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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 나라 잔치의 예시로서 성례전

김노섭-열린문 2007. 8. 30. 17:50

하나님 나라 잔치의 역사적 예시로서의 성례전 (은준관총장)

루터의 육적 현존 이해를 반박하고 루터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가기 위한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는 간단한 것이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희생된 몸과 피의 ‘징표’(sign)이다. 이 징표들은 바쳐진 몸과 피를 드러내고(signify)또 구원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나, 참으로가 아니라 신앙의 명상(contemplation)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성만찬에 임재한다"고 정의했다.100) 그러기에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되새기는 ‘기억의 축제’이고, 회중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신앙고백인 것이었다.

쯔빙글리와 그의 동료들이 제시하는 성만찬 신학 뿐 아니라 그들의 인격적이고 또 정치적인 도전은 루터를 괴롭혔으며, 드디어 루터는 그의 기독교론 이해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편재론’(Christis Ubiquity)을 가지고 반격하였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아버지 옆에 황금의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101) 그러나 1529년 Marburg Colloquy는 화해에까지 이끌지는 못했지만, 14개의 신앙조항과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제정으로 된 것과 이 몸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합의하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102)

그러나 종교개혁기의 성만찬신학은 제3의 해석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 졌던 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양식’(food)으로 올 수 있는가?"였다. 이 물음에 대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의 현존이 대답이었으며, 쯔빙글리는 ‘신앙’으로 기억하는 행위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제3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지역적으로 갈라져 있는 것들을 성령은 자유로히 연합하고 있으며, 이는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103)

여기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기억설’보다는 오히려 루터의 ‘현존설’에 더 가깝다고 본다. 그러나 루터가그리스도의 육적 현존을 주장하는 반면 칼빈은 성령의 매개를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주장함으로 다른 입장을 제시하였다.104) 이같은 세 가지 신학적 이해는 종교개혁운동을 여러 갈래로 나누는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C.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예시로서의 성만찬-성만찬신학을 향하여

중세기 종교개혁을 전후하여 발화되었던 성만찬 신학논쟁은 주로 성만찬의 신학이라기보다는 성만찬의 "요소"(element)인 떡과 포도주를 중심으로 쟁점화 되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 떡과 포도주는 변하지 않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육적 임재를 주장하는 ‘공존설’,떡과 포도주는 단 한번만 있었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을 상징할 뿐이라는 ‘기억설’ 혹은 ‘기념설’, 성령의 매개로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임재한다는 ‘영적 임재설’은 모두가 떡과 포도주를 중심소재로 펼친 신학들이었다.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성만찬 신학은 큰 변화 없이 자기들의 고백과 전통을 따라 더 보수화하거나 심화시켜간 것이 특징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1545-1563)를 계기로 화체설을 근간으로 하는 희생미사와 사제권한을 더욱 강화하였다. 루터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교회들(Reformed Churches)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설에 관한한 로마 가톨릭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정통주의에 반발하고 나섰던 경건주의 교회는 성만찬교리보다는 ‘뜨거운 경험’쪽으로 신앙의 초점을 옮겼다. ‘영국교회’(앵글리카니즘-Anglicanism)는 19세기 ‘트랙태리안 운동’(Tractarian Movement)(일명 Oxford movement)을 계기로 더욱 가톨릭화 하였다.105)

그러나 성만찬 신학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구체적으로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공식제정하고 발표한 ‘리마예전’(Lima Liturgy)을 계기로 일대변화를 맞이하였다. 1927년 ‘로잔’(Lausanne)회의, 1974년 ‘아크라’(Accra)회의, 1978년‘방골라’(Bangola)회의 그리고 1982년 ‘리마’(Lima)회의를 거치면서 세계교회협의회, 특히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수고로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일명 B.E.M.을 위한 최대 공약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50여년의 노고가 담겨있으며, 그 과정은 ‘경쟁’(competition) ‘공존’(co-existence) ‘협동’(co-operation) ‘헌신’(commitment) ‘컴뮤니온’(communion)의 진통을 거쳐온 것이었다.106)

