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교육협회(REA)의 창립배경과 취지에 대해서 쓰시오.
1) 종교교육협회의 창립목표선언문과 당시 상황에 비춰 본 의미
19세기 말에 주일학교의 교육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게 되었다. 훈련받지 못한 자원교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비전문적인 교육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도전과 불만은 결국 종교교육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단체를 형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3년에 종교교육협회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시카고대학의 총장인 윌리엄 R. 하퍼는 협회 창립에 산파역할을 하였고 코우의 연설 "교육에 의한 구원"은 종교교육협회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보스턴 집회에서 종교교육협회 창립목표선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첫째. 종교적 이상을 가지고 우리나라(미국)의 교육적인 힘을 고취시키기 위해
둘째. 교육적 이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종교적인 힘을 고취시키기 위해
셋째. 대중의 마음속에 종교교육의 이상을 보존하고 종교교육의 필요와 가치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기 위해
2) "우리나라(미국)의 교육적인 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REA가 말하는 교육이란 종교교육을 의미하는 것임을 암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교육은 종교를 보완해야 하며 또한 종교도 교육을 보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시 주일학교 교육이 '양육'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고 다만 종교교육의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REA의 교육적 힘에 대한 관심이 되었다.
코우는 "기독교교육의 주된 목적이 종교를 전수하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는가?"의 질문에서 지극히 설교적이면서 암기위주로 일관된 교육방법은 당시 훈련받지 못한 주일학교 교사들과 가정의 부모들의 주된 교육도구였으며, 교육의 표준처럼 되어왔다. 또한 주일학교의 전도와 회심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서 교육적인 힘은 가정과 주일학교, 사회에서 전도와 도덕교육 사이의 균형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REA는 주일학교가 좀더 높은 이상을 세워야 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REA가 제안하던 종교적 이상은 신앙부흥운동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선하며 성장을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도덕적 교육을 위한 양육의 신학적 토대인 자유주의신학(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원죄라는 이름 밑에서 온전히 도외시되고 감추어져 왔던 인간의 능력과 탐구의 정신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인데, 이는 당시 급작스런 회심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던 주일학교의 강조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2) 당시의 종교적 힘내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이었나?
당시의 종교적 힘이란 신앙부흥주의로 묘사될 수 있다. 신앙부흥주의는 칼뱅주의처럼 '인간 완전 타락설'을 채택했다. 메리 보이스도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했다고 봄. 신앙부흥주의자들은 인간이 회심을 경험하기까지는 악마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양육과 도덕교육, 그리고 종교가 지닌 사회성을 무시하게 된다. 이에 대해 부쉬넬은 신앙부흥주의자들의 회심에 대한 강조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강조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낳는다고 함. 따라서 REA의 교육적 이상은 신앙부흥주의적인 종교적인 힘/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일깨우고 고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REA가 추구했던 교육이론에는 듀이, 하퍼, 코우의 것이다. 이들은 진보주의 교육의 주창자 내지는 추종자들이며 과학적인 방법을 교육적 과정에 도입한 사람들이다. 진보주의 교육은,
첫째, 지배의 중심은 학습자에게 있지 교사에게 있지 않다.
둘째, 교육의 내용은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거한 사려 깊은 숙고를 통한 사회적 문제해결에 중심을 맞춘다.
셋째, 학습자는 학습과정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들이다.
넷째,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는 낙관적이다.
REA 의도는 당시에 지배하던 종교적인 힘을 진보주의 교육을 받아들임으로써 교정하고 실질적으로 돕고자 함에 있다.
3) 왜 REA가 대중의 마음에 종교교육의 이상을 보존하려고 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REA는 당시에 가톨릭주의와 유대주의를 따르는 회원들까지 포옹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 이유는 다양한 신앙관계를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중의 다양한 필요를 수용하려는 데 있었다. REA의 이런 정책은 신학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정신과 같은 것이다.
