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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기홍 목사의 개척교회 성장 세미나

김노섭-열린문 2016. 1. 13. 17:52
 

김기홍 목사의 개척 교회 성장 세미나 


김기홍 목사

아름다운 교회 담임 목사


- 효과적인 설교법 -


- 믿음, 지도력의 향상과 함께 설교도 향상한다 -

강의하다보니 동역자들이 용기와 확신을 얻고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목회도 설교도 모두가 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다. 어떤 방법으로 건 마음에 그늘이 지거나 찌든다면 확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설교 이전에 삶 전체에 대한 확신과 긍지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주의 은혜로 내 마음이 지금 넘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때 설교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울러 목회 역시 힘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설교자의 확신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1. 설교자는 복음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어느 설교자나 다 믿음을 말한다. 안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스스로 마음 속을 들여다 보라. 주의 은혜로 인해서 참으로 평안한 마음이 되어 있는가? 그리고 삶이 너무도 신나고 행복한가? 자기의 원하는 대로 삶이 열리며 하나님이 말씀대로 돌보시고 능력을 주시는가? 성경의 내용대로 능력의 삶이 전개되고 있는가? 자신이 그런 상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확신 있게 말하겠는가!


설교연구의 단계

설교를 연구하다 처음에는 설교의내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라고 외쳤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이다. 또한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는 아무리 감동적이라도 복음적인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자나깨나 "복음적 설교"를 외치게 되었다. 복음제시가 설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지였다. 성경주해를 하더라도 거기서 복음을 반드시 발견해 말해야 한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주해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저 도덕강론이나 수필식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아무리 복음적이더라도 청중이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듣게 하자니 설교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했다. 감동적이어야 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듣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게 되었다. 설교작성도 그렇고 전달도 그러했다. 이것들이 없이 복음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설교작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논지가 하나여야 한다.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작성하려면 먼저 이 한 문장을 작성한 다음에 그것을 보고 다른 부분을 써야 한다. 그래야 설교가 끝난 다음에도 이 한 문장은 마음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은 반드시 복음이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일어나 가지가 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듯, 하나의 복음적 논지가 강한 설교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대지들은 물론이거니와 예화나 권고도 같은 색깔로 펼쳐져야 한다. 부분적으로는 전달이 잘 안되어도 결국에는 단 한 문장의 복음이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잊혀지지 않고 살아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발한다.


전달을 위해서 전달의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들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기술이 있다. 타고났건 습득한 것이건 설교자들은 반드시 전달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의 내용으로는 10%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 나머지 90%이상은 음성과 표정과 분위기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말의 내용이 "두려워 마세요"해도 음성이 떨고 있다면 듣는 이들은 음성을 믿지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듣고 난 뒤에 다른 소리하는 것은 왜 그럴까? 듣는 이들이 분위기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로는 다른 내용을 주었다해도 사람들은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분위기가 자기가 들은 내용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전달을 잘해도 설교자의 믿음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 즉 설교의 내용이 곧 자신이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한다는 확신 속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확신이다. 그것 없이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친 목회자들

목회자들은 마음이 짓눌린 상태이다. 교회는 부흥되지 않은 채로 여러 해가 지났다. 장로나 중직들은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한다. 설교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러 한계에 봉착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러면 습관화된다. 그리하여 아주 고갈된 마음으로 강단에 임하게 된다. 마음의 확신은 다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설교가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의욕이 넘치고 자신이 있다. 자연히 목회가 재미있다. 체질에 맞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해서도 핑크빛이다. 이런 분들은 확신을가지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적인 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상황이 좋기에 나오는 기고만장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확신이라도 있어야 산다.


만약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치자. 잘 극복이 되면 다행이다. 그러면 교회도 성장한다. 하지만 극복이 안 되고 시간이 지난다. 은혜스럽지 못한 일들이 반복해 일어난다. 그러면 어느 사이에 마음은 가라앉아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이제 마음이 그렇게 굳어 버린다. 그 목회자의 마음은 멍들고 병이 깊어진다. 패배 의식이 지배한다. 설교도 힘이 없다.