이것은 2000년의 교회분열과 상처를 하나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전환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이고 혁명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산물인 B.E.M.문서와 리마예전은 세계교회의 미래를 향방짓는 신학적 영감이고 또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두고 20세기에 형성되고 있는 성만찬신학은 크게 네 범주로 분류될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범주는 ‘알렉산더 쉬메만’(Alexander Schmemann)에 의해 대변되는 정교회(0rhodox)의 성만찬 신학이다. 쉬메만의 성만찬 신학은 인간모두가 처음에 유카리스트(Eucharist)의 제사장들로 창조되었다는 창조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유카리스트의 제사장이란 세계를 하나sla께 봉헌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 봉헌에서 인간은 삶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인간은 제사장적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107) 이같은 쉬메만의 접근은 유카리스트를 교회의 예전으로만 국한하고 제사장을 성직자 혹은 사제로 특권화해 온 전통적인 틀을 떠나 삶과 창조와 세계가 곧 유카리스트의 ‘장’이 되고 제사장을 모든 인간의 주체로 옮겼다는 창조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제사장적 능력을 상실한 인간과 이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으며, 이는 지상의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joy). 여기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감사하는 교회의 행위인 것이다.108) 이같은 쉬메만의 접근은 유카리스트의 ‘장’(場)인 세계의 타락을 그리스도의 기쁨(하나님과의 기쁨)을 통해 새로운 유카리스트의 ‘장’(場)으로 변화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향한 새로운 기쁨의 여정을 뜻한다.

여기서부터 쉬메만은 ‘라투루기아’(Leitourgia)라는 신앙공동체의 예배를 접근한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오고있는 메시야를 대망하도록 세계를 준비시키기 위한 공동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신 하나님과 오고있는 그의 나라를 대망하도록 이 세계를 준비시키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만찬 예식은 ‘종교적 의전’이거나 ‘컬트’(cult)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성만찬(Eucharist)은 주님의 기쁨에 들어가는 교회의 ‘입장’(entrance)이라는 것이다.109)

여기서 쉬메만은 과감한 신학적 제언 하나를 서슴치 않는다. 성만찬예식(Eucharist)은 하나님 나라 차원에로 들어가는 교회의 행진(procession) 혹은 ‘여행’(journey)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에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삶의 궁극적 실재를 보게 하는 제 4차원(fourth dimention)에 들어간다는 뜻이다.110) 어떻게 ‘여행’(journey)이 가능한 것인가? 여행은 집을 떠난다는 의미이고, 모든 사회적 계급의식을 버리고 새 삶의 공동체에 모여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111)

그렇다면 4차원으로 여행하는 ‘유카리스트’와 교회의 예배예전(liturgy)은 어떤 관계에 놓이는 것인가? 쉬메만은 여기서 교회의 예배예전은 4차원에로 여행하는 기독자들-순례자들의 삶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행동화하고 또 과정화하는 공동의 행위라고 보는 듯 하다. 쉬베만의 약점은 이 관계를 암시하고 있을 뿐 분명히 밝히지 않는 데 있다.

정교회 예전은 첫째로 ‘장엄한 송영’(Solemn Doxology)에서 시작하며, 이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행의 선포이다. 두번째는 ‘입장’(Entrance)이며, 이는 제단으로 신자들이 모이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옛 것을 버리고 장차 올 새 세계를 향해 떠났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예전은 ‘말씀의 예전’이다. 말씀의 선포는 성례전적 행위이며, 여기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나라의 계시로 변화된다. 네번째 예전은 ‘성만찬예전’(Eucharistic Liturgy)이며,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우리의 삶과 이 세계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의미를 가진다. 삶 자체가 ‘유카리스트’(감사)이며,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찬양의 운동인 것이다. 여기서 ‘Anamnesis’(그리스도와 세계를 기억하는 일), ’Anaphora’(봉헌) ‘Epiclesis’(성령 임재), ’Sanctus’(거룩)’ Communion’(성만찬)의 모든 예전(liturgy)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의 구체적 행위라는 것이다.112)

