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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마스 선교사

김노섭-열린문 2017. 8. 2. 22:52




토마스 선교사         

Life School 이웃추가 | 2011. 2. 5. 0:50 
 
 
    

  때는 1866년, 병인 해였다. 그 해는 유달리 서양 열강들이 조선을 귀찮게 굴었다. 다사다난했던 대원군 집권 3년째인 병인년에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바로 종교적으로 혹세무민 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고 해서 새해 벽두부터 9명의 프랑스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이것을 계기로 복수의 칼을 품은 프랑스 함대가 9월에 강화도에 상륙,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만다. 이때부터 외세에 대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미국배가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다. 저 멀리서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의 위력으로 보아 대단한 무기임에 틀림이 없다. “저놈들,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었어.” “어떻게 할까요, 장군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놈들도 지난번 그놈들과 한 패거리인 게 틀림이 없다. 이곳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도록 불화살을 쏴라.”


  서양의 최신식 화포와 불화살의 대결은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가 유유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군인들은 작은 배에 장작을 싣고 불을 질러 그 배를 전소시켜 버렸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선원들 대부분이 불붙은 선박위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고 말았고, 목숨이라도 부지 하고자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은 생포되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몽둥이로 맞아 죽든지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배의 이름은 ‘제너럴셔먼 호’였다. 그러는 중에 한 사람이 강물에 뛰어든다. 조선 군인들은 곧장 그를 생포했다. 그때까지 그는 가슴 속에 성경책을 꼭 품고 있었다. 조선 군인들은 그런 그를 잡아 대동강 변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 중에서...

  그 사람의 목을 친 박춘권이란 사람의 말이다. 그런데 한낱 조선군인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으로 세세히 남아 있게 되었을까? 그의 목을 친 이 박춘권이란 사람이 훗날 예수님을 믿고 요즘의 장로님과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죽은 사람은 바로 제너럴셔면 호의 통역관으로 승선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이다. 1863년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로부터 2년뒤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조선에 꼭 가보고 싶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작은 목선을 타고 186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그러나 서울 쪽으로 내려오다 큰 풍랑을 만나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중국 땅에 머물게 된다.


  그러는 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더확고히 하고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자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이다.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2일,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그 순간 까지도 복음을 전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성도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읽고 함께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었다. 그 편지에는 처음 기나긴 항해 끝에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전했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아들에게서 온 편지에는 며느리가 풍토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한 편지를 읽을 때 아버지 목사님과 교인들은 가슴을 치며 함께 아파하고 무릎 꿇고 밤새 기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이라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나라에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써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조선으로 가기 위해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866.8.1)
 
  편지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아버지 토마스 목사님과 하노버교회의 교인들은 토마스가 어찌됐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고 연락은 끊어졌다. 그러던 중에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도착하긴 했는데 그곳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목이 잘려나간 아들의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성도들은 조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내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민족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27살의 나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평양 대동강 변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위에서 말한 박춘권 뿐 아니라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의 설립자가 되었고,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또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종이가 너무 좋다고 그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살에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했다. 3년뒤, 1866년 8월9일 제너럴셔먼 호에 동승하여,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대동강에서 27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출처 - 복음에 미치다


출처 : 인천LMTC 1619
글쓴이 : 박인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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