REA는 항상 사회를 향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회복음 운동가인 라우젠부쉬와 헤란의 영향과 부쉬넬의 종교교육의 사회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부쉬넬에게 있어서 가정은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 항상 양육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REA에 끼친 코우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룸은 코우에게 있어 "모든 교육은 사회적 교류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했고, 그의 교육목적은 "사회의 진보적인 재구성"이었다. 이 말은 곧 대중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사회 없는 교육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써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은 종교교육의 주체임과 동시에 주제가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REA의 목표는 "삶의 도를 가르침에 필요한 모든 힘과 기능과 형태 등을 활용하여 최고의 효율성 계발을 추구하는 의지와 양심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진정한 의를 좇는 것"이었다. 좁은 의미에서 REA의 목표는 "주일학교의 결점투성인 "방법과 철학"을 개선하는 것이었고,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소생" 시키는 것이었으며, "가정의 필요를 인지하는 가운데 종교교육 운동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REA의 목표달성을 위한 신학적이며 교육적인 줄기는 '자유신학'과 '진보교육'이었다. 다시 요약 정리해 보면, REA의 목표는 첫째, 도덕교육과 종교교육을 향상시키기 위함. 둘째, 주일학교의 신학적 또는 교육적인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 셋째, 과학과 과학적 발견에 대한 확신과 열린 마음을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종파주의적인 가치관과 지배를 넘어서서 공립학교 체계에 대한 소망을 갖기 위함이다.
3) REA와 REA의 목표선언문에 영향을 준 19세기 종교교육의 운동들과 이슈들
첫째이슈는 주일학교와 사회변화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이후 주일학교가 시민들의 학교가 되었을 때 사회의 세속화에 따른 엄청난 변화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들에 압력을 받아서 교과과정과 교육방법 등은 더욱 종파주의적으로 되었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은 뒷전이었다.
둘째 이슈는 주일학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주일학교는 '영혼 구원을 위한 기관'만을 추구했기 때문에(당시 전도 십자가군 운동에 귀속된 활동) '양육은 무시하였다. 따라서 부쉬넬은 주일학교 운동을 비판하였고, 종교교육에서 양육을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종교교육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절한 종교교육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REA(1903)이다.
주일학교는 어떻게 세속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대처했는가?
19세기 초에 주일학교는 끝을 모르고 성장하였다. 1824년에 주일학교는 "주일학교연맹"을 형성할 만큼 커졌다. 당시에 주일학교는 좁은 의미에서 였지만 종교교육과 읽기 쓰기와 같은 일반교육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청소년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영향을 끼치는 주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5일 동안 여는 보통학교가 등장했을 때 주일학교는 독점했던 교수직의 특권을 보통학교와 나눠야 했다. 결국 보통학교는 공립학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일학교는 근본주의 색체가 짙은 회심 중심의 교육으로 종파주의적 색체를 띠게 되었다. 공립학교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인 기독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종교적/도덕적 교육의 색채를 갖고 있었다.
1872년에 주일학교가 모든 연령과 학년을 위한 통일공과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 것을 REA(린과 라이트)는 반지성주의 예로 여긴다. 왜냐하면 학습자의 수학능력 차이나 자유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 종교교육자들의 기본 상식과 심리학적인 견해를 무시(학습과정이나 학습자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의미이다. 주일학교는 부흥운동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부흥운동의 중심메시지는 '회심'이었다. 19세기 대각성운동 핵심인 찰스 피니,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의 경험과 인간의 완전 타락 교리를 주장하였다. 한편 드와이트 무디와 빌리 선데이는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하면서 죄에 의한 파멸,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성령에 의한 갱생을 믿었다.
이처럼 주일학교 인도자들과 부흥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운데서 부쉬넬은 주일학교의 회심 일변도의 교육을 '타조식 양육'의 예로 들면서 당시 전도와 부흥에 눈이 어두워 양육의 책임을 소홀히 한 교회와 부모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가정의 역할(부모의 역할)과 유아세례를 강조했다. 요약해 보면, 주일학교와 교회의 지나친 회심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와 양육을 도외시하던 풍조가 결국 부쉬넬을 자극하여 기독교 양육이론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이론이 REA의 창립목표선언문을 형성케하는 이론적 배경과 동기가 되었다.
4) 20세기에 나타난 REA 목표의 연속과 반발, 그리고 수정
REA는 자신들의 목표가 달성되도록 시도했는가? 첫째,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이상으로. 둘째로, 자유신학과 진보교육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지속(연속)은 자유주의 연속학파로, 반동(반발)은 신학적-심리학적 개혁학파로, 수정은 비판적 개조학파로 나타나게 되었다.
