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선교

[스크랩] 토마스선교사, 박춘권, 박영식: 다 이루었다

김노섭-열린문 2017. 8. 2. 22:13
다 이루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1.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실 때에 자기를 죽이는 박춘권 병사에게 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토마스는 순교했지만, 그 박춘권은 후에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후에 박춘권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토마스)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토마스 목사전>)

2. 토마스 선교사 그가 중국에 도착한지 3년 사이에, 먼저는 그의 아내가 병으로 죽고, 그는 조선 땅에 선교하러 왔다가, 상륙하자마자 죽었습니다. 누가 보나,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그의 죽음은 헛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3.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4. 박춘권은, 나중에 예수를 믿고, 평안도 안주교회의 영수(오늘날의 안수집사 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비가 느껴집니다.

5.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건네 받은 성경을, 자기 집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박춘권의 조카가, 그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는 후에 중국 선양에 가서, 거기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한글로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6. 한 분의 삶과 죽음은 경제 논리나 수명 연한이나 현세적인 축복론으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최치량 이라는 당시 12세 소년이 그것을 받아서 박영식 이라는 당시 평양성 관리(영문 주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성경은 한문 성경이었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습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습니다. 도배를 하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몸을 이리 뒤척여도 성경, 저리 뒤척여도 성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8. 이렇게 성경을 도배했던 박영식의 집은 얼마 안 있어 널다리 교회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나중에 이름이 평양 장대현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정초에,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9. 몇년 후에, 조선이 개화되고, 평양에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들어옵니다. 그가 박영식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벽에 중국어 성경책이, 벽에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먼저 평양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10. 마펫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펫 선교사는, 평양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선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펫선교사는, 이기풍 목사를 길러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선교에 헌신하여 아내를 잃고 한국선교에 헌신하여 27살에 순교하였기에 세상은 그를 비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11. 우리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사건과 사고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그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역사의 흐름은 그분의 이야기 입니다. ( His Story) . 오늘 우리의 작은 헌신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 맺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순종하는 우리의 작은 섬김이 세상을 바꾸는 재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12.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과 척도가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의 가치와 기준과 척도는 아니어야 합니다.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후의 이야기  


1.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 교회에서 파송되었는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의 아버지였다. 하노버 교회는, 몇 달이 지난 후에,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하노버 교회는, 토마스를 죽인 조선 민족을 품고, 기도해 주게 된다.

2. 그 기도의 응답이,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가, 만주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1872~1910 중국사역) 그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얘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존 로스도 조선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3. 그러나 1866년 당시는, 조선이 굳게 꽉 닫혀 있던 시절이었다. 존 로스는, 심양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심양 남쪽 40킬로 지점에 <고려문>이 있었는데, 거기엔 조선인들이 중국에 무역하러 오던 고을이었다.

4. 존 로스 선교사도, 중국에서 사모를 잃었다. 그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다가, 소천한 것이다. 그래서 동병상련, 중국에서 아내를 잃은 토마스에게 더욱 관심이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존 로스의 여동생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자기 부인이 낳은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된다.

5. 이 여동생은,우리가 잘 아는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결혼하게 된다. 결국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매제지간이 된다. 그래서 심양 지역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만나서, 조선말을 배우며 전도를 했다. 이들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고, 중국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

6. 그들은 <4복음서>를 각각 당시 한국인이 통용하던 문자(한자어와 이두)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조선 땅에 널리 보급했다. 이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20년 전에, 그들의 길을 예비한 사역이었다.

7. 그리고 10년만에, 1875년에, 신약성경27권을 완역하게 된다.
토마스의 순교로, 감명을 받아, 1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을, 1875년에 비로소 이루었던 것이다.

8. 그리고 각권별 쪽복음이 앞서 출판되었는데, 그러니까 1866년 토마스의 순교 이후부터, <쪽복음 권별 성경>을 가지고, 압록강을 넘어서, 조선선교가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9. 이 시기에 백홍준(조선인으로 최초 장로)은 만주에서 성경책을 들고 들어올 때 (조선시대에도 사료를 읽어보면, 국경 검문이 아주 철저했다) 쪽복음을 한장씩 찢어서, 새끼를 꼬아서, 국경을 통과하고, 다시 새끼줄을 풀어서,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10. 그만큼 목숨을 건 역사였다. 천주교인이 1만명 가까이 죽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성경이 전해져 있었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황해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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