오랜 성만찬 신학과 전통을 우리의 교회 전통과 영성 그리고 문화에서 어떻게 표현해감으로써 세계교회의 일치를 구현해 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리마 문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이 ‘리마 예식서’는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는 수레가 될 수 있을 것이다.박근원, 「리마예식서」 (서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1), pp.9-10.
2.현대적 이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야말로 분열된 기독교 성만찬 공동체의 각축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리마 예식서의 실험이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곳이 한국이다. 왜냐하면 리마 예식서가 하나의 완성품이 아니나 현재의 상황에서 일치를 향한 가장 최상의 예식서이기 때문이다. BEM 문서가 세계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BEM 문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한국문화 풍토에 맞는 우리 종교로서의 생동감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BEM 문서의 수렴과정이나 방법에 있어서 문화의 특수성·전문성을 충분히 고려한 후 조화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리하게 동일성에 집착하다 보면 그것이 오히려 분열의 새로운 씨가 될 수 있다. BEM 문서가 신학적으로 바른 태도를 밝힐지라도 한국 개신교에서의 현실성과 현장성이 없다면 무력한 문서가 될 수 밖에 없다.송종남, p.46.
D.각 교단의 성만찬 예식
각 교단의 성만찬 예식은 1995년 서울신학대학원에서 ‘성례전’이라는 과목에서 발표되어진 소고를 별첨으로 복사하여 제일 뒷장에 첨부 하였다.
E.한국성결교회의 성만찬 모델
이 소단원에서 필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에 한국의 성결교회에서 새로이 예배의 예식을 갖추어 실험적으로 드린 예배예식이다. 교회력에 따라 ‘대강절 첫째주일 예배’로 하였다.
대강절 첫째주일 대예배순서
모 이 는 교 회
전 주 ------------------------ (준비음악) ----------------------- 오 르 간
위원입장 ----------------------- (프로쎄이션) ---------------------- 예 배 위 원
모 임 송 -------------- (오소서 평화의 임금, 3회 연송) ---------------- 다 같 이
(절기에 맞게 (예배분위기를
찬송을 정할 보아서 사회자가
수 있다.) 요령껏 계속
부를 수 있다.)
2. 오소서 오소서 평화의 임금
3. 오소서 오소서 창조의 임금
예배에로의 부름과 응답 --------------------------------------------- 인도자와 회중
인도자 : 보라,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신다. 우리의 입을 열어 그의 영광을
찬양하라.
회 중 : 모든 만물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
인도자 :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이시여, 시내산에서 당신의 법을
주신이시여 어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회 중 : 주여 더디마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인도자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7-8)
다같이 : “마라나타” 오 주여 오시옵소서 - 아 멘 -
경배찬송 ------------------ 104장 1-2절 일어서서 -------------------- 다 같 이
시편교독 ------------------------ 앉 아 서 ------------------------- 다 같 이
인도자 :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회 중 :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건설되었도다
인도자 :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고 올라가는도다
회 중 :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집의 보좌로다
인도자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회 중 :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인도자 :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1-9)
다같이 : 아 멘
성령임재의 기원 --------------------- 앉 아 서 --------------------- 인도자와 회중
인도자 : “내가 하늘에 올라가면 내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약속 하신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회 중 :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오셔서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셨나이다.
인도자 : 이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임재하셔서 대강절 첫 주일
예배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다시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 하옵나이다
다같이 : 아 멘
기 도 송 ------------------------- 104장 3절 ----------------------- 다 같 이
참회의 권면 ----------- (참회의 음악 오르간과 함께 시도) --------------- 인 도 자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참회의 기도를 드립시다. 우리의 크고 작은 허물과 그리고 알게 모르게 범한 죄들을 진심으로 회개합시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자비로우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십니다.
