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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스라엘 역사에서 본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박동현)

김노섭-열린문 2018. 4. 1. 22:56

이 글은 존경하는 박동현 교수님의 모교 부흥 100주년 기념 신앙 사경회 선택특강 전문입니다. 

강의 내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깊이 아파하며 들었던 내용입니다. 

허락을 득하지 못하고 올린 글이지만, 흔쾌이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나눕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본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박동현)

 

 

1. 들어가는 말

 

사경회 전체 주제와 특강 제목

 

평양부흥 100주년 기념사경회에서 부족한 제가 선택 특강의 한 부분을 맡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이번 사경회의 주제는 우리 시대에도 부흥케 하옵소서 - 말씀, 회개, 부흥, 입니다. 그 큰 틀 안에서 제가 맡은 특강의 제목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본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시간에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참된 부흥에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찾아 여러분에게 말씀드려야 할 숙제를 받은 것입니다. 그동안 강의 준비에 쫓기면서 숙제를 잘 해보려고 애썼습니다만 결과는 그리 신통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저로서는 오히려 이 문제를 두고 여러분과 함께 둘러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무슨 새로운 내용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뻔한 내용, 또 그동안 제가 이런저런 기회에 되풀이하여 말해 오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려고 할 따름입니다. 그런 만큼 여러분은 그저 편한 마음으로 저와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늘 그러했듯이 이런 모임에 강사로 초청받는 사람들은 보통 큰 교회 목사님이거나 널리 이름이 알려진 분들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 저는 제가 지난날 성공하지 못한 시골 교회 담임교역자였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임곡리 임곡교회. 제가 1977년 겨울부터 19828월까지 다섯 해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제가 맡아 섬겼던 산골교회입니다. 교인이 십 수 명도 되지 않는 이 산골교회에서 처음에는 신학생 전도사로 시작하여 198147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두 어 해 동안에는 제가 장신대 전임 강사로 일하느라 실제로는 다른 분이 그 곳에 거주하며 교회를 돌보았지만, 명목상으로 여전히 제가 담임교역자였습니다. 임곡교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 우산교회. 19902월 초부터 19931월 말까지 세 해 정도 제가 담임했던 시골교회입니다. 교인이라야 어른이 수십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산교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애틋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쓰는 이 찬송가 앞에는 1993년초에 만든 우산교회 교우들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구역별로 적어 놓은 종이가 아직도 붙어 있습니다.

임곡교회이든 우산교회이든 교우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교역자였지만, 저로서는 제가 이 두 교회의 담임교역자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교우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목사라는 직책을 두고 생각한다면 장신대 교수의 자리보다 이 두 교회의 담임 교역자 자리가 제게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평생 그러할 것입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산골교회나 시골교회 교역자의 눈으로 보는 한국교회는 큰 교회 교역자나 이름난 교계 인사들의 눈으로 보는 한국교회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분들이 주로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산골교회, 시골교회 교역자는 아래에서 올려쳐다 봅니다.

그 동안 제가 우리나라 교회를 두고 말을 하면, 제가 너무 좋지 않게만 생각한다거나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염려하는 말을 선후배 교역자들부터 자주 듣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 저의 성향은 결국 우리 교회 현실을 위에서 보지 않고 아래에서 보는 저의 시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것도 그런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를 보는 제 입장이 너무 부정적이고 편파적이라고 느끼실 수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한자말 부흥(復興)의 뜻

 

부흥라는 낱말을 한글학회에서 1992년에 펴낸 우리말큰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쇠퇴하던 것이 다시 일어나거나 일어나게 함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쇠퇴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차차 줄어지고 약해져서 그전보다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런 주제를 이번 사경회에 붙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부흥: 하박국 32절의 부흥

 

그런데 놀랍게도 개역성경에서 부흥이라는 낱말은 단 한 번 하박국 32절 앞부분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가 그 부분입니다.