가. 자유주의 연속학파
코우와 하퍼 그리고 코우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엘리옷과 같은 학자들은 REA의 목표를 지속시킨 사람이며, 자유신학과 진보주의 교육을 도입 내지 진척시켜 종교교육을 수행했던 학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천적인 확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했다. 특별히 코우는 종교교육의 목적을 '하나님의 민주주의'와 행복한 자기 실현을 향한 젊은이들의 성숙하고 효율적인 헌신이라고 했다.
나. 신학적-심리학적 개혁학파
REA의 목표에 반동해서 나타남. 당시 시대적 상황이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을 경험하여 사람들은 REA의 목표에 의구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곧 종교교육은 확고한 신학적 뿌리를 박아야 하며, 신학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절망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함. 제임스 스마트, 랜돌프 밀러, 쉘톤 스미스, 루이스 쉐릴이 이에 속한다.
스미스는 "Faith and Nurture"에서 종교교육의 신학부재 현상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였다. 스미스는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였고, 그는 비판은 하였지만 진보주의 교육을 버리지는 않았다. 쉐릴도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기독교교육을 위한 신학적 토대")하였다. 그의 신학은 폴 틸리히의 신학적 입장에 선 개혁신학이다. 그의 책 "Gift of Power"에서 신학과 교육간의 대화/교류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해 준다.
다. 비판적 개조학파
이 학파는 REA의 창립목표를 자신들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에 맞게 수정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시기적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로 볼 수 있으며, 혼돈과 다원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교육을 위해 정해진 신학이나 규정이 따로 없다. 다원주의와 탈현대주의가 판을 치는 세대에서 기독교교육마저 너무 광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진 나머지 기독교신앙의 정체성마저 희미해진다면 결국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기독교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웨스터호프와 넬슨은 사회화 이론 개발, 리틀과 오스머는 교회사역에서 교수의 질과 권위를 회복을 시도. 그룸과 프레이리, 무어와 케네디는 지구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들의 뿌리는 REA에 있으며 오늘날 신학은 지구적인 상황으로 넓혀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 종교교육협회의 창립목표선언문과 당시 상황에 비춰 본 의미
19세기 말에 주일학교의 교육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게 되었다. 훈련받지 못한 자원교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비전문적인 교육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도전과 불만은 결국 종교교육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단체를 형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3년에 종교교육협회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시카고대학의 총장인 윌리엄 R. 하퍼는 협회 창립에 산파역할을 하였고 코우의 연설 "교육에 의한 구원"은 종교교육협회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보스턴 집회에서 종교교육협회 창립목표선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첫째. 종교적 이상을 가지고 우리나라(미국)의 교육적인 힘을 고취시키기 위해
둘째. 교육적 이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종교적인 힘을 고취시키기 위해
셋째. 대중의 마음속에 종교교육의 이상을 보존하고 종교교육의 필요와 가치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기 위해
2) "우리나라(미국)의 교육적인 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REA가 말하는 교육이란 종교교육을 의미하는 것임을 암시적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교육은 종교를 보완해야 하며 또한 종교도 교육을 보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시 주일학교 교육이 '양육'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고 다만 종교교육의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REA의 교육적 힘에 대한 관심이 되었다.
코우는 "기독교교육의 주된 목적이 종교를 전수하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는가?"의 질문에서 지극히 설교적이면서 암기위주로 일관된 교육방법은 당시 훈련받지 못한 주일학교 교사들과 가정의 부모들의 주된 교육도구였으며, 교육의 표준처럼 되어왔다. 또한 주일학교의 전도와 회심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서 교육적인 힘은 가정과 주일학교, 사회에서 전도와 도덕교육 사이의 균형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REA는 주일학교가 좀더 높은 이상을 세워야 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REA가 제안하던 종교적 이상은 신앙부흥운동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선하며 성장을 위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적/도덕적 교육을 위한 양육의 신학적 토대인 자유주의신학(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원죄라는 이름 밑에서 온전히 도외시되고 감추어져 왔던 인간의 능력과 탐구의 정신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인데, 이는 당시 급작스런 회심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던 주일학교의 강조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2) 당시의 종교적 힘내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이었나?