작은 교회로 오래 지내온 목회자들의 거의 대다수가 이런 상태라 볼 수 있다. 교인 중 누가 나 나가라하지 않을까? 내 욕하고 있지 않은가? 불만을 품고 있지 않나?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생각대로 모든 관점은 움직여 나간다. 교인들이 웃으면 나를 비웃는 것이요, 안 웃으면 역시 나를 비웃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행동강화라고 한다. 사무실 한 구석에서 직원들이 모여 담소한다. 웃으며 난리를 친다. "흠 저 친구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일단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의 행동은 그 생각을 강화시킨다. 너무도 화가 난다. 참다가 옆으로 지나가며 들어본다. 그러나 전혀 자기 말이 아니다. 그러면 "내 이야기 아니구나"하고는 "내가 괜히 오해했구만"할까?


천만에. "저것들이 어느새 알아차리고 주제를 바꿨구만"하고는 "다음에는 증거를 잡고 말테다"하고 생각한다. 일단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는 원리이다. 일단 열등감에 잡힌 사람은 남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다시 열등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렇게 한없이 진행한다.


목회자도 부정적 사고에 잡히기 쉽다. 예를 들어, "나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가면 큰 문제이다. "저 장로들은 나를 싫어한다. 내 편이 아니다." "내 설교를 싫어하는 교인들이 제법 있다." "내 아내가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교인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마음에 독을 뿌려 썩게 만든다. 어두운 마음으로 목회하게 한다.


이미 20여년 전의 일이다. 어떻게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대다수 그러니까 70% 이상 되는이들의 신학하게 된 이유가 동일하였다. 어느 날 주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다가 다른 길로 나간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주의 채찍이 무서워 신학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비참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하나님은 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분이다. 이러한 이해는 늘 그러한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든다. 목회의 길로 나섰어도 늘 채찍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교인들에게 설명하는 하나님도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대로 삶이 펼쳐진다. 이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분이다. 교인들은 복음적인 신앙을 접할 기회가없게 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자기의 한계보다 훨씬 자신을 약하게 본다. 해보지도 않고 자기는 은사가 없다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와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우리 자신밖에 남을게 무엇인가?


믿음으로 사고해야 한다

신자라면 모든 부정적인 사고는 일단 거부해야 한다. 몸이 약하다든지 병이 있다든지 말을 잘 못한다든지 성질이 나쁘다든지 의지가 약하다든지 나쁜 습관이 있다든지 그것이 무엇이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받아들이고 나면 그 굴레 얽매어서 삶을 살아야 한다. 주께서 성령을 부으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지 않으셨던가! 도대체 주의 말씀말고 무엇을 믿을까?


단번에 건강해진다든지 성질이 바뀐다든지 나쁜 습관이 고쳐지지는 않을지 모른다. 물론 믿음에 따라서는 당장 고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웬만한 좋은 습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반복함으로 만들어진다. 약한 몸도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 운동하면 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험은 다시 믿음을 더해주고 믿음은 강한 경험을 일으킨다.


목회자는 스스로가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은 물론이고 얻은 체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그 말씀이 미래에 더 나은 체험을 만들 것을 믿어야 한다. 여러 해를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으니 거기 해당되는 경험도 대단한 것이 쌓여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설교는 결국 사람의 신앙인격을 보여준다."


교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장로나 중직들에게 눌리면 대단히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게 되고 당당함이 사라진다. 이렇게 오래 지나다 보면 지도자로서의 풍모는 사라진다. 아무래도 그들은 내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면 다음 사역지가 막막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생각이 주의 종으로서의 마음 자세를 버리게 한다.


목회자는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으스대서도 안 된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주의 종의 긍지를 잃으면 큰일이다. 하나님이 뒤에서 종을 밀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치면 안 된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뭐가 두려울 것인가? 그래서 결국 목회나 설교나 다 믿음으로 이야기가 결론지어지게 된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 ."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에는 군대도 은행도 다 있다. 도움과 자금이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온다. 왕이고 제사장이라면 지배해야 한다. 지배를 당할 수 없다. 물론 이 지배는 예수처럼 하는 사랑의 지배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바꾸는 엄청난 능력이다.


장로나 중직이나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보자. 사랑하는 힘을 달라 기도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졌다 하지 않는가.(롬5:5) 그러면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는 세상이 가지지 않는 주의 사랑을 가진 존재이다. 사랑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원수를 무조건 사랑해 보라.