정교회 성만찬신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쉬메만이 창조와 삶과 세계를 곧 ‘유카리스트’(Eucharist)의 장으로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임재한 하나님 나라를 진정한 ‘유카리스트’(기쁨)으로 보는 것은 성례전을 교회의 예식을 사제의 독점물로 보아오던 사상을 근본에서 바꾸어 놓는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성만찬을 떡과 포도주의 ‘요소’(element)의 문제로 보지않고 하나님 나라(제4차원)에로 여행하는 교회와 신자들의 진정한 삶의 순례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만찬을 종말론적 행위로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로서 평가된다. 그러나 쉬메만의 약점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계시적 차원에서 보지 않음으로 하나님 나라는 역사와 관계없는 미지의 세계로 신비화 시킨 데 있다. 그 결과 성만찬을 제4차원을 향해 인간이 여행하는 것 같은 마치 장망성을 떠나 낙원을 향해 한없이 걸어가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기독도 같은 인상을 남긴다. 이는 마치 인간이 천국을 향해 걸어 올라가고 또 거기에 들어가는 신비적인 여정처럼 성만찬을 신비주의화 하려는 약점을 가진다. 그러나 쉬메만의 성만찬신학의 공헌은 예전주의와 형식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와 삶과 세계를 ‘여정’,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연결하여 성만찬의 예전적 의미를 부여하려는데 있다.

20세기 성만찬신학의 두번째 범주는 로마 가톨릭신학자 헨리 노엔(Henri Nouwen)에 의하여 제창된 ‘부재(Absence)속의 현존’(Presence)의 성만찬 이해이다.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만찬 신학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엔의 독특한 종말론적 해석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노엔에 의하면 오늘의 교회, 사역, 성만찬 그리고 사회전반에 파고든 문제는 지나치게 ‘현존’(Presence)을 강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환자를 심방하고, 예배도 자주 드리며, 많은 성경공부에, 많은 파티에, 많은 게임으로 항시 삶과 신앙은 가득차 있어야 하는 것 같은 ‘현존’의 문화, 현존의 목회에 심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본다. ‘부재’(不在)의 차원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엔은 하나님의 계시의 신비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는 현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채(leaving)를 통하여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역설에 있으며, 우리의 신앙과 성만찬의 의미는 바로 이 현존과 부재의 신비에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113) 그리스도의 부재에서 그는 우리 존재의 중심에 함께 하심을 경험하며, 여기서 그를 기억하는 행위는 단순한 과거의 구원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위기와 고난중에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력의 기억인 것이다.114)

사역이란 우리의 부채(leaving)의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이며, 우리의 ‘부재’는 곧 하나님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물론 노엔에게 있어서 ‘현존’이 있은 후의 부재이며, 바로 이 부재속에 새로운 현존이 가능한 것이다.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부재(absence)를 슬퍼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부재안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뻐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직 재림하시지 않았지만(부재) 그러나 주님의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을 소망하는 순례에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부재안에서 그의 약속을 기억함으로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양육하고 지탱하시는 그의 현존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찬에 초대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며, 감격과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도 축하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부재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행위이며, 바로 이 기억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경험하고 축하하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115)

노엔의 성만찬신학은 종말론적 시간 이해에서 특히 ‘부재’와 ‘현존’의 역설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그리스도와 만나고(부재속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삶과 신앙이 양육되고 지탱되는 치유적 차원에서 노엔의 해석은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적어도 노엔은 ‘떡과 포도주’의 ‘요소’(element)를 중심으로 하는 논쟁이나, 그것을 신비화하려는 위험성을 훌륭히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엔의 성만찬 신학은 인간경험적, 치유적, 목회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사상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어 있는 것이 결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20세기 성만찬신학의 세번째 범주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45년간의 수고끝에 1982년 탄생시킨 ‘B.E.M.’(Baptism, Eucharist, Ministry)문서와 "리마 예식서"(Lima liturgy)를 포함하는 에큐메니컬 성례전 신학이다.116) 이 문서와 예식서는 또 다른 하나의 문서나 예배순서가 아니라 교회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한 교회로 향하는 일치의 기틀이고 대화합의 결실이라는 이유에서 이것은 2000년만의 기적이요,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 류맨’(John Reumann)은 B.E.M.문서가 공식적으로 채택되기까지의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만찬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강조해 온 정교회와 1960년대 당시의 ‘세속신학’의 영향이 그 하나이며, 20세기에 활발히 진행되어 온 ‘예전 회복운동’(Liturgical movement)이 또다른 요인이었다. 그리고 ‘휘셔’(Lukas Vischer), ‘라자렛’(William Lazareth) 같은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1982년 B.E.M.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 된다.117)

