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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미국과 큰 틀의 한국교회사

김노섭-열린문 2007. 6. 14. 17:31
복음주의 미국과 큰 틀의 한국교회사
 

제 14회 정기세미나 자료집 강 사 이 승 준 목사(Drew Univ. Ph. D. )

일 시 1999년 4월 29일(목) 오후 7시

Evangelical America와 큰 틀의 한국교회사 읽기

I. 들어가는 말

II. 청교도적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들

1. 복음주의적 도덕주의(Evangelical Moralism)의 사회성과 개혁성 간과
2. 개인적 종교로서의 복음주의적 특성 간과
3. 비교사적 접근의 오류
4. 내재한 모순된 논리들

III.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들

1. 미국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의 제 문제들

1) 다양한 신학사조를 내포한 모자이크
2) 정의 잣대의 혼선
3) 일관된 정체성의 부재
4) 미국 근본주의 역사의 지속적인 변모

2. 미국 근본주의의 한국적 상황으로의 적용문제

IV.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19세기 미국개신교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본격화된 한국개신교 역사전개과정에 있어 19세기 미국교회가 미친 직간접적인 영향력의 중요성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것이다. 허나 이같은 다수의 보편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사 해석, 특히 초기한국교회사 해석을 위한 19세기 미국 개신교에 대한 학자들의 학문적인 논의는 아이러니칼하게도 거의 전무해왔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 이해의 "가장 직접적인 뿌리" 혹은 "직접적인 배경"으로서 미국개신교가 지닌 한국교회사적 연구가치의 재인식을 역설함과 동시에 그 핵심적 성격을 "복음주의"라는 일관된 특징 가운데서 찾아 그 틀 속에서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해석해온 서울신학대학교의 박명수 교수와 성결교회 역사연구소의 연구활동은 새로운 한국교회사 이해의 지평을 열어간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있다 여겨진다.

위의 몇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특별히 두 가지 이슈를 다루게 될 것이다. 첫째로 19세기 미국 개신교에 대한 이해를 복음주의라는 신학사조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복음주의(American Evangelicalism)이라는 신학적, 교리적 특성으로만 19세기 미국교회를 이해하기보다는 당시 미국사회의 지도이념, 교회와 신학을 포괄하는 사회체제로서의 복음주의적 미국(Evangelical America)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복음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이 땅에 온 초기 미개신교 선교사들과 복음주의적 성격으로서 정초되어진 초기한국교회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두 번째로 evangelical America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간의 한국교회사 해석의 두 가지 대표적인 유형으로 인식되어온 청교도적 패러다임과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의 심각한 오류를 비판함으로서 보다 정확하고 종합적인 한국교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인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청교도적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들

한국개신교의 정체성을 복음주의에서 발견하기 위한 선행작업으로 초기 미개신교 선교사들을 전근대적이며 배타적인 "청교도 유형"의 인사들로 묘사한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 1856-1963)으로부터 제안된 청교도적 패러다임은 재고되어져야한다. 초기 미개신교 선교사들을 낳았고, 교육시켜, 그들에게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을 불어넣어 한국으로 파송했던 evangelical America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은 적어도 청교도적 패러다임이 지닌 네 가지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며, 이를 근거로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서의 복음주의적 특성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1. 복음주의적 도덕주의(Evangelical Moralism)의 사회성과 개혁성 간과