주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고 했다. 신자라면 이처럼 해볼 수 있다. 목사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을 이렇게 먹으면 참으로 편안해진다. 그러나 다른 여러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목자에서 품꾼의 위치로 전락한다. 모든 게 마음대로 안될 것이다.


설교도 그렇다. 이 설교를 듣고 변해질 사람들을 기대하며 작성해야 한다. 설교 비판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작성하는 것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들의 비판을 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영감을 막는다. 인위적 설교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면 설교 만들기도 대단히 힘든다. 자신도 없다. 이 설교로 변해지고 나아지고 하나님 닮아갈 것을 믿으면서 써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엄청난 일이다. 그 일을 통해 변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도 믿기만 하면 그들처럼 살 수 있음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양들이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능력 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요 목회다.


2. 어떻게 본문에서 영감을 얻을까?

두 종류의 신자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힘으로 신자 노릇하는 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 자기 힘으로 하는 신자 노릇은 너무도 힘든 것이다. 늘 얼굴이나 행동이나 짓눌린 사람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있다. 율법적인 삶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은 대단히 신나고 능력이 넘친다. 얼굴은 평안하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


대다수는 첫 번 부류에 속한다. 믿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 오래 믿을수록 마음은 메말라지고 신앙은 형식만 남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다. 세상 수준에서 보면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덕을 가르치고 권장해야 한다. 그런데도 주는 저주하신다. 자기 힘으로 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이 구원의 수준이 못되지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 힘으로 사는 신자는 날마다 새로워짐을 경험한다. 날마다 승리하며 감사한다. 멋지게 신나게 능력 있게 산다. 그런데도 그 힘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런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다. 성경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능력으로 살았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가? 사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은 소식이 어렵던가? 한참 생각하고 기도해야 그 내용을 아는가? 그 소식은 말한다. 하나님 곧 성령을 모셔들여라. 그러면 그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된다. 그렇게 했는가? 그러면 그의 모든 것이 내 속에 들어왔다고 믿으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도록 연습하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생각해 보자. 그러면 미국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미국법으로 보호받고 산다. 거기 가서도 한국식으로 행동한다면 오히려 힘들 것이다. 신자는 하늘나라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율법이나 도덕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 내가 착한 일을 한 만큼 복 받는 게 아니다. 하늘나라 식은 복을 다 준 다음에 그 복을 누리며 살라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마음으로 느끼는 연습을 해 보라. 육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열라. 그리고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라. 예수께서 왕관을 들고 오신다. 내 머리에 씌어주시며 말하신다. "너는 이제 세상 사람과는 다른 존재이다. 세상의 왕이요 세상의 신이다. 내가 네 속에서 모든 힘을 공급할테니 그렇게살라." 날마다 시간 나면 이러한 장면을 상상해 보라. 공상이 아니라 영적인 현실이다.


영적 현실은 성경대로 생각하면 경험된다. 그동안 상하고 찢긴 마음을 이러한 명상으로 깨끗하게 하라.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왕의 권한을 다시 찾도록 하라. 미국에 가서 미국 사람으로 살려면 많은 연습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늘 백성으로 특권을 누리는 일도 그렇다. 평생 가지고 살았던 노예의 생각을 버리라. 하나님이 옆에 계심을 느껴라. 그가 힘을 공급하심을 느껴라. 성경대로 느껴라.


성경을 복음적으로 읽는 시도를 하라. 편안히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라. 선입관을 버리라.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중지하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수천년 간이나 받아 내려온 정통적인 신앙의 지식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계시를 구하지 말라.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원리를 벗어나지 말라. 성경의 내용만이 영적 세상을 바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내용을 믿음으로 받으라.


신학교에서 배운 정통교리를 벗어나지 말라. 정통교리는 마치 뼈대와 같아서 우리의 신앙을 세워준다. 이 글을 조금 더 읽으면 그 원리들이 설명되어 있다. 우리 개신교의 신앙원리이며 동시에 종교개혁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톨릭이나 이단들과 다른 복음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행위로 구원을 얻게 하는 교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들을 머리로 외우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한다. 가능하면 복음적으로 그 지식들을 해석하라.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신다. 동시에 믿음도 주신다. 그래서 기쁨 속에 능력을 발휘하게 하신다. 이것이 구원의 지혜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지혜 속에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예수를 만나듯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면서 성경의 본문을 대하라. 그러면 마음 속 깊은데서 반응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뜻을 모르면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 단지 성령을 철저하게 의지하라. 그가 인도하시고 그가 상황도 만드신다. 그는 우리를 돌보신다. 그 성령께서 적절한 순간에 알려주신다.