성만찬의 첫번째 의미인 ‘The Eucharist as Thanksgiving to the Father’(아버지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는 창조, 구원, 성화, 세계와 교회를 통하여 이미 이룩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과 앞으로 성취하실 미래를 인해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성만찬의 첫번째 의미인 것이다. 바로 찬양과 감사는 전창조를 대변하는 교회의 감사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며, 인간 수고의 결실인 떡과 포도주를 아버지께 믿음과 감사함으로 바치는 것이 성만찬이 라는 것이다.118)

성만찬의 두번째 의미인 ‘The Eucharist as Anamnesis or memorial of Christ’(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서의 성만찬)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 한번의 ‘희생’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기억하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는 그의 현존을 경험하는 일이며, 장차 임할 그의 재림을 미리 맛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는 중보기도와 종의 도를 따르는 우리의 결단으로 이어져야 한다.119)

성만찬의 세번째 의미인 ‘The Eucharist as Invocation of the Spirit’(성령의 임재를 기도함으로서의 성만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선포하는 일에 성령의 임재와 은사를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성령께서 성만찬을 (감사) 진정한 경험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120)

성만찬의 네번째 의미인 ‘The Eucharist as Communion of the Faithful’(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는 성령의 임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 교회의 감사와 찬양(아버지께 드리는)의 행위는 성도간의 교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되며, 나아가 이 세계와 역사와도 하나가 되는 경험에로 오게된다. 성만찬은 모든 사람들을(가난한 자, 감옥게 갇힌 자, 자유를 빼앗긴 자까지)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형제와 자매로 화해하는 사건인 것이다.121)

성만찬의 다섯번째 의미인 ‘The Eucharist as meal of the Kingdom’(하나님나라 식사로서의 성만찬)은 ‘종말론’ ‘선교’ ‘세계’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성만찬은 전 우주를 완성하시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비젼을 열어주며, 바로 하나님 통치의 징표들은 정의, 사랑과 평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성만찬을 통하여 역사의 징표들을 인해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하고 또 축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foretaste)행위이며,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로의 부르심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선교는 세상을 위한 중보의 기도이다.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교회의 사도적 여정과 순례를 위해 주어지는 양식인 것이다.122)

위에서 논의한 신학적 의미들을 담은 B.E.M.문서속의 성만찬 신학은 무엇보다 성만찬을 신학사상의 놀이로 전락시켜 온 2000년 역사의 과오와 실패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가장 창조적이고도 종합적인 패러다임 창조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떡과 포도주’의 ‘요소’(element)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삼위일체론적으로(아버지, 아들과 성령), 교회론적으로, 종말론적이며, 선교론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것은 일대 전환이었다. 그리고 교회분열의 소재였던 성만찬을 교회일치와 화합의 공감대로 전환시킨 것도 큰 공헌으로 남는다.