브라운이 제안하고 있는 청교도적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제약은 성수주일운동과 절제운동이 지닌 교조적, 강제적 측면에 대한 관심만으로 인해 그 운동들이 지닌 청교도적 사회윤리적 가치를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시키려는 evangelical America의 도덕적 사회개혁운동의 이념으로서의 완전주의(Perfectionism)나 천년왕국사상적인 배경을 완전히 도외시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성수주일, 금주, 노예제 철폐운동 이 세 가지야말로 남북전쟁 이전의 미복음주의적 사회(Antebellum Evangelical America)가 주도해온 가장 대표적인 사회개혁, 공공의 도덕개혁의 선행과제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잘 반증한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부흥운동가요, 교육자요, 또한 사회개혁자로서의 그의 전 생애를 미국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지기를 위해 진력했던 비쳐(Lyman Beecher, 1775-1863) 목사도 진정 살아있는 실험적인 종교의 실체는 건전한 도덕성의 존폐에 달려있으며 건전한 도덕성이야말로 한 국가의 생존문제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주장함으로 복음주의적 도덕주의가 지닌 사회성을 강조하였다. 비쳐의 사회개혁으로서 복음주의적 도덕주의의 원리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Postbellum America)의 대표적인 사회개혁운동가요, 초기 사회복음운동의 지도자였던 스트롱(Josiah Strong, 1847-1916)에게서도 계승되는 것을 보게된다. 그는 그의 대표적 저서에서 무절제야말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미국의 운명(the Divine Destiny of America)을 가로막는 칠대 해악 가운데 하나임을 역설하였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애와 신학은 절제운동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던 1879년 미국 감리교 필라델피아연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아펜젤러는 사회개혁으로서 절제운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진보적 시대(Progressive Era)라고 일컬어지던 브라운의 당대에도 금주운동이 가장 강력한 사회, 도덕개혁운동으로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 모두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교리적 시각에만 근거한 청교도적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를 드러내준다. 이런 점에서 마슨 교수도 미국의 도덕적 안위야말로 복음주의적 민족주의(Evangelical Nationalism)가 추구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음을 주장함으로서 19세기 복음주의적 도덕주의가 지닌 사회적, 개혁적, 정치적 역동성을 강조하였다. 한국교회 내에서 철저하게 진행되었던 절제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신학적 보수주의 혹은 교조주의라는 교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 도덕주의나 민족주의와 결부된 완전주의적, 천년왕국사상적인 배경의 사회개혁사상으로도 이해되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개인적 종교로서의 복음주의적 특성 간과

브라운이 제시한 청교도적 패러다임은 초기 선교사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적, 타계주의적 신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이후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한국개신교의 또 다른 본질적인 특성을 형성하였음을 비판하였다. 여기서 다시 19세기말의 evangelical America를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1887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미국 복음주의연합(the Evangelical Alliance for the U.S.)의 총회가 개최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사회에서 확대되어가는 기독교인들의 위기 의식과 이를 또 다른 선교의 기회로 전환시키려는, 즉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연대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총회가 열렸다. 당시 워싱턴 총회의 부회장이었던 감리교 감독 앤드류스(Edward G. Andrews)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 회개, 예수 안에서의 개인적인 믿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개인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한 민족의 구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각 개별적 개체로서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을 정복한 기독교의 놀라운 위력도 결국 루디아와 간수 그리고 이후 수많은 각 개인들의 연속적인 회심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국에서 활약했던 초창기 미북장로교 선교사들을 많이 배출했던 시카고 소재의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Seminary)는 1909년 학교 창립 80주년을 기념하면서 당시 프린스톤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총장인 윌슨(Woodrow Wilson)을 초청하였다. 그의 기념사의 내용은 앤드류스 감독의 연설과 거의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복음전교사업에 있어 한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윌슨으로 상징되어지는 당시 미국교회의 복음주의적 확신을 확인하여준다.

기독교의 목적과 대상은 결국 개인이요, 개인이야말로 기독교의 실제적인 견인차입니다. 개인을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견인차를 기독교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어떠한 단체 혹은 기구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펜젤러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고백도 바로 이러한 미국적 시대배경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힘은 죄에서 구원받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각 개별적 성도들이 지닌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양극화된 입장에 근거한 청교도적 패러다임에 따른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은 따라서 선교사들 안에서 발견되는 개인주의적 영성과 현세적인 참여 사이의 긴장과 활력을 지나치게 간과해버린 것이다.
3. 비교사적 접근의 오류

브라운의 청교도적 패러다임은 영미 복음주의 교회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신학적 관용과 유연성에 비해 한국교회 내의 심각한 배타성과 호전성을 경고한 바 있다. 허나 브라운이야말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북장로교가 보여준 강력한 교단 내의 고백운동과 그에 따른 신학적 갈등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전혀 간과한 것이었다. 1892년 미북장로교 총회가 포트랜드선언(The Portland Deliverance)을 채택한 이후 북장로교는 1890년대에 몇 차례에 걸쳐 성서무오설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이후 북장로교회 내의 신학적 갈등으로 인한 이단 심사문제에 있어서도 포트랜드선언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이에 따라 1893년 브릭스(Charles A. Briggs) 교수와 1894년 스미스(Henry Preserved Smith) 교?痔? 해직이 결정되었으며, 1900년에는 맥기퍼트(Arthur C. McGiffert)가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청교도적 패러다임에 따른 한미교회간의 비교 평가는 이런 점에서 다분히 편파적이다. 브라운 총무 관할 하에 있었던 재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그들의 편협한 청교도적 유산으로 인해 폐쇄적이고 전투적이었다고 한다면,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전통의 특수성과 이로 인한 한국교회적 독특함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점증하는 미국교회 내의 신학적 문화적 대결구도가 낳은 패쇄성과 경직성에서 찾는 것이 브라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정확하고 정직한 평가였을 것이다.