회중의 참회기도 ----------- (오르간 반주 : 가사없는 것으로) ------------ 다 같 이
중보의 기도 ------------------- (절기에 따라 변화) ------------------- 인 도 자
과거에 희생양으로 오셨고 지금도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장차 심판주로 오실 대망의 주여 지금 진심으로 회개한 우리의 불결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모두가 고백한 허물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사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 아 멘 -
주기도문 노래 (혹은 548장) ---------------------------------------- 솔로 혹은 다같이
용서의 말씀 확인 ------------------------------------------------- 인도자와 회중
인도자 :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요일 1:9)
이제 이 말씀을 전하라 부름받은 나 목사는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의 모든 죄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 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확인합니다.
우리도 서로 용서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회 중 : 아 멘
대강절 찬송 ---------------------- 105 장 -------------------------- 사 회 자
말 씀 의 교 회
구약성경봉독 --------------------- 사 2:1-5 ------------------------ 남성도중에서
서 신 봉 독 -------------------- 고전 13:11-14 ---------------------- 여성도중에서
말 씀 송 ---------------------- 236장 1절 ---------------------- 다 같 이
복음서 봉독(일어서서) ---------------- 마 24:36-44 ------------------- 인 도 자
(아멘 후 앉는다.)
찬 양 --------------------------------------------------------- 다 같 이
설 교 ----------------- 심판의 왕으로 오시는 이 ------------------ ○○○ 목사
목회기도 --------------------------------------------------------- 설 교 자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 이
봉헌의 말씀 ------------------------------------------------------ 인 도 자
“주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감사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시 96:8)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니라”
봉헌송과 헌금 ---------------------- 162장 ------------------------- 다 같 이
성찬 나누는 교회
성 찬 송 ----------------------- 282장 1,4-6절 --------------------- 다 같 이
초대와 응답 ------------------------------------------------------ 집례자와 회중
집례자 : 여러분! 지금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맞이하였습니다.
회 중 : 오소서 정의의 임금이시여! 오셔서 한 몸 이루게 하옵소서
집례자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메시야가 오셨고,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회 중 : 오소서 심판의 임금이시여! 오셔서 선악을 분별해 주옵소서
집례자 : 이제 신실하신 주의 말씀을 따라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대강절 성찬을 마련하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회 중 : 곧 오소서 임마누엘 주님을 기다립니다.
집례자 : 그러므로 우리는 천군 천사들과 하늘의 성도들과 함께 주의
거룩하심을 찬미합니다.
찬 양 ---------------------- (삼 성 송) ------------------------- 다 같 이
성찬제정의 말씀 --------------------------------------------------- 집례자와 회중
집레자 : 다시 오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읍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ꠏꠏꠏꠏꠏ “자
마셔라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하여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로
맺은 새로운 언약의 잔이니 마실때 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하셨으니(고전 11:23-25), 신앙의 신비가 크고도 놀랍습니다.
회 중 : 마라나타! 오 주여 오시옵소서.
소망의 인사 ------------------------------------------------------ 집례자와 회중
집례자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 간다.”(요 14:3)
회 중 : 주님의 소망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집례자 : 주님의 소망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 중 : 목사님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집례자 : 이제 인사를 나눕시다.
다같이 : 마라나타! 오 주여 오시옵소서.
성령임재의 기원 --------------------------------------------------- 집 례 자
소망의 주여!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예언케 하신 거룩하신 성령을 이 성찬상에 보내시어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이 성찬을 먹고 마실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와 연합되계 하옵소서. 다시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찬 송 ----------------- (키리에 기도 송) ------------------------- 다 같 이
분병과 분잔례 ---------------------------------------------------- 집례자와 회중
집례자 : 우리가 떼는 이 떡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회 중 : 아 멘
집례자 : 우리가 마실 이 포도주는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회 중 : 아 멘
권 면 ---------------------------------------------------------- 집 례 자
세례 받으신 성도들께는 앞으로 나와 성찬을 받으십시다.
