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월절을 며칠 앞 둔 예루살렘 시내의 모습입니다. 거리는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여인들로 인해 부산하고, 제사용 짐승을 취급하는 상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먼 곳에서 찾아 온 낯 선 얼굴도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 날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1500년전 완악한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의 아홉 가지 혹독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모든 사람과 짐승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내려졌을 때, 그는 하나님께 굴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보내게 됩니다. 그 날 애굽 전역에서는 아들을 잃은 통곡 소리가 끝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정에는 통곡 소리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든지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가정에는 재앙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재앙이 넘어갔다고 해서 패스 오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지키라고 하셨고 모세 이후 예수님 당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지켜 온 것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유한 의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먼저 푸르고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 후 포도주와 무교병을 먹기 전에 가장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다른 날에는 우리가 무교병이나 유교병을 다 먹을 수 있는데 이 날에는 무교병만 먹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때 아이들은 대답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급히 출발해야 했기에 반죽이 충분히 발효될 시간이 없어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 가장이 말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선조에게 기적을 베푸사, 노예 상태에서 자유를, 고통에서 기쁨을, 슬픔을 축제로, 어둠에서 큰 빛으로 그리고 속박에서 해방으로 인도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할렐루야로 노래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전통을 기술한 미쉬나라는 책에 기록된 유월절 의식의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디아스 포라 합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 계속 되었던 전쟁은 유대인들에게 가난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은 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쟁 포로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났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날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날 예루살렘에는 인파가 270만까지 되었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어 보이고, 요야김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약 125,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55,000명의 도시에 2배 이상의 사람이 몰렸으니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전 20년경 지어지기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까지 46년간 공사가 계속 되었지만 아직 완공 되지 않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지 “그 건물을 보지 못한 자들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자들” 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자들은 번쩍이는 광채와 함께 우뚝 솟은 예루살렘 성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을 때 그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 13:1절을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하고 말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에 도착하셨을 때 일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일대 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과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분노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온유하신 예수님, 혹은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석에서 만든 채찍으로 짐승들을 몰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것을 가져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첫째는 희생 제사용 짐승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소와 양과 비둘기가 나오는데 이 짐승들은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위해 사용되었던 짐승들입니다. 부자들은 소나 양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보통 유월절 기간에는 약 18,000마리의 짐승들이 희생 제사로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런 짐승들을 끌고 예루살렘까지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위해 성전 안에서 제사용 짐승을 살 수 있는 편의가 제공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로 필요한 것은 성전 세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20세 이상의 순례자들은 성전의 보수를 위해 사용되었던 성전 세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성전 세는 반 세겔이었는데 이는 근로자의 이틀 보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세로 지불하는 화폐는 일반 화폐가 아니라 성전에서만 쓰는 화폐 이어야 했습니다. 순례객들은 성전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허락을 받은 환전상들을 통해 성전에서 쓸 수 있는 돈으로 환전을 해서 성전 세를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환전 업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순례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멀리서 온 순례객들을 위해 짐승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어 주는 일은 필요한 일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거룩해야 하는 하나님의 전이 장사 하는 집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의 겉 모습과는 달리 성전 내부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과 성전 경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성전 경내에는 이스라엘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 이스라엘 여자들이 들어가는 여인들의 뜰, 그리고 이방인의 출입이 허락된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뜰에서 희생 제사용 짐승들이 매매되고 돈이 바꿔지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바뀌어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가랴 14:21절의 말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올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동원될 정도로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경내에서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바깥 뜰 즉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공간이 장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차지된다면 더 이상 이방인들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엉뚱한 목적으로 변질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책망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뿐만 아니라 여기서 이뤄지는 거래는 타락한 거래였습니다. 당시 환전 원들은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일반 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면서 부당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10불만 받아야 할 것을 15불 20불을 받으면서 부당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희생 제사용 짐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역관들이 짐승을 통과 시킬 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습니다. 마치 수출을 하려면 먼저 통관을 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통관을 시켜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납기일은 맞춰야 하기에 결국 뒷 돈을 주고 통과를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비싼 값으로 짐승을 사야 했습니다. 예배가 드려져야 할 거룩한 곳이 장사하는 집으로, 수퍼 마켇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당시 부패한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인가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1:17절에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 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먼저 중요하게 시행되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섬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고 하셨습니다.
시카고 인근의 대표적인 교회로 윌로우 크릭 교회가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방문하고 논문의 제목이 되고 연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할 정도로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불신자 전도에 전력을 기울이고 예배 형식의 변화를 통하여 시대를 앞서 가는 교회로 소문 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이 교회가 타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튼과 노스 쇼어에 브랜치 교회를 내고 위성 예배를 통해 신자 확보에 나선 것입니다. 본점인 싸우스 베링턴에서 드리는 예배를 위성을 통해 동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의 모 교회의 지점 교회가 시카고에 들어섰습니다. 여러분 이는 분명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확장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할 교회가 인간 중심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자리를 사람이 대신 들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 시카고의 모 교회에서 복음 성가 가수를 초대하여 복음성가 연주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연주회에 대한 광고가 몇 차례에 걸쳐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저는 그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교회당에서 연주를 하는데 버젓이 티켇을 판매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당에서 공연을 하면서 버젓이 입장료를 받은 것입니다. 교회당은 유료 공연장이 아닙니다. 교회당에서 하는 행사는 결코 돈 받고 입장료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돈 받고 예배를 드린 격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현대판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전 안에서 버젓이 부당한 상행위가 행해지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채찍으로 짐승들을 쫓아내시고, 상을 둘러 엎으시고 돈을 쏟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할 때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그들은 다시 말합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 일으키겠느뇨?”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은 친절하게 그 의미를 주석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라. 성전은 자신의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성전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계신 집입니다. 아무리 외형이 아름다워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만이 성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할 곳에 인간이 대신 들어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자신인데 인간의 욕심이 대신 들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성전이었지만 실제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바로 주인의 자리를 되찾는 행동이셨습니다.
원래 성전의 주인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탄이 자신이 주인인양 행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조종을 받은 인간들이 자신의 정욕을 위해 성전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려져야 할 장소가 강도의 굴혈로 바뀐 것입니다. 바로 이 주인의 자리를 되 찾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장사하는 사람들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인간은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몰아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내 쫓고 자신이 들어 앉았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인간의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듯이 우리의 마음은 죄로 인해 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더러운 모든 정욕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는 뒤집어 엎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 돌밭과 같은 너희 마음 밭을, 가시떨기와 같은 너희 마음을, 길가와 같은 너희 마음을 둘러 엎으라.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도저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더러운 냄새와 쓰레기로 숨이 막혀 도저히 그 곳에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어떤가요?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찾아 오시려 할 때 내가 내 마음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구나?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구나?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왜 예수님께서 인간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을 둘러 엎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둘러 엎으신 것은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러운 나의 마음을 보혈의 피로 정결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일 1: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워진 우리의 마을 뒤집어 엎으시고 깨끗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경은 내 마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혹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찾아오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네 마음은 참으로 깨끗하구나. 내가 너와 함께 오랫동안 있고 싶구나 하실까요? 아니면 내가 도저히 숨이 박혀서 너와 함께 있을 수 없구나? 하실까요? 혹 나의 마음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뒤집어 엎고 몰아내야 할 죄로 가득한 것은 아닌가요? 주님은 마음 밭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 가죽을 베고 내게 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 청결입니다. 주님 내 마음을 뒤집어 엎어 주옵소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