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신앙

서로사랑하라

김노섭-열린문 2007. 4. 9. 21:40

 옛신앙  2004년 12월 05일 [제8권 49호]   ◆ 매주 발행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Old-time Faith

www.oldfaith.net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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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에 제자들에게 중요한 한 교훈을 주셨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구별하여 '새 계명'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하신 많은 교훈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교훈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라는 뜻입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인가?

첫째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교훈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라는 뜻입니까? '서로'라는 말은 제자들 상호간을 가리킵니다. 주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교훈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요점입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22:37-40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두 마디가 성경 교훈의 요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웃 속에는 우리의 육신의 가족은 물론이요 우리 주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됩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4의 전통사본에 보면,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에 하신 말씀은 그러한 일반적 사랑의 의무에 대한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요 1:12).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께서는 그의 모친과 육신의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2:50).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형제자매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좁은 의미에서 형제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8:11, 12,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주께서는 바로 이런 형제들 상호간에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히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주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그의 사랑의 증거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조건 없이 거저 주신 사랑이었고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교훈했고(엡 5:2), 사도 요한도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교훈했습니다(요일 3:16).

성경은 참된 사랑이 오래참음과 온유와 겸손과 착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난다고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절). 이런 사랑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또 그는 다른 두어 곳에서 교훈하기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습니다(빌 2:2, 3; 롬 12:9).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셋째로, 우리는 왜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명령 즉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새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큰 결함을 가지는 자요 큰 죄를 짓는 자입니다.

둘째,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엡 2:19).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 식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것은 육신의 가족보다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짧은 생을 넘어서 영원한 천국에까지 이르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아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형제에게 베푼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감람산에서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 주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를 사랑한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지만 순종과 선행과 사랑으로써 그 구원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이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하기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롬 13:8-10).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아 빛 가운데 거한다는 증거이며 또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일서 2:9, 10,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3:14, 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참 기독교인인 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형제들을 사랑합시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우리의 사랑은 오래참음과 온유와 겸손과 착함과 진실함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저버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구원의 증거요 성화의 증거요 제자된 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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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계신 증거들"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말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다면, 그에 대한 모든 논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히 11:6).

합리적 논증들

역사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여러 가지 합리적 논증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 자체에 근거한 논증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며 어떤 결과가 존재하면 그 원인도 존재한다. 우주의 궁극적 원인 즉 제1 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우주가 존재하듯이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우주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1)

둘째는 우주 혹은 자연만물의 목적성에 근거한 논증이다. 집이나 시계 같은 모든 설계된 작품들은 그 설계자의 존재를 증거한다. 우주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작품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작품이며 그 놀랍고 신비한 질서와 적응성, 예컨대 천체의 질서나 동식물과 사람의 구조 등은 그것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목적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2)

셋째는 하나님의 개념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완전자라는 개념이다. 자연만물과 사람은 다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완전'이라는 개념 속에는 '존재한다'는 성질이 포함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이것을 본체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3)

넷째는 사람의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에 근거한 논증이다. 사람 속에는 양심 곧 도덕적 분별력이 있는데, 그것은 그것을 주신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바대로 선한 자는 잘되고 악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관념도 도덕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것을 도덕적 논증이라고 부른다.4)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이상 네 가지의 합리적 논증들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촬스 핫지는 "[합리적 논증들은] 소크라테스 때로부터 현대까지 가장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 건전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말했고,5) 로레인 뵈트너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우주론적, 목적론적, 본체론적, 도덕적 변론들은 개방되고 편견없는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든지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고 논평했다.6) 박형룡 박사도 "유신논증들은 큰 가치를 가진 것이다. 성경과 기독교 경험에 의하면, 성령이 사람의 심령(心靈)에 확신(確信)과 회심(回心)을 산출하시는 과정에 논증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논증들 자체들은 아무 사람도 중생시키지 못하나 오히려 전도의 과정에 기구(器具)로 되어 왔다"고 말했다.7)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단지 그 사실을 전제하고 선포한다.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전제와 선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온 우주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이 세상의 어느 것 하나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논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1:1에 전제되고 선포된 하나님은 무엇에 의해 존재하게 되신 자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 즉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원어(???????? ?????? ???????? 에예 아쉐르 에예)는 직역하면 "나는 '나는 있다'이니라"이다. 헬라어 70인역은 "나는 있는 자니라"(?γ? ε?μι ? ?ν 에고 에이미 호 온)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했다('I am that I am'). 우리 말에 '여호와'(예호와)로 번역된 하나님의 히브리어 명칭(????????)은 '있다'라는 동사(?????? 하야)에서 나온 말로서 '존재하시는 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논증들을 인정한다. 시편 19편의 저자는 고백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시 19:1-4). 시편 94편 저자는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했다(시 94:8, 9).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했고(행 14:16, 17) 또 "그[하나님]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다(행 17:24-28). 또 그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다(롬 1:19, 20). 히브리서 3:4은 말하기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이런 합리적 논증보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즉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들이 아닐 수 없다. 신명기 4:32-35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神)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 속의 본성의 빛 자체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선포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께서만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를 충분하게 또 효력있게 계시하신다"라고 대답했다(제2문답).

