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신학

[스크랩]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김노섭-열린문 2013. 6. 1. 22:3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0주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성경: 시편 104편

날짜: 2013. 3. 17일 오전 공부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What do you understand by the providence of God)?

답: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28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요리문답 10주일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 유익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인간을 섭리하셔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창조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 다음에 섭리에 대해서서 배워야 합니다. 27문에서는 섭리를 가르치고 28문에서는 창조와 섭리가 주는 '현실적인 유익'에 대해서 묻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9 주일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10주일에서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9주일과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섭리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심으로 창조와 섭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을 떠난 창조가 공허한 하듯이 구원을 떠난 섭리는 사변적인 것입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큰 섭리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아주 하찮은 것이지만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서 모든 섭리를 행하시므로 두려울 것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배운 대로 그것을 담대하게 이 세상에서 실행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창조와 섭리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창조와 섭리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고 거의 동시에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 104:9-13을 보십시다.

시 104:9-13절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창조)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섭리)

여기서 바다와 육지의 한계를 정하신 셋째 날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동물이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또한 공중의 새들도 나뭇가지에서 깃들인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산에 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창조와 섭리는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와 섭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의 차이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지만, 분리하면 이신론(理神論)에 빠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는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운행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신론을 받아들이면 신앙에 있어서도 법칙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무신론자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섭리를 설명하면서 마지막 부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히 1:3). 과학이 발전하고 우주 과학이 발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정한 법칙대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우리의 교리문답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우치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데, 가뭄과 흉년과 질병과 가난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세상에 있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만 주고 "나쁜 것"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분의 지혜 가운데서 역경이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되는 재앙이라는 것도 보내십니다. 이것을 통하여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린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미리 보내셨고, 또 욥에게 병과 가난을 주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당한 병과 어려움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8문은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아주 중요합니다. 삼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큰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도 그것을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자는 우연이나 요행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우연'이라 합니다. '우연‘히 무엇을 했더니 잘됐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우연이라는 단어가 룻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큰 사실을 볼 눈이 없는 사람은 자연히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력을 아무리 할지라도 운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요행이나 운을 믿고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운이나 요행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생활을 개척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으면 요행을 바랄뿐 아니라 숙명론(결정론)에 빠지게 됩니다. 불신자들도 자기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조금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우연을 믿고 요행을 바라고 살지라도 별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안 될 일은 애써도 안 되는 것이고 될 일은 힘을 안 써도 된다는 묘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숙명론, 혹은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직접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28문을 상고 하겠습니다. 28문은 창조와 섭리를 아는 것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 자만이 창조와 섭리의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결과이지만, 그 유익은 오직 신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역경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참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테니까 참자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 역경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보내신 것임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인내합니다. 어떤 사람은 원래 타고난 성격으로 잘 참는 경우가 있지만, 성격 때문에 참는 자는 얼마 가지 못해서 그의 옛사람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게 됩니다. 그것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계의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것을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롬 8:17; 행 14:22 등).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은 조금만 지나면 이 고통이 지날 것이라는 '막연한 소망' 가운데서 인내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장차 올 영광을 소망하면서 인내하는 것이지만, 인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롬 8:39).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확신을 얻었고(행 4:24-31)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행 5:40-41).

행 5:40-41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 “형통할 때 감사”하게 됩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는 것은 역경에서 인내하는 것의 다른 면입니다. 신앙이 있어야 형통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형통함이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알 때에 우리는 바르게 겸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없는 자는 자신의 조그마한 형통에 빠져서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 감사는 형통할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데전5:18).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데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여서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 도구 노릇을 한 분에게도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은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딤후 3:1-2절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을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께 대하여서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에 대하여서도 감사하겠지만,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부모들이 힘써야 할 과제입니다. 진정으로 여러분도 부모에게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학교 스승님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사회에서든 교회에서든 늘 감사하는 법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 우리는 “장래 일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장래를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일 일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은 장래를 알고 싶어서 점을 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장래 일에 대해서 알려고 점치는 일에 대해서는 엄히 금하셨습니다.

신 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 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또 전도서3: 11,14절에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줄을 내가 알았도다 ”

미래에 대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장래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뿐입니다(롬 8:35, 38).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위기에 창조자이시고 섭리자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존중합니다. 그는 아버지 슬하에서 순종하던 소년이었고,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을 때는 그 주인 보디발의 집에서 아주 성실하게 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범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가 갇혔을 때 그 좁고 폐쇄 된 공간에서도 성실하게 자기의 할 일을 했습니다. 총리 때도 아주 충실하게 일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고생하는 신세를 한탄하거나 형들을 원망하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기의 할 일을 하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형들과 후손을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그 섭리를 나중에 비로소 형들이 그 앞에 절하려고 나왔을 때 그 사실을 고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45:7-8절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그리고 다윗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왕도 사울 왕을 죽이고 스스로 빨리 왕위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스스로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인간의 꾀나 힘으로 이루려고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우리도 천지의 창조주가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장래의 일에 확신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됩니다.

섭리의 목적과 유익을 정리하겠습니다. 창조와 섭리의 혜택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고, 신자들만이 창조와 섭리의 바른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조와 섭리가 현실적으로 주는 유익이 있는데, 그 유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뿐 아니라 섭리도 그리스도의 구원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서는 불평하고 감사하지 않고 장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평은 대체로 현세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불평하고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갑작스러운 어려움이나 재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의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곁에 같이 있어주는 것이 최고의 위로입니다. 욥은 고난을 설명하려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욥 16: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당하는 일에 대하여서 다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이것으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목적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창세 때에 나타내 보이셔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역사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나가십니다(히 1:3). 또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29).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섭리하시지만, 거기에 포함된 나도 섭리의 유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위해서 나의 생활도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질문지

1) 이신론이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으면 왜 허탈하고 무기력한 자가 됩니까?

3)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4) 요셉은 어떤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5)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