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교육

[스크랩] 교육목회 예상문제 11번

김노섭-열린문 2007. 6. 14. 12:18
11. 마리아 해리스의 다섯 가지 교육목회 커리큘럼을 설명하시오.

해리스는 교회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을 '교회생활의 전 과정'으로 정의하고, 신앙공동체에 속한 구성원 전체의 삶의 특징들이 커리큘럼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해리스는 종래의 교회학교 중심의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을 깨고 교회공동체의 삶과 예전을 통한 경험들이 어떻게 회중의 삶 속에 커리큘럼이 되어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해리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그릇의 관계로 상징적으로 설명하는데 모든 회중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동역자로 부름 받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교회의 교육행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 만드는 형성작업으로 이해하고 커리큘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형성하고 재형성함에 기여하는 예술적 작업으로 풀이하고 있다.
해리스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삶의 형태 속에 교회를 위한 커리큘럼의 원형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형성된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함께 모여 서로 교제(코이노니아)하고, 함께 기도하고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레이트루기아)하고, 사도들로부터 가르침(디다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케리그마)하고, 있는 자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디아코니아)주고 등의 삶의 형태를 교회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의 원형으로 삼고, 교회공동체의 삶의 형태를 교육목회 차원에서 구조화해서 커리큘럼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1) 코이노니아( )

마리아 해리스는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에서 공동체와 교제의 사역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분열을 치유하게 하고 상처를 극복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온전함을 성취하도록 이끄는 사역이다. 해리스는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공동체란 현재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과 예수의 공동체인 백성을 창조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가 수세기 동안 전통과 신앙을 공유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이를 다스리는 실재로서의 공동체라 부른다.
둘째,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성경, 신학, 신조, 그리고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공동체를 실감하지 못할 때가 있다. 소외, 상실감, 그리고 이방인 됨의 느낌을 갖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주기적인 평형의 상실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성과 하나됨의 상태를 행한 갈망과 열정을 상기시킨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죄를 깨닫게 하는 실재로서의 공동체라 한다.
셋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상처받고 파괴된 상태로, 또는 전혀 공동체 아닌 집합체로서 생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념의 차이와 종교적 갈등, 그리고 민족주의 등 아직 실현되지 않는 공동체는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들을 보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실재로서의 공동체를 향한 사역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리스는 이와 같이 실현되지 않은 실재로서의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다.

(2) 레이트루기아( )

교회공동체의 중심적인 형태와 생활 가운데 하나는 기도생활이다. 공동체의 기도생활은 하나님의 신비를 전달하기 위한 특징적인 형태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의 종교적 생활을 레이트루기아라고 부른다. 해리스는 교회내의 기도의 형태들에 대해서 기도가 단순히 요청, 탄원, 또는 간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종종 그것의 의미가 확장되어 찬양, 감사,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패들과 악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해리스는 기도를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체적인 기도로 나누어 훈련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도라 함은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한 훈련의 형태는 입술로 하는 기도, 명상적인 기도, 그리고 깊이 몰두하는 관상의 기도가 있다.
공동의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 기도의 형태는 기도 모임이다. 어떠한 형태의 기도 모임에 있어서 우선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을 약정된 시간동안 모임의 리더로 섬기게 한다. 그리고 그 모임이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그 성경의 내용이 개인적이고 공적인 생활을 위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한다. 또는 매주 마다 서로 다른 기도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다.
두 번째 형태의 공동의 기도는 퇴수회이다. 이 기도는 가톨릭 교회 전통에서 알려진 프로그램이다. 해리스는 이 공동의 기도를 하루나 주말의 긴 시간동안 일정 크기의 공동체가 그것의 일상적인 활동 무대를 떠나 있는 퇴수회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심적인 것은 특정 모임의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서, 기도를 위하여 교육받고, 기도에 의하여 교육받고, 아울러 기도 속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이 공동기도의 핵심은 전체 공동체가 참여하는 예배행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것을 이상적인 공동기도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전체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예배행위를 중요한 의례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이러한 예배를 포함한 공동적인 기도와 개인적인 기도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과제들이 오늘날 교회에 있어야 한다.
첫째, 개교회 목회자들, 직원들, 그리고 회중들의 사역을 통하여 가르침, 설교, 그리고 재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동일하게 영성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기도와 정의를 위한 행위를 분리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셋째,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할과 참여를 고무시키는 예배행위를 설계해야 한다.
넷째, 커리큘럼의 자원들을 위한 센터가 되어야 한다.