4. 내재한 모순된 논리들

브라운의 청교도적 패러다임의 네 번째 문제점은 바로 그 자신의 일관성 없는 해석에 있다. 1919년의 분석에서 브라운은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한국개신교의 지나친 개인주의적 성향의 원인을 복음전파에만 너무도 분주했던 초기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고 있지만, 1901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 작성한 그의 보고서는 전혀 다른 그의 신학적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교육사업과 마찬가지로 의료선교 활동도 역시 복음전파를 위한 지원적 입장에서 수행되어야한다. 의료선교가 복음사업의 확장을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는 훌륭한 가치가 있지만 결코 그 활동이 복음전파의 주된 목적을 위축시켜서는 아니된다. 영적인 것은 항상 우선되어야한다.

놀라운 사실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강력한 전통적 복음전파 위주의 선교활동을 다름 아닌 브라운 총무가 용인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는 점이다. 민경배 교수도 그의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논의에서 바로 이와 같은 브라운의 해석이 내재적으로 지닌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또한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1908년 출판된 글에서 브라운 총무는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온 일곱 가지 주요 원인들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도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독특한 상황을 잘 활용했던 선교사들의 신실함과 지혜로움이 성장의 가장 큰 견인차였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한국은 이미 직접적인 복음전교를 받을 여건이 성숙되어있으므로 일부 이슬람권의 국가들에서처럼 학교를 통한 간접 선교활동을 펼칠 필요가 없음을 권하였다. 브라운이 발표한 여러 글 가운데 발견되는 상충적인 모순은 결국 그 역시도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 미복음주의 전통의 역독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결여한데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에서 이루어진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의 실험에 대한 평가도 그의 신학적 견해의 변화, 혹은 혼선과 함께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III.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교회가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의 본질적인 한계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점으로 요약된다. 즉 미국 근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정의, 그 실체에 대한 이해의 결여와 함께 한국적 상황으로의 적용의 혼선으로 함축될 수 있다.



1. 미국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의 제 문제들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이 보여준 가장 큰 난제는 워낙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온 근본주의가 지닌 자체적인 정의 또는 해석의 어려움에서 근원적으로 기인된다. 따라서 미근본주의에 대한 해석은 다음 네 가지의 구체적인 해석상의 문제점들을 충분히 연구분석한 연후에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1) 다양한 신학사조를 내포한 모자이크

미국 근본주의를 정확히 정의하는데 겪는 가장 첫 번째로 큰 어려움은 그 사조 자체가 완전히 융화되기에는 너무도 다양하고 또한 상충적인 전통들의 모자이크(Mosaic)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미근본주의는 19세기 미복음주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축을 이루었던 경건주의, 부흥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자연히 부흥주의적 전통에서 유래된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 전통들도 근본주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된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캘빈주의적 정통주의와 세대주의 전통들이야말로 근본주의 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미근본주의를 단순히 광의의 보수적 복음주의 전통 그 자체와 동일시하거나 그 가운데 세대주의나 프린스톤 정통주의와 같은 하나의 협의의 특정 신학사조로만 제한시키는 접근방법들은 차후로 배제되어야한다.



2) 정의 잣대의 혼선

미근본주의 정의의 두 번째 어려움은 광의 또는 협의의 의미 혹은 잣대를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근본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기인된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를 협의의 개념에서 호전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조직된 단체(Organized Group)'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서무오설과 같은 일련의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개개인(Individuals)'을 묘사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해석과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라는 표식도 영혼구원과 성경적 기독교를 철저히 옹호하기 위한 광의의 투쟁성(a Broad Militancy)으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세대주의적 투쟁자들의 경우처럼 아주 확연히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조직적인 결속 또는 연대(an Explicit Organized Coalition)로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 해석의 범주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3) 일관된 정체성의 부재