당시의 종교적 힘이란 신앙부흥주의로 묘사될 수 있다. 신앙부흥주의는 칼뱅주의처럼 '인간 완전 타락설'을 채택했다. 메리 보이스도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했다고 봄. 신앙부흥주의자들은 인간이 회심을 경험하기까지는 악마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양육과 도덕교육, 그리고 종교가 지닌 사회성을 무시하게 된다. 이에 대해 부쉬넬은 신앙부흥주의자들의 회심에 대한 강조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강조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낳는다고 함. 따라서 REA의 교육적 이상은 신앙부흥주의적인 종교적인 힘/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일깨우고 고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REA가 추구했던 교육이론에는 듀이, 하퍼, 코우의 것이다. 이들은 진보주의 교육의 주창자 내지는 추종자들이며 과학적인 방법을 교육적 과정에 도입한 사람들이다. 진보주의 교육은,
첫째, 지배의 중심은 학습자에게 있지 교사에게 있지 않다.
둘째, 교육의 내용은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거한 사려 깊은 숙고를 통한 사회적 문제해결에 중심을 맞춘다.
셋째, 학습자는 학습과정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들이다.
넷째,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는 낙관적이다.
REA 의도는 당시에 지배하던 종교적인 힘을 진보주의 교육을 받아들임으로써 교정하고 실질적으로 돕고자 함에 있다.
3) 왜 REA가 대중의 마음에 종교교육의 이상을 보존하려고 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REA는 당시에 가톨릭주의와 유대주의를 따르는 회원들까지 포옹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 이유는 다양한 신앙관계를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대중의 다양한 필요를 수용하려는 데 있었다. REA의 이런 정책은 신학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정신과 같은 것이다.
REA는 항상 사회를 향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회복음 운동가인 라우젠부쉬와 헤란의 영향과 부쉬넬의 종교교육의 사회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부쉬넬에게 있어서 가정은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 항상 양육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REA에 끼친 코우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룸은 코우에게 있어 "모든 교육은 사회적 교류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했고, 그의 교육목적은 "사회의 진보적인 재구성"이었다. 이 말은 곧 대중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사회 없는 교육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써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은 종교교육의 주체임과 동시에 주제가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REA의 목표는 "삶의 도를 가르침에 필요한 모든 힘과 기능과 형태 등을 활용하여 최고의 효율성 계발을 추구하는 의지와 양심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진정한 의를 좇는 것"이었다. 좁은 의미에서 REA의 목표는 "주일학교의 결점투성인 "방법과 철학"을 개선하는 것이었고,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소생" 시키는 것이었으며, "가정의 필요를 인지하는 가운데 종교교육 운동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REA의 목표달성을 위한 신학적이며 교육적인 줄기는 '자유신학'과 '진보교육'이었다. 다시 요약 정리해 보면, REA의 목표는 첫째, 도덕교육과 종교교육을 향상시키기 위함. 둘째, 주일학교의 신학적 또는 교육적인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 셋째, 과학과 과학적 발견에 대한 확신과 열린 마음을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종파주의적인 가치관과 지배를 넘어서서 공립학교 체계에 대한 소망을 갖기 위함이다.
3) REA와 REA의 목표선언문에 영향을 준 19세기 종교교육의 운동들과 이슈들
첫째이슈는 주일학교와 사회변화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이후 주일학교가 시민들의 학교가 되었을 때 사회의 세속화에 따른 엄청난 변화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들에 압력을 받아서 교과과정과 교육방법 등은 더욱 종파주의적으로 되었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은 뒷전이었다.
둘째 이슈는 주일학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주일학교는 '영혼 구원을 위한 기관'만을 추구했기 때문에(당시 전도 십자가군 운동에 귀속된 활동) '양육은 무시하였다. 따라서 부쉬넬은 주일학교 운동을 비판하였고, 종교교육에서 양육을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종교교육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절한 종교교육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REA(1903)이다.
주일학교는 어떻게 세속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대처했는가?