(3) 디다케( )

성령이 강림했던 오순절은 가르침과 교훈이 본질적인 요소로 드러낸 때였음을 지시해 주고 있는데, 주요 구절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이다. 이 사도들의 가르침은 쉐마와 관련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적인 관행에서의 가르침과 연구의 중심 활동이 되었던 것이다.
디다케는 토라의 한 형태이다. 즉, 길에 관한 지시, 교훈, 정보, 안내이다. 따라서 해리스는 디다케를 가르침의 커리큘럼을 나타내기 위한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가르침은 그 몸을 유기체로 존재하게끔 한다고 하면서 그 유기체는 서로 서로에 의해 함께 사용되고, 서로 서로에 대해 이익이 되도록 사용되고, 아울러 서로 서로를 위해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서로 서로를 향해 행하는 상호 활동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활동이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최선의 가능성을 표출하는 가르침이 됨을 설명한다.
이상과 같이 가르침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공동체가 유기체적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다른 요소들을 더 윤택케 해 준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모든 영역에서 가르침에 대한 목회적 소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4) 케리그마(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선포는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삶이요, 죽음이요, 그리고 부활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말씀이 새롭게 지음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또 그들을 위해 있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해리스는 케리그마에 대한 커리큘럼을 말하는 것은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풍성하게 짜여진 실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곧 말씀으로 이 말씀에 의해 우리가 교육을 받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양육된다.
본래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설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리스는 케리그마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전승된 근원적이고 성서적인 케리그마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동시에 해리스는 그 본래의 케리그마에 대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케리그마는 시대를 경유하면서 또 그 시대를 관통하면서 그 케리그마가 발휘하고 있는 능동적이고, 생동적인 강력한 능력이 있다는 것. 둘째, 케리그마가 교회 속에서와 그리스도인들 속에 자리하여 새롭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케리그마의 본래적인 의미를 알고 공동체 안에 케리그마를 새롭게 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케리그마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선포되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디아코니아( )

디아코니아는 봉사나 교역이라는 말로 번역되며,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공동체의 범위의 섬김과 봉사활을 지칭한다. 둘째, 식탁을 위하여 봉사하고, 손님에게 회의를 베풀고,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고 남을 섬기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것과 같은 활동을 지칭한다. 함께 나누는 능력은 여러 형태들을 취하게 되는데, 이 형태들은 역동적이고 활력을 불어넣으며, 전적으로 자유케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 형태들을 사용하지 않을 때 교회는 자신의 이익에는 너무 많은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 섬김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 인해 병들 수 있게 된다. 디아코니아를 만족스럽게 인도할 형태들은 사회적 돌봄, 사회적 의식, 사회적 능력부여, 사회적 입법들이다. 여기서 사회적 돌봄이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감싸는 미덕이며, 힘이며, 능력이다. 또한 돌봄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열중하게 되는 존재와 행위의 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돌봄에 있어서 밑거름이 되는 정형화된 행위들을 가리키며, 사회적 능력부여로서 디아코니아는 긴급구조 음식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입법이란 사회적으로 돌보고 의식을 행하고 그리고 능력을 부여해 주는 일련의 의지들이 정치적 활동을 통해서 사회질서를 재형성시키는 데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기독교 초기로부터 내려온 교회 공동체의 요소였다. 그 이유는 디아코니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공동체가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사회적 돌봄을 위해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섬김과 봉사의 활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단순히 구제하는 일에만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자세로 도와줄 때 교회 공동체도 성장해 나갈 것이다.
출처 : 교회교육사
글쓴이 : 임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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