성령이 깨닫게 하심은 순간적인 일이다. 단지 내 자신의 믿음이 준비되지 않아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의 일은 애써서 되는 게 아니다. 영은 육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녀의 심정을 가지고 편안히 말씀을 대하라. 그래서 즉각적인 깨달음을 구하라.


마치 양심의 소리가 솟구치는 것과 같다. 양심이야말로 영혼의 음성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이다. 물론 양심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구원의 지식에 근거해서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의 지식과 다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조금만 훈련을 하면 영의 감동을 늘 경험하게 된다. 영생의 감격과 감사는 영적인 것이지 머리로 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가장 깊은 영의 차원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장래에 대한 주의 인도하심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복음적인 깨달음과 확신은 더욱 영적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우리 영과 하나가 되어 말씀해 주신다. 이것이 세상사람들과 신자를 구별해준다. 세상 사람들은 죽은 영 밖에 없다. 그런데도 잠재의식이니 암시니 하면서 영혼의 힘을 사용하려고 한다. 우리 신자들의 영은 살았다. 영생을 가진 것이다. 동시에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연합해서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이 엄청난 존재임을 믿어야 한다. 세파에 눌리고 가난과 병과 핍박에 시달려 작아진 영이 아니다. 작아진 것은 우리 마음일 뿐이다.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라.(롬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자. 그러려면 복음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속에 위대한 영이 성령과 함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나 생각이나 행동을 도우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하며 자녀의 능력 속에 성장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복음의 지식을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성령은 그것을 깨닫고 믿게 하신다.


그 모든 게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부어진다. 아니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온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이 깨달아진다.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복음의 이해이다. 그 힘으로 우리는 부활의 목표까지 달려나간다. 감사하지 않은가.


3. 복음적 설교는 어떻게 설교를 작성할까?

한 문장으로 하라

그리고 모든 내용을 여기 연관 시키라


설교학 강의를 들으러 온 목사님들에게 필자가 언제나 요구하는 말이 있다. "지난주에 한 설교를 한 문장으로 말해 보시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기껏 말한다는 게 이런 식이다. "'사랑에 관해서' 했습니다." "'전도에대해서' 말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외쳤습니다."


"...에 관해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래야내용도 거기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교 전체는 확실한 통일성을 지닌다. 문장이 되지 않으면 내용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문장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간단 명료해서 표어처럼 나온다면 아주 훌륭하다. 그래야만 설교가 기억된다.


설교가 기억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도 있을 수 없다. 그냥 가슴 뭉클한 종교심만 일으키려고 설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한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영혼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심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가슴에 남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도 남아있게 된다.


신학과정 중 설교의 사표가 한 분이 계셨다. 타계하신 김이태 목사이셨다. 그분의 설교는 듣기도 좋았지만 내용이 오래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다. "설교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한 문장으로 써 놓으시오." 이 한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설교 쓸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확실해진 다음 대지들을 여기 맞추어 작성해야 한다.


설교의 모든 내용이 다 이 한 문장을 받치게 해야 한다. 예화건, 인용이건, 성경구절이건 모두 이 한 문장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기억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 한 문장을 논지라고 한다. 주제라던가, 아이디어라든가 하는 말은 논지의 이전 단계이다.


설교뿐 아니고 논문이나 글이나 강의나 반드시 논지가 있게 마련이다. 논지 없는 설교나 글은 방향 없이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설교나 글은 논지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 논지가 강력하다면 내용은 너무도 쉽게 만들어진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시다." 이 한 문장을 쓰고 설교의 내용을 작성한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가 세상의 빛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나온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제목: 예수는 세상의 빛

본문: 요 1:1-10

논지: 세상의 빛 예수는 영접한 사람 속을 비추고 있다


1. 생명의 빛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얻었다.

2. 계시의 빛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계시를 얻었다.

3. 자연의 빛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세상을 비칠 수 있다.