19세기 초에 주일학교는 끝을 모르고 성장하였다. 1824년에 주일학교는 "주일학교연맹"을 형성할 만큼 커졌다. 당시에 주일학교는 좁은 의미에서 였지만 종교교육과 읽기 쓰기와 같은 일반교육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청소년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영향을 끼치는 주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5일 동안 여는 보통학교가 등장했을 때 주일학교는 독점했던 교수직의 특권을 보통학교와 나눠야 했다. 결국 보통학교는 공립학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일학교는 근본주의 색체가 짙은 회심 중심의 교육으로 종파주의적 색체를 띠게 되었다. 공립학교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인 기독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종교적/도덕적 교육의 색채를 갖고 있었다.
1872년에 주일학교가 모든 연령과 학년을 위한 통일공과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 것을 REA(린과 라이트)는 반지성주의 예로 여긴다. 왜냐하면 학습자의 수학능력 차이나 자유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 종교교육자들의 기본 상식과 심리학적인 견해를 무시(학습과정이나 학습자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의미이다. 주일학교는 부흥운동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부흥운동의 중심메시지는 '회심'이었다. 19세기 대각성운동 핵심인 찰스 피니,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의 경험과 인간의 완전 타락 교리를 주장하였다. 한편 드와이트 무디와 빌리 선데이는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하면서 죄에 의한 파멸,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성령에 의한 갱생을 믿었다.
이처럼 주일학교 인도자들과 부흥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운데서 부쉬넬은 주일학교의 회심 일변도의 교육을 '타조식 양육'의 예로 들면서 당시 전도와 부흥에 눈이 어두워 양육의 책임을 소홀히 한 교회와 부모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가정의 역할(부모의 역할)과 유아세례를 강조했다. 요약해 보면, 주일학교와 교회의 지나친 회심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와 양육을 도외시하던 풍조가 결국 부쉬넬을 자극하여 기독교 양육이론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이론이 REA의 창립목표선언문을 형성케하는 이론적 배경과 동기가 되었다.
4) 20세기에 나타난 REA 목표의 연속과 반발, 그리고 수정
REA는 자신들의 목표가 달성되도록 시도했는가? 첫째,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이상으로. 둘째로, 자유신학과 진보교육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지속(연속)은 자유주의 연속학파로, 반동(반발)은 신학적-심리학적 개혁학파로, 수정은 비판적 개조학파로 나타나게 되었다.
가. 자유주의 연속학파
코우와 하퍼 그리고 코우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엘리옷과 같은 학자들은 REA의 목표를 지속시킨 사람이며, 자유신학과 진보주의 교육을 도입 내지 진척시켜 종교교육을 수행했던 학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천적인 확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했다. 특별히 코우는 종교교육의 목적을 '하나님의 민주주의'와 행복한 자기 실현을 향한 젊은이들의 성숙하고 효율적인 헌신이라고 했다.
나. 신학적-심리학적 개혁학파
REA의 목표에 반동해서 나타남. 당시 시대적 상황이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을 경험하여 사람들은 REA의 목표에 의구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곧 종교교육은 확고한 신학적 뿌리를 박아야 하며, 신학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절망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함. 제임스 스마트, 랜돌프 밀러, 쉘톤 스미스, 루이스 쉐릴이 이에 속한다.
스미스는 "Faith and Nurture"에서 종교교육의 신학부재 현상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였다. 스미스는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였고, 그는 비판은 하였지만 진보주의 교육을 버리지는 않았다. 쉐릴도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기독교교육을 위한 신학적 토대")하였다. 그의 신학은 폴 틸리히의 신학적 입장에 선 개혁신학이다. 그의 책 "Gift of Power"에서 신학과 교육간의 대화/교류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해 준다.
다. 비판적 개조학파
이 학파는 REA의 창립목표를 자신들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에 맞게 수정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시기적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로 볼 수 있으며, 혼돈과 다원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종교교육을 위해 정해진 신학이나 규정이 따로 없다. 다원주의와 탈현대주의가 판을 치는 세대에서 기독교교육마저 너무 광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진 나머지 기독교신앙의 정체성마저 희미해진다면 결국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기독교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웨스터호프와 넬슨은 사회화 이론 개발, 리틀과 오스머는 교회사역에서 교수의 질과 권위를 회복을 시도. 그룸과 프레이리, 무어와 케네디는 지구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들의 뿌리는 REA에 있으며 오늘날 신학은 지구적인 상황으로 넓혀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출처 : 교회교육사
글쓴이 : 임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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