경험의 증거

부수적으로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도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증거한다. 사무엘하 22:47, "여호와는 생존(生存)하시니." 시편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디모데전서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성도들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신다. 예레미야 29:12, 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러므로 비록 부수적 증거이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무신론의 어리석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無神論)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많은 증거들, 즉 합리적 논증들과 성경의 증거들과 경험의 증거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래서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다. 무신론은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제시하는가? 무신론은 단지 어리석은 사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인 죄악이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악이며 또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 죄악들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했고(시 14:1) 잠언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다고 했다(잠 16: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셨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28).

각  주

1) the cosmological argument. Aristotle이나 Thomas Aquinas 등이 제시함.

2) the teleological argument. Socrates나 Cicero나 Philo 등이 제시함.

3) the ontological argument. Anselm이나 Descartes 등이 제시함.

4) the moral argument. Kant 등이 제시함.

5)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p. 203.

6)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82.

7) 박형룡, 교의신학: 제2권 신론,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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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문제:                                  신복음주의

[다음은 21세기에 알아야 할 22가지 용어들이라는 Matt Costella의 글에서 신복음주의에 대한 부분이다.]

"지성적, 문화적 존경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성경적 근본주의(혹은 전통적 복음주의)와 종교적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사이에 간격을 연결하려는 신학적 입장. 1948년 '신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해롤드 오켕가는 이 새 운동이 오류로부터의 분리보다 침투와, 사회복음의 증진과,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어떤 성경적 교훈들(예컨대, 성경의 본질, 인간의 기원, 홍수의 보편성 등)을 기꺼이 재검토하려는 마음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크리스챤 라이프지 1956년 3월호는 '복음주의 신학이 변하는가'라는 글에서 신복음주의의 신조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그 글은 신복음주의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1) 과학에 대한 친근한 태도, 2) 성령의 사역에 관한 신념들을 기꺼이 재검토하려는 마음, 3) 종말론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한 좀더 관용하는 태도, 4) 소위 극단적 세대주의로부터의 전환, 5) 학문에 대한 증가된 강조, 6) 사회적 책임에 대한 좀더 명확한 인식, 7) 성경 영감의 주제에 대한 재(再)개방,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점점 더 기꺼이 대화하려는 마음. 오늘날 신복음주의는 연합주의적 협동을 조장하고 건전한 교리를 희생시키면서 '사랑'을 강조하는 목회 철학으로뿐 아니라 성경적 근본주의에 대한 경멸의 마음 상태 혹은 태도로 흔히 드러난다."8) 

증오의 발언으로 정죄받음

작년 스웨덴의 한 오순절파 목사는 설교에서 동성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유죄로 인정되어 선동죄로 징역 1개월의 형을 받았다.9) 그는 동성애를 "비정상적"이라고 표현했었고 동성애자들을 "성욕 도착자들(perverts)"이라고 불렀다. 검사는 설교문을 발췌하였고 그것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불렀고 "그가 하듯이 이 주제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수집하는 것은 증오의 발언(hate speech)이 된다"고 말했다.10)

각  주

8) Calvary Contender, October 2004.

9) Christianity Today, September 2004.

10) Calvary Contender, Octob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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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의 배교를 포용하는 타협과, 은사운동의 혼란을 반대하고,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도 책망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성경 말씀의 정로(正路)를 붙들고 그 길로 가는 교회들이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하며, 또 그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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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 조영엽, 왜 열린 예배는 잘못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