논지 훈련을 좀 더 해보자. 논지는 논문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어떤 글이건 어떤 설교이건 반드시 논지가 필요하다. 그 논지를 증명하는 것이 설교의 전체 내용이다. 그러므로 모든 글이나 설교나 다 논지와 증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적 논지와 감동적인 증명이 설교의 전부이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논지를 증명해 보자.

논지: 새벽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다.

1) 첫 시간에 하나님과 대화한다.

2) 첫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

3) 첫 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결론: 고로 새벽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힘을 준다.


이런 식으로 논지를 쓰고 요지를 써 나간다면 절대로 설교가 옆으로 흐른다든지 통일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논지는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논리 훈련이 안된 사람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논지가 좋으면 내용도 좋아진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지는 진리 중에 진리이다. 하지만 예수를 수십 년 믿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들을만한 말은 아니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무도 뻔한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논지가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항상 논지를 쓴 뒤에 물어보자. 뻔하지 않은가?


예수 믿는 게 무엇인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게 무엇인지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남들이 말하는 내용보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관심을 일으킬 수 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짊어진 것을 믿으면 죄로부터 오는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예수의 생명을 의지하면 영원히 산다." 평범한 논지를 조금 더 설명하면 된다.


첫째로, 논지는 범위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게 된다. 애매하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설교 논지는 설교자의 마음을 꿰뚫는 선명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설교 논지는 반드시 인간의 삶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 용기와 두려움, 고통, 외로움, 약함, 병, 기쁨, 후회, 사랑, 희망등등이다. 이 설교를 듣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나의 삶과 무슨 상관있는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논지가 복음의 한 면을 말하고 있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해야 한다. 안 그러면 그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교훈으로 설교가 만들어질 것이다. 주위에서 그러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왔다.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언제고 영혼이 변화할 때는 반드시 복음이 들려졌다. 사람이 복음을 듣지 않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다. 악한 습관을 버리고 선한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적인 변화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논지를 쓴 다음 질문을 던져 보라.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무엇을 말하는가?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변화를 주고 힘을 준다면 훌륭한 논지이다. 하지만 그 논지가 지금 설교하려는 사람의 삶에 힘도 변화도 주지 못했다면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논지의 예를 몇 개 들어 보자.


1. 창 37:5-11 "위대한 꿈" (참조 행 2:17)

논지: 위대한 꿈은 하나님 자녀에게 다 주어졌다.

이 꿈을 찾아서 유지하는 이는

1) 언제나 아름다운 꿈을 꾼다.

2)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3) 유혹에서도 넘어지지 않는다.

4) 다른 사람에게도 꿈을 나누고 해석해준다.

5) 하나님께서 주셨기 그 꿈을 이루신다.


2. 요 19:28-30 "다 이루었다"

논지: 주 "다 이루었다"는 우리 구원의 완성을 선포한다.

1) 구원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었다.

2) 형벌의 지불이 다 이루었다.

3) 의와 능력의 수여가 다 이루었다.

4) 장래 문제해결까지 다 이루었다.


3. 롬 3:23-26 "그리스도의 피"

논지: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확실한 증거이다.

1) 내게 주어진 죄용서의 표이다.

2)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표이다.

3) 내게 주어진 생명의 표이다.

4) 내게 주어진 능력의 표이다.


4. 요 15:5 "불멸의 지체"

논지: 불멸의 지체는 주와 한 몸된 나요 교회이다.

1) 그리스도가 돌보신다.

2) 그리스도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다.

3)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다.

4) 그리스도처럼 절대로 망하지 않고 불멸한다.


오늘날 설교는 행동할 것부터 강조한다. 행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믿기에 행동하라는 게 아니다. 행동하면 그런 존재가 되리라는 것이다. 선행 많이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아니다. 반대이다. 예수를 영접해서 복을 받았기에 그 힘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받은 복을 적용해서 경험하는 게 신앙생활이다.


복음적인 설교는 복된 소식의 내용을 주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그 다음으로 거기에 해당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쳐 준다. 즉 1) 믿을 내용, 2) 그 내용을 믿은 사람의 변화, 3) 그리고 변화된사람이 살 수 있는 능력의 삶등을 설교에 포함 시켜야만 할 것이다.