세 번째 해석상의 난관은 지난 1920년대의 미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이후 근본주의는 스스로의 심각한 정체성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1930년대의 콜(Stewart Cole), 니버(H. Richard Niebuhr) 교수는 근본주의 논쟁을 크게 보아 도시와 시골 간의 종교, 문화적인 갈등구조의 한 단면으로 해석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서 진저, 퍼니스 교수는 근본주의의 실체를 진화론과 성서고등비평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학문성에 대한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적 사조로까지도 정의하였다. 심지어 1960년대 중반 호프슈타터(Richard Hofstadter) 교수는 근본주의가 사회적 결속, 영향력과 존경을 잃어가는 특정 사회계층의 신분상실의 두려움이나 동요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근본주의는 이같은 초기 연구자들에 의해 늘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사조나 사회적 부적응의 병리적 현상으로만 소개됨으로서 강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바(James Barr) 교수의 논지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듯이 근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초기의 견해들은 이후 오늘날까지 미근본주의의 객관적인 정체성 논의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며 그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켜왔다.

한편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일단의 교회사가들에 의해 근본주의를 종교적이며 지성적인 운동으로 이해해보려는 새로운 움직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거의 무비판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기존의 미근본주의에 대한 천편일률적으로 비판적인 해석들을 비판하면서 카터(Paul Carter) 교수는 근본주의자들을 오히려 '지성인'들로 분류하면서, 단지 그들은 그들의 경쟁자들과 다른 기준과 방법으로 그들의 신학적인, 학문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음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 들어 샌딘(Ernest Sandeen) 교수는 20세기 미근본주의의 기원을 '20세기적인 반동적인 현상'으로만 보기보다는 오히려 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세대주의자들 간의 19세기적인 유대와 결속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는 '자생적 운동'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마슨 교수는 미근본주의의 기원과 정체성 문제를 사회적, 문화적, 지성적, 그리고 신학적 배경에서 이해해야할 역사적 근거와 학문적 논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서 미근본주의가 이제는 초기 연구자들이 가정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조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학적인 변화는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가중시켜 주었다.
4) 미국 근본주의 역사의 지속적인 변모