다만 한 가지 비판 겸 제언은 B.E.M.문서에 담겨있는 성만찬신학은 많은 교파의 전통과 신학적 유산을 존중한 나머지 한 가지 주제에로 연결시키지 못한 채 거대한 종합전시장 같은 신학체계가 되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교회연합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 류맨’이 논평한대로 ‘슈바이처’(Schweiter)가 통곡할 정도로 아쉬워 했다는 점은 "성만찬을하나님 나라의 잔치(식사)의 미리 맛봄이라고 하는 주제를 왜 5주제 중 맨처음에 놓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일 뿐 아니라 사실은 창조-구원-종말을 이어놓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를 실현해 가는 구조이고 ‘장’(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평위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사는 더 분명해지며, 나아가 교회의 선교적 사명도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B.E.M.문서의 신학은 구조상으로는 훌륭하나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종말로 이어지는 구원의 드라마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라는 성서적-구원사적 관점에서는 취약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만찬을 종말론적 순례를 위한 양식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종말론적 순례의 ‘장’(場)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 B.E.M.성만찬 신학은 역사성이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성만찬신학의 다섯번째 범주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주제를 극대화한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 웨인라이트는 지난날의 성만찬 신학이 저질러 온 근본적인 과오는 지나치게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의 문제에 집착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방법에 치우쳐 온 데 있다고 본다.123) 그 표현은 달랐으나 ‘화체설’, ‘공존설’, ‘기억설’, ‘영적 임재설’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사건이라는 과거에만 강조를 두고 성만찬을 해석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오는 시간성(특히 미래)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존재론적 접근은 공히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적 잔치’라든가 ‘마지막 날의 하나님 백성의 공동식사’124)라는 사상은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성만찬은 자연히 개인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몰아왔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예리한 분석이고 비판이다.

웨인라이트는 대안으로 성만찬의 ‘종말론적 해석’을 제시하며, 그것은 본질상 ‘성서적’이라고 본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최후 만찬’(복음서)이나 ‘주의 만찬’(바울) 모두가 예수의 다시오심의 차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종말론적 해석은 20세기에 부각된 성서신학자, 조직신학자들의 종말론 연구에 의하여 새롭게 조명되었다.125) 한 마디로 성만찬의 종말론적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십자가)을 기억하고(과거) 또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경험할 뿐아니라(현재) 완전한 하나님나라에서 펼쳐 질 메시야적 잔치를 대망하는 미래적 행위라는 것이다.126)

이렇듯 종말론적 관점에서 성만찬을 풀어가는 웨인라이트는 성만찬을 크게 네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그 첫째는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taste’이다. 여기서 ‘맛봄’이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육감’(physiological)과 ‘종교적 경험’(religious awareness)뿐아니라 ‘시적 가능성’(poetical potentialities)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본다.127) 두번째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징표’(sign)이다. 징표란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미이며, 의와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세번째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image)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시 (prefiguration)의 의미이다. 성만찬이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qualities)을 포착한다는 의미이다. 네번째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mystery)이다. 신비란 ‘드러난 것’과 ‘숨어있는 것’사이의 긴장이며, 성만찬의 신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과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의 하나님의 신비인 것이다.128)

웨인라이트의 성만찬신학이 가져온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성만찬을 존재론적으로만 해석해 온 지난날의 성만찬신학의 방법론을 근본에서 수정한데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인 ‘종말론적’해석을 대안으로 제시한데 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성만찬은 존재론적 해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만 초점을 두어왔던 존재론적 해석에 오고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차원을 투영함으로 성만찬을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성만찬을 지나치게 ‘교권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이었던 성만찬신학과 실천을 공동체적이고 미래적인 현재로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패러다임의 창출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웨인라이트의 종말론적 성만찬신학의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논의를 지나치게 ‘이미’(already)와 ‘아직은 아닌’(not yet)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는 데 있다. ‘이미’와 ‘아직은 아닌’의 구속사적 종말론의 약점은 ‘이미’와 ‘아직은 아닌’ 사이를 ‘중간기’(between Times)로 보고, 그 기간을 마치 교회시대, 성만찬 시대로 확대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129) 구속사적 종말론의 성만찬신학은 오히려 몰트만의 ‘역사-종말론적 해석’에 의하여 재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미래를 예견하며(anticipate) 이 소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축하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현재를 만든다…결국 주의 만찬은 역사의 종말론적인 ‘징표’(Sign)이다."130)

그러기에 역사-종말론에서 보는 성만찬은 단순한 ‘이미’가 아니라 ‘아직은 아닌’것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맛봄’(taste)이고, ‘징표’(sign)이고, ‘이미지’(image)이며, ‘신비’(mystery)(웨인라이트)가 아니라 성만찬은 죄로 이끌어가는 세상의 권력들로부터 회중을 자유케하며, 동시에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의를 실현하기 위해 열려있는 교제의 식사인 것이다.131) 역사변혁적인 의미의 성만찬신학이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바른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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