4. 율법적 설교를 복음적으로

여기 율법적 설교를 복음적으로 바꾸는 예를 든다. 그 차이를 잘 생각해 보라. 복음적으로 설교하다보면 우선 설교자의 삶이 그렇게 된다. 교인들의 삶도 그렇게 바뀐다. 교회는 차츰 활기를 얻어가고 분위기는 생기가 넘치게 된다. 그러면서 설교자의 설교와 삶은 더욱 더 복음적으로 되어 간다. 교회와 교인들은 하늘의 힘으로 강하게 성장하여 많은 일을 한다.


율법적인 설교란 하라고 말하거나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설교 듣는 사람의 개인적인 힘으로 그 요구 사항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장차 복을 받는다는 약속도 준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라는 명령만 준다면 다시 무거운 짐만 얹어주는 셈이 되고 만다. 또한 복은 언제나 현재가 아닌 미래의 약속으로만 남게 된다.


<설교수정 1>


엡 4:1-8 평화로운 교회

분쟁과 불화, 그리고 다툼이 가득한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도 어렵고 위대한 인물을 키워낼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기 이해 노력하고 힘쓰는 곳입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에, 필요하시기 때문에,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일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삽시다.


2. 사랑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했습니다. 겸손, 온유, 인내가 솟아나는 샘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부드럽고 참아줍니다. 사랑은 그윽한 눈빛과 온유한 소리로 주고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떠나면 행동이 거칠어질 뿐 아니라 언어도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사랑의 최고 공식은 주는 것이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랑했습니다만 더욱 사랑합시다.


3.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것입니다.

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이치를 교회론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교회가 하나되는 중요한 조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의 매는 줄"이라는 말과 "성령에 의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될 때 평안과 평화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다투는 자"입니다. 싸우고 싶게 만들고 뭔가 불평스럽게 만듭니다. 세계 평화를 말하고 남북통일을 말하고 교회평화를 말하려면 내가 먼저 자신의 언어를 희생하고 자신의 의견을 희생할 줄 아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 흔히 보는 율법적인 강해설교이다. 그냥 본문의 의미를 문장의 뜻만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명령을 줄 때는 에베소의 앞부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언급한 다음에 그 힘을 의지하고 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 곧 복음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행할 일만 말한다. "부름에 합당하게"행하기 싫고 "사랑"하지 않고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싫은 신자가 어디 있는가? 하고 싶지만 할 힘이 없는 게 오늘날 신자들의 현실이다. 그 내용대로 할 수 있도록 설명하면서 하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바울의 의도가 전달되는 것이다.


본문 처음에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그 앞의 내용과 연결되었다는 말이다. 즉 3:20의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를 의지하고 말해야 한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 말씀대로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가 내 안에 계심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요지만 복음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얼핏보면 아무 차이가 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있다고 믿는 것과 순전히 내 힘으로 의를 행하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이 계심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평화로운 교회

평화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 하신다. 이 사실을 믿고 나아올 때 평화로운 교회는 시작된다.


1. 평화의 능력을 주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2. 사랑의 능력을 주신 그 부름대로 사랑하라

3. 하나되는 능력을 주신대로 힘써 지키라.


<설교수정 2>


시 119:161-168 마음의 평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평안, 참 평안입니다. 이사야 9:6에 보면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과 갈등을 깨고 샬롬을 만드셨습니다.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만이 참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평안 큰 평안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1.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163절을 보면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7:21을 보면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겐 평강이 없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고 삶이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죄짓고 악을 행함으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행복입니다.


2.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66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라고 했고 167에서는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8절에서는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은혜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받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이 있다면 평안이 있느냐 없느냐인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겸손해집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166절에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다"고 했고 큰 평안을 입은 자에게는 "장애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45:7을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빛도 어두움도 평안도 환난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관하십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도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법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11을 보면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내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어떤 장애물이 일을 가로막을지 예견도 예측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물으라. 내게 부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평안 큰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평> 율법적인 설교란 할 일을 말해주지만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또한 할 수 있도록 해준다해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인간적인 힘으로 하도록 말한다.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냄새만 풍기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것을 그냥 선물로 준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소망이다.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았으며 성령과 함께 하늘의 모든 보화가 내게 주어졌음을 믿으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복음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는가. 내 속에 주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그리고 그대로 움직이라. 그러면 복음적인 삶이 진행된다.