미근본주의 정의의 네 번째 난관은 그 역사가 살아있으며 늘 변화무쌍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중후기부터 추적될 수 있는 최초의 미근본주의의 원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변증, 수호하려던 미복음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유대와 결속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 다수의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은 미주류 개신교 교단에 소속된 인사들이었따.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반드시 근본주의자들로 동일시되지 않을뿐더러 전통적인 복음주의 입장에서 서 있는 다수의 보수적 인사들도 호전적, 투쟁적인 태도만을 반드시 고집하지 않았다. 또한 1930년대의 근본주의자들로 자임하는 인사들이 더 과격화, 투쟁화의 길로 나아갈 때 1930년대의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고 기존의 교단에 남았던 1920년대의 근본주의자로 불리어지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이제 더 이상 근본주의자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스피어(Robert E. Speer, 1867-1947)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와 어드먼(Charles R. Erdman, 1866-1960) 프린스톤 신학교 실천신학 교수, 그리고 메이첸(J. Gresham Machen) 교수와 관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교회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저 근본주의를 보수주의, 정통주의, 복음주의 또는 세대주의와 동일한 사조로 혼용함으로서 이른바 보수주의자, 정통주의자, 복음주의자, 혹은 세대주의자로 알려진 초기 미개신교 선교사들을 한국교회에서 활약한 최초의 근본주의자들로 규정하는 오류는 제고되어야한다. 또한 1924년 이전까지의 미 북장로교의 다수가 단순히 1895년 나이아가라 5대 교리와 유사한 교??를 수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불려질 수 없다면, 초기 선교사들을 1895년 나이아가라 교리나 1910년 북장로회 5대 교리를 수용, 고백해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덕주 목사의 경우처럼 그들을 근본주의자로 규정짓는데도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미국 근본주의의 한국적 상황으로의 적용문제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이 지닌 또다른 결정적인 한계는 미근본주의의 한국적 상황으로의 적용의 문제이다. 과연 미개신교적 상황과 배경에서 배태되어 온 근본주의가 그와 유사한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제현상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신학사조 혹은 교회운동이냐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과제가 바로 이와 같은 정확한 한국적인 적용에 관한 문제지만 이제까지 이런 중요한 이슈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가운데 근본주의 문제가 해석되어짐으로서 근본주의에 관한 혼선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미근본주의 연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마슨 교수는 미국적인 상황을 분명히 전제한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근본주의자란 현대 자유주의 신학사조들과 현대문화 속에 드러나는 세속주의적인 양상들에 대해 호전적으로 저항, 반대하는 일단의 복음주의자들이다." 미근본주의를 정의, 이해하는데 호전성, 투쟁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기준으로 간주한 마슨 교수는 미국의 여느 다른 기독교인들과 근본주의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고등비평과 같은 신학적 자유주의와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현대 세속주의라는 두 가지 힘에 겨운 전선(Two Deadly Fronts)을 앞에 두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전사들인 것이다. 마슨 교수는 이어 미근본주의자들과 영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분명히 대별할 수 있었던, 그가 적용한 두 가지 근거도 영국교회가 결코 목격할 수 없었던 미근본주의자들이 남긴 광범위한 호전성의 파장(the Magnitude of Widespread Militancy)과 미국교회와 문화전반에 미친 강한 영향력(General Impact on the American Chruches and the Culture)에서 찾고 있다. 이외에도 근본주의를 미국적인 지적, 문화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는 메이첸,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과 선데이(Billy Sunday)로 상징될 수 있는 반현대주의자들(Anti-Modernist)과 라일리(William Bell Riley), 노리스(Frank Norris), 그리고 스트랜톤(John Roach Straton) 등으로 대표되는 세대주의적 조직가들(Dispensationalist Organizers) 간의 아주 강력하고 독특한 미국적인 유대와 역사적인 결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근본주의에 대한 미국적인 뚜렷한 정체성을 전제하면서 한국교회 내의 근본주의의 문제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대규모의 반현대적인 호전성이나 문화적 영향력, 혹은 반현대주의자들과 세대주의적 조직가들 간의 대대적인 결속과 같은 근본주의의 특징적인 환경, 현상들이 과연 초기 한국교회에서 발견되었냐는 점이다. 오히려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전한 미개신교를 통해 현대성(Modernity)을 발견하였다. 또한 한국교회 내의 자유주의는 일찍이 1890년대부터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문제가 실제적으로 불거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성서고등비평과 같은 자유주의신학의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였다. 그러나 과연 한국장로교의 1930년대 교리적 갈등을 유동식 교수나 이덕주 목사가 주장하듯이 근본주의신학의 형성으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적어도 투쟁을 위한 결속이나 반현대주의적인 호전성과 같은 근본주의운동의 특징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위의 논의들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근본주의적인 기본 교리에 강한 정서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 내의 다수의 개별적인 정통주의적인 성향의 보수주의자들과 미국교회 내에서 조직화된 근본주의자 집단/교단과는 근본주의자에 대한 개념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둘째로 근본주의 교리와의 밀접한 신학적 유대감으로 인해 한구교회 내에 만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이른바 근본주의적 정서(Ethos/Mood)와 미국교회 내에서 조직적인 행동으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들(Movements)과도 그 개념적인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운동이라는 실천적인 행동양태와 표출이 없는 근본주의 신학이란 특별히 근본주의를 정희하면서 무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소수의 교역자들로 인해 전통적인 성경의 권위 문제를 중심으로 야기되었던 1930년대의 한국장로교회 내의 갈등문제는 실상 논쟁의 차원이라기 보다는 다수의 힘에 의한 치리적 차원에서 해소되었던 것으로, 여기서 근본주의적 갈등이나 논쟁을 유추한다는 것은 미국문화와 사회 전반으로까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던 미국의 근본주의 논쟁이나 운동과 비교할 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한국교회가 지닌 특별히 신학적 한계들을 굳이 근본주의라는 범주로만 접근하려는 근본주의 신화 혹은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의 한계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IV. 나오는 말

청교도적 패러다임이나 근본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초기 재한 미개신교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따른다는 사실을 본 논문을 evangelical America에 대한 한국교회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밝혀보았다. 미국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폭을 구하려는 노력은 결국 큰 틀의 한국교회사를 새롭게 보게되는 중요한 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이는 선교사관과 민족교회사관이라는 이원론적 혹은 변증법적 역사접근방법의 구조를 선행 혹은 초월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바로 여기에 또한 evangelical America에 대한 연구의 당위성과 가치에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