(이제 ‘사랑의 나눔’을 부르며 성찬을 나눕시다.)
성찬의 나눔 ------------------------------------------------------- 세 례 교 인
감사의 기도 ------------------------------------------------------- 집 례 자
자비하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셨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찬에 참여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거룩한 성찬을 나누었으니 이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때까지 주의 말씀을 전하며 소망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 아 멘 -
송 영 ------------------- (오르간 반주) ------------------------- 다 같 이
흩 어 지 는 교 회
교회소식 -------------------------------------------------------- 인 도 자
마 감 송 ------------------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 다 같 이
파송의 말씀 ------------------------------------------------------- 인도자와 회중
인도자 : 이제 모이는 교회 예배를 마쳤으니 세상으로 흩어져 말씀을
실천하며 삽시다.
회 중 : 아 멘
송 영 --------------------------- 8 장 --------------------------- 다 같 이
축 도 ----------------------------------------------------------- 인 도 자
후 주 ----------------------------------------------------------- 오 르 간
F.성만찬의 갱신
기독교 예배는 항상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두가지 핵심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 그러나 종교개혁후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말씀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여 성만찬 예전은 경시되고 무시되었다. 특히 메마른 예배의식이 선교사들에 의해서 도입된 한국교회는 예배형태와 의식적인 것에 대하여는 무조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해온 편협적인 사고방식 등으로 한국교회는 예배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예배에서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성만찬이 없는 설교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이다.최시영, p.69.
1.성만찬 회복송종남, pp.65-71 참조.
(1)성만찬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 -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만찬은 일년에 1-2회 거행되는 기념적인 것으로서 본래의 중요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책임은 첫번째 교역자에게 있다. 먼저 성만찬을 집례하는 교역자가 성만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역자는 성만찬 예전이 삶의 예전이 되도록 가르치고 도와야 할 것이다. 성만찬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질 때 비로소 상징적인 예전이 아닌 본체론적 실재가 될 것이다.
(2)현장성 -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의 자리에서 단순히 과거의 예수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초월적인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와 더불어 현존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매주 성만찬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절박한 삶과 결부시켜 어떤 이에게는 위로와 긍지와 희망을 주어 다시 세상에 나가 삶의 결단을 내리게하고 감동이 되고 활력소로 작용되었다. 성만찬을 단순히 상징적인 행위로 보아서는 안되며 실현이 되는 것으로,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만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삶의 현장에 살도록 도와야 하고 삶을 통해 실현하도록 교회는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성을 가지고 와서 성만찬에 참석시키고 다시 파송하는 중요한 일을 실행하여야 한다.
(3)물성과 영성의 조화 -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만찬에서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영성적인 면이 올바르게 이해(떡-그리스도의 살, 포도주-그리스도의 피) 되어져야 한다. 이 성만찬은 우리끼리만 먹는 식탁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함께 나누는 물질과 영적인 나눔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 실천적인 삶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물성과 영성의 조화로 신앙의 승화를 경험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성만찬은 실제 우리 생활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속적인 삶을 끌어들이는, 그래서 성찬의 본래적인 삶인 나누는 의식, 예배가 될 수 있다.
2.성만찬 갱신
위의 내용들로 비추어 보아 성만찬을 갱신하는데는 간단히 여섯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역사안에 들어오신 성육신의 사실에 비추어야 한다. 둘째로 하늘의 교회의 땅위의 교회와의 사귐의 의미를 비추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 대해 최대한의 감사와 우주적인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 네째로 하나님의 성업에 대해서 교회의 고백과 중재와 물질적 예물을 가진 기쁨의 제사가 그리스도 희생을 통해서 드려져야 한다. 다섯째로 신비사상과 임재가 표현되어야 한다. 여섯째로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는 헌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배의식의 방법은 각자의 재량에 따라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최시영, pp.69-70.
3.교회론적 의미에서의 성만찬 제시송종남, pp.16-18 참조.