여기 있는 모든 내용들이 다 신자로서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냥 하라고만 한다면 십계명을 주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지를 설명하면서 계명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더 큰 부담만 설교를 통해서 주게 된다. 죄를 멀리해야 하는데 멀리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은혜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다 잘 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안 일어나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대답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인지 이 문제들에게 관해 물어 보라. 그러면 제대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 대답을 찾아 적용시켜주는 것이 설교자의 할 일이다. 이렇게 고쳐보면 나을 것이다. 물론 본문을 읽어보면 내용이 여기의 대지와는 다른 내용이 많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에 실린 대지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정해 보도록 하는 것이 훈련상 좋겠다. 그리고 더 나은 대답도 찾아보도록 하라. 요지만 적으면 이러하다. 여기의 요점은 이것이다. 복음적인 설교는 우리가 노력해서 앞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의지해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시 119:161-168 마음의 평안

이 시의 저자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누가 하나님을 그처럼 경외하고 누가 그처럼 성령을 받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그것을 받아 참평안을 소유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사람보다 백 배는 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백 배나 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 자체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 사실을 알고 믿고 누리자.


1. 내 안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죄를 멀리한다

2. 내 안의 그리스도를 인해서 모든 복을 다 소유했다

3. 내 안에 부어진 사랑으로 하나님을 늘 사랑한다.


연설가로서 레이건의 비결

폴 에릭슨(Paul D. Erickson)은 Reagan Speaks: The Making of an American Myth에서 GE의 강사로 전국을 순회하던 시절, 레이건은 공장노동자들과 민간협회, 사업자 단체에서 최소한 4천 시간 동안을 연설했다고 추산했다. 8년 동안 계속해서 일주일 평균 10시간씩 연단에 섰던 셈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연설회수로 따져서 그에게 필적할 수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8년 간의 주지사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1981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에 그는 연설가로서 필요한 모든 비결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연설 비결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심하게 준비하라: 가장 편안하고 가장 효과적인 연설일수록 세심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서두르다 보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윈스턴 처칠은 젊은 시절에 의회 첫 연설을 즉흥적으로 하려다가 일찌감치 이런 교훈을 배웠다. 단순히 횡설수설 정도가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후로 처칠은 많은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원고를 쓰고 고치고 한 뒤에야 비로소 연설을 했다. 시간이 금쪽 같았던 이차대전 때에도 처칠은 연설 원고를 준비하면 리허설 하는 데에만 열 두 시간을 투자했다.


대통령시절, 집필자들이 보통 3-4일 전에 원고를 제출하면 그는 꼼꼼히 뜯어보며 원고를 수정했다. 집필단에 되돌아온 원고는 보통 흘려 쓴 글씨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도 빽빽이 채워져 있었고 원고를 새로 시작해야 했다. 최종원고가 완성되면 다시 연설 전에 이것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강조할 단어 쉴 곳에는 표시를 했다. 연설을 할 때쯤이 되면 원고를 거의 완벽하게 외울 정도였고 어떻게 노래하듯이 대사를 풀어나갈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간단하게 하라: 레이건이 참모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목사가 교회에 부임해 첫 설교를 했다. 신도석에는 한 사람만 있었다. "제가 뭘 잘못 했나요?" 목사가 묻자 "잘 모르겠어요." 신도가 대답한다. "전 그저 소를 모는 목동일 뿐입니다. 들에 나갔더니 소가 한 마리밖에 없더라도 풀은 뜯길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목사는 연단에 올라가 열띤 설교를 하고 또 했다. 설교가 끝나자 다시 목사가 물었다.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목동이 대답했다. "들에 가나서 소가 한 마리밖에 없다고 모든 풀을 다 먹여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설교에서는 한 가지만 말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도 쉽고 단순하게 전해야 한다. 많은 것을 주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레이건은 짧고 간단히 말했다. 연설은 20분이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청중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고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게티스버그에서 유명한 웅변가 에드워드 에버릿은 한 시간이 넘도록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연설을 했지만 곧 잊혀지고 말았다. 반면 링컨의 연설은 딱 세 구절뿐이었다.


활기를 잃지 말라: 연설은 논리적 구조 이상의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청중의 기분을 고취시킬 수 있는 것 즉 에토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연설은 리듬이 있어야 한다. 스토리와 깜짝 놀랄 내용,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유며, 이 모든 것들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청중들은 몰입을 하고 편안하게 그 내용을 받아들인다. 레이건은 그러한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중의 심장을 울려주었다.


