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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문 만신창이 된 김근태 노래에 부인 '깔깔'

김노섭-열린문 2011. 12. 31. 10:53

 

고문 만신창이 된 김근태 노래에 부인 '깔깔'
 
김근태 민주통합당 고문 별세
좌도 우도 존경했다 … 민주화 투쟁 시대 ‘큰형’
 
중앙일보|양원보|입력 2011.12.31 00:10
[중앙일보 양원보.김성룡]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정을 든 김 고문의 사위 김동규씨가 12월 30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의 빈소로 들어서고 있다. 뒤편에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 이계안 전 의원, 한명숙 전 총리(오른쪽부터)가 서서 예를 표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체포 26회, 10년간의 수배 생활, 구류 7회, 5년6개월에 걸친 두 차례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 그의 굴곡진 삶은 이름 앞에 항상 민주화운동의 '대부' 또는 '큰형'이란 수식어를 붙게 했다. 그는 좌우 이념을 뛰어넘어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이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5시31분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1월 29일 뇌정맥 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던 김 고문은 합병증에 따른 패혈증으로 이날 가족과 김 고문의 '정치적 아들'로 불리는 이인영 전 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김근태는 곧 민주화운동이었다. 1947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경기고를 거쳐 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길이었지만, 대학 3학년 때인 67년 시위에 나섰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가까스로 복학했지만 반독재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71년 '서울대생 국가 내란 음모' 사건에 휘말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8년 김천교도소를 출소하며 부인 인재근씨와 함께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80년 '서울의 봄'을 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더 가혹했다.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이 된 그는 2년 뒤인 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됐다. 22일 동안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선 전기고문 등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김 고문은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술회했다.

 "전기가 발을 통해 머리끝까지 쑤셔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를 버티게 해준 건 부인 인재근씨였다. 전기고문으로 떨어져 나간 남편의 살점을 모아뒀다가 미국 케네디인권센터로 보내 군부정권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것도 인씨였다.

 남영동에서 서울구치소로 이송됐을 때의 일이다. 김 고문이 생일을 맞아 찾아온 인씨에게 선물로 '사랑의 미로'를 불러줬다.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던 터라 노래는 엉망진창이었다. 인씨는 남편 앞에서 깔깔대고 웃었다. 하지만 20여 분 뒤 면회실을 나온 인씨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애창곡은 이때부터 '사랑의 미로'가 됐다. 김 고문은 "수도 없이 투옥되고 수배당하던 시절 내 빈자리를 든든히 지켜줘 그분께 빚이 많다"는 헌사를 남겼다.

 고문은 김 고문을 평생 괴롭혔다. 후유증은 김 고문의 어눌한 말투와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남았다. 2007년엔 손발을 떨고 몸이 굳어지는 파킨슨병을 얻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도 시달렸다. 그는 치과에 가는 걸 유독 싫어했다고 한다. 치과 치료의자에 누웠다가 얼굴 위로 환하게 켜진 불빛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도 있었다. 칠성판(고문대)에 누웠던 악몽이 되살아났던 탓이다.

 김 고문은 2005년 여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근안씨를 면회했다. 이씨는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며 빌었다. 후일 김 고문은 지인들에게 "솔직히 그의 사과가 가식처럼 느껴져 용서할 수 없었다"면서도 "내가 너무 옹졸한 사람 같다"며 자책했다고 한다.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면서 그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15대 총선부터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세 차례 당선됐고,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면서 당 지도부에도 올랐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김 고문은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17대 총선에서 재야 및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국회에 들어오면서 정동영 상임고문과 함께 양대 계파를 형성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하며 '대권수업'을 받게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는 종종 갈등을 빚었다. 김 고문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두고 현직 장관 신분으로 "계급장 떼고 논쟁해보자"고 한 적도 있다.

 그는 이어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지지율은 좀처럼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2007년 6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하면서 심신은 지쳐갔다. 최근까지도 김 고문은 지역구 구석구석을 돌며 내년 총선 때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다 11월 29일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12월 10일 딸 병민씨가 결혼했으나 식장에도 가지 못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10월 18일 그는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글을 올렸다. 유언이 돼버린 글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글=양원보 기자 < wonbosyjoongang.co.kr >

사진=김성룡 기자

▶김성룡 기자의 블로그http://blog.joinsmsn.com/xdrago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