성만찬 갱신을 위해서 다음 교회론적 의미에서 행할 수 있는 두가지의 성만찬 개념을 소개한다.
(1)코이노니아(친교-사귐과 나눔) 공동체 - 코이노니아는 ‘관계가 돈독하다’는 친교를 가리킨다. 가진 것들을 나눌 때 친교는 생생하게 실현된다는 것이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었다. 고린도 전서 10장 16-17절과 사도행전 2장 42-47절은 우리교회가 친교-사귐과 나눔의 공동체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빵과 포도주의 상징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그리스도와 친교로 말미암아 자기들끼리 ‘한몸’이 될만큼 서로 친교를 맺는다는 말씀들이다. 사도행전에 ‘친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친교는 함께 지내는 공생으로 실현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눔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2)디아코니아(봉사-섬김)의 공동체 -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실 무렵 세족으로써 섬김의 극적인 귀감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섬김의 표현일 뿐 아니라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요한복음 13장 14-15절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이고 상세히 묘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 앞서 본을 보여 줌으로써 참다운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고, 미래에 오실 재림의 주를 고대하면서 참다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면서 그러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공동체 성례전을 경험하였다.
Ⅶ.결 론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말씀선포와 성례(성만찬이 주된 예식)를 중심으로 변천해 왔다. 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성례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그 여파가 한국교회의 초대 선교사들을 통해서 그대로 전달되었다. 현재까지 한국교회는 강단 위의 말씀중심의 예배가 전적으로 이루어 지고있다. 이러한 불균형을 이룬 예배가 성도들로부터 참관자가 되게하므로 형식에 치우친 성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례를 통한 성도들의 영성개발은 감히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근래에 와서는 교회들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기준하여 형식적인면에서 많은 내용들을 성서적으로 바꾸고 과감히 실행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현상이다. 비록 카톨릭의 7성례에 비교하여 그들이 행하는 성례에 비하면 아직까지 개신교에서의 성례에 대한 깊은 인식과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카톨릭은 성례에 대한 관심이 우상숭배라고 지탄받을 만큼 깊숙히 내려져 있다. 이런 이유에서 카톨릭은 성례전에 대한 영성이 개신교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다.
성례전 그 자체가 영성이다. 성례전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예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앞서서 밝혔듯이 성례는 눈에 보이는 도구들(물, 떡, 포도주 등)을 사용하여 사람과 사람들 간의 행위이다. 하지만 여기에 성령의 임재가 있지 않고서는 단순히 관례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성례전 그 자체가 영성이므로 성례전을 바로 인식하고 균형을 잃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균형있게 바로 잡는다면 그동안 카톨릭에 뒤져있던 영성의 신학이 언젠가는 개신교에서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성례전을 바로 집례함으로 바른 영성을 소유할 수 있고, 메마른 세상 사람들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참 향기를 맛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Ⅷ.참고문헌
국내서적
1. 박근원. 「리마예식서」 서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1.
2. 유선호. 「예배갱신운동의 정체(I)」 서울:할렐루야서원, 1993.
3.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 1986.
4. 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서울:성광문화사, 1994.
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출판부, 1991.
번역서적
1. 로버트 앤 솨퍼, 「예배의식의 변천사」 김기곤 역, 서울:세종문화사, 1993.
2. Ilion T. Jones, 「복음적 예배의 이해」 정장복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8.
3. John Murray, 「기독교 세례론」 이길호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논 문
1. 김남철. “개혁교회의 세례의식에 관한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한신대학신학대학원, 1988.
2. 오자흥. “세례의 종요성과 그 適用.” 신학석사학위논문, 목원대학신학대학원, 1983.
3. 송종남. “성만찬의 현대적의미와 회복에 관한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 1990.
4. 신영춘. “성례전이 치유에 미치는 영향.” 치유선교학문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1993.
5. 최시영. “성만찬 예전 연구.” 신학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 1991.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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