편한 말을 사용하라: 역사적으로 서구세계의 정치적인 웅변가들은 전통적으로 양식화된 연설을 선호한다. 키케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전통을 차용하려고 한다. 거기에 자신들만의 경구를 삽입하고 때로는 인상 깊은 연설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창고가 되어야 한다"등등의 대사는 역사에 남는다. 그러나 레이건은 인용할 만한 말이 없다. 그는 역사책을 위해 연설하지 않았다. 오로지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청중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을 찾아라: 레이건은 구체성이야말로 신뢰성의 영혼이라고 믿었다. 세심한 선택과 가지를 친 사실들은 연설자가 스스로 무슨 말하는 지 알고 있음을 증명한다. 비범한 사례는 연설을 성공으로 이끈다. 자기 연설을 들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화제로 돌릴 수 있는 사실이나 예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81년 연설이다. "몇 주일 전에 1조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당신 수중에 있는 천 달러 짜리 지폐를 쌓아서 10센티미터가 조금 넘으면 당신은 백만장자입니다. 1조 달러는 이렇게 천 달러 짜리 지폐를 쌓아서 그 높이 백 킬로미터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소품을 사용하라: 레이건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여러 가지 소품과 그래픽을 동원했다. 이런 것들은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연설자와 같은 호흡을 유지시켜 주는 또 다른 장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품이 간단하면서도 도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984년 연두기자회견을 할 때는 세목과 규제에 관한 서류들을 거의 들 수도 없을 만큼 한 무더기를 갖고 국회의사당으로 올라갔다. 국민에게 세금 관련법들이 얼마나 복잡해졌으며 개혁이 왜 필요한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국민은 그의 요지를 이해했다.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라: 낙관주의, 이것은 바로 레이건이었으며 연설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했던 삶의 방식이었다. 챌린저호 폭발사건 직후 레이건은 오히려 연설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키겠습니까?" "개척자들은 늘 그처럼 미지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더 없이 큰 충격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런 불행이 발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아이들에게 개척자들의 삶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납득시켜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비판을 예측하라: 레이건은 자신의 보수주의적인 관점이 논란의 여지가 많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신공격성 발언에 대해 매우 약했다. 반대진영 두 명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을 퍼붓자, "개새끼들"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왔고 그는 이성을 잃고 대회장을 뛰쳐나가 버렸다. 언론은 강한 어조로 이에 대해 비난했다. 레이건은 그때의 일을 "개인 인격 모독하는 공격을 받아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공개석상에서 그런 공격을 받아넘기기 위해 그는 주로 두 가지의 장치를 사용했다. 정책 논쟁에 관해서는 과감하게 맞서는 한편, 정적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적들이 거친 말로 공격해도 정중한 태도로 응대하고 가능하면 유머로 받아쳤던 것이다. 이것은 아이젠하워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늘 정적들과 "진창에서" 구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인신공격 너머에 머묾으로써 자신에 대한 평판을 지키고 정적들이 자신에게 보다 예의 있는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레이건의 또 다른 무기는 예측이었다. 뭔가 제안을 내놓을 때면 정적들이 어떤 비판을 할 것인지를 미리 예측하여 자신의 청중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했고 비난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대응을 했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완전 허튼 소리를 한다는 비난을 들게 될 것입니다. 그 친국들은 내가 여러분의 할머니를 굶겨 죽일 거라고 비난을 할테죠. 그렇지만 왜 그게 말도 안 되는 비난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리 면역성을 심어주고 논쟁에 있어서 상대보다 앞서서 높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미를 장식할 말을 준비하라: 나이가 나이였던 터라 집권 말기로 갈수록 레이건은 연설이 종반에 이르면 방향을 잃고 청중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전성기 시절 레이건의 연설에는 항상 "종결어구"가 있었다. 가슴에 와 닿은 단어. 눈시울을 적시는 이야기. 메시지를 화려하게 꾸며주는 인용구. 이것들은 바로 그의 전공분야였다. 전직 배우로서 그는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로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거겐 저, CEO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Eyewitness to Power) 중에서

출처 : 성남노회 선교부
글쓴이 : 선한이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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