여기서 부흥하게 하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는 무엇이 다시 살아나게 하다’, ‘되살리다뜻합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게 할 것, 되살릴 것은 주의 일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행동’, ‘행위를 뜻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려움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이 인간 세계의 역사에 개입하여 하시는 행동,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주전 600년쯤에 북쪽의 크고 힘센 나라 바벨론의 군대가 힘없고 작은 조국 유다를 위협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셨듯이 지금도 가까운 시일 안에 그런 구원의 조치를 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박국이 곧바로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당신의 행위를 되살리셔야 이스라엘이 위기에서 벗어나 되살아날 수 있으므로, 여호와의 행위를 되살리소서 라는 이 기도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을 되살리는 기도,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 우리도 우리가 속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바란다면 너무 성급하게 하나님, 저희 한국교회를 부흥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하나님,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살리시려고 여러 가지로 놀라운 행동을 하셨듯이 지금 그러한 당신의 행동을, 행위를 되살리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부흥을 바라는 하박국의 기도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오로지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우리 한국교회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너무나 마땅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우리가 하나님께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며칠 전에 읽었던 구약 외경 유딧 8장의 내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전 150년쯤에 생긴 책이 유딧서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유다로 쳐들어왔습니다. 유다의 한 산골마을 배툴리아를 에워싼 이들은 그곳의 물길과 샘들을 다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배툴리아 사람들은 지도자 우찌야를 중심으로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방책을 세워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마침내 우찌야는 닷새가 지나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돕지 아니하시면 그리하자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인 유딧은 우찌야를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 오게 해서 말합니다. 그 가운데 815-17절을 2005년에 나온 가톨릭공용번역본에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닷새 안에 우리를 도우실 뜻이 없으시더라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는 권능을, 또 적군들 앞에서 우리를 전멸시키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협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고, 인간과 달리 부추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에게서 구원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십사고 그분께 간청합시다. 당신 마음에 드시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평양 부흥 100주년인 올해 우리 남한 교회 안의 움직임을 보니 1995년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기억하실 분이 있겠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 교계 일부에서는 1995년을 평화통일희년으로 선포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해방 후 50주년이 되는 1995년 에는 반드시 통일을 향한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1995년 그 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져 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통일 논의하는 일을 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지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 안에 무슨 큰일을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물론 100주년이 중요한 해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100주년에 반드시 무엇을 해 주시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행위를 되살리실 때가 2007년이 아니라 2008년일 수도 있고 2013년일 수도 있지요. 그런 만큼 우리로서는 올해도 언제나 그랬듯이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2007년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요? 모처럼 온 학교가 열심을 내는 마당에 김 빼는 말씀을 드린 것인가요?

들어가는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 시간 제목 자체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오늘의 한국교회

 

먼저 이 시간 제목에는 이스라엘과 관련되는 구약의 내용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곧 옛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었듯이, 오늘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옛 언약의 백성이었다면, 교회는 새 언약 백성의 모임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새 언약 백성의 한 부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부흥한 적이 있었는가?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참으로 부흥한 적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가장 융성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통일왕국이 제대로 꼴을 갖추게 된 시대입니다.

한 나라의 부흥이란 융성하던 나라가 쇠퇴해지다가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솔로몬 시대가 끝난 뒤에 이스라엘은 남북왕국의 둘로 나누어짐으로써 구약 하나님 백성의 나라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으니 나누어진 각 나라가 아무리 부흥한들 통일왕국 시절의 세력을 되살릴 수는 없겠지요. 다만 북왕국의 경우에는 주전 8세기 중엽의 여로보암 2세 때가, 남왕국의 경우에는 주전 7세기 후반의 요시야 때가 어느 정도 부흥한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3-25절을 보면, 41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사마리아에서 북왕국을 다스렸던 여로보암 2세가 북으로는 시리아 지역의 중심 성읍 가운데 하나였던 하맛 어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통치 영역을 넓혔다고 합니다. 또 이 때 나라 안의 경제도 크게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나라가 부흥한 때에 내부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커져 양극화가 깊어지고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가 심해져서 불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도 아모스의 예언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여로보암 이세를 가리켜 열왕기하 1424절에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라 힘이 겉보기로 강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이 내리신 복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가운데서도 나라가 부흥할 수 있지만 그런 부흥은 진정한 부흥이 아닙니다.

31 동안 예루살렘에서 남왕국을 다스린 요시야의 경우는 이와 좀 다릅니다.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을 두렵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온 국민에게 알려 온 나라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것을 약속하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선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없애는 등으로 온 나라의 신앙을 새롭게 했습니다. 아울러 앗수르에게 빼앗겼던 북왕국 땅도 되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내용이 열왕기하 22-23장에 나옵니다. 안타깝게도 요시야는 앗수르가 약해진 틈을 타 북쪽으로 쳐 올라오는 이집트의 임금 느고를 막아서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역대하 3520-22절에서는 요시야의 죽은 까닭을 밝힙니다. 곧 이집트의 임금 느고가 요시야에게 자기가 올라온 것은 유다를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치려는 것이므로 자기를 막지 말라고 했으나 요시야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22) 느고에 맞섰다가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요시야의 죽음으로 유다왕국 중흥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요시야 다음에 유다 임금이 된 여호아하스를 이집트 임금 바로가 이집트로 끌고 가버렸고, 그 대신에 여호야김을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4년 뒤에 이집트 군대가 바벨론 군대에게 싸워 크게 지자, 유다 땅은 바벨론의 영향 아래 들어가고 바벨론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모로 애쓰다가 마침내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유다 지도층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가 페르시아 시대에 다시 유다 땅에 돌아온 뒤로 유다 공동체가 재건된 역사가 있으나 그 규모를 두고 보면 이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재건을 이스라엘의 부흥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역사는 나중3.에 다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제대로 부흥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리하여 오늘 진정한 부흥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 한국 교회에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으려면, 왜 이스라엘은 부흥하지 못했는가 알아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 길을 오는 동안 하나님을 거스른 역사를 말하면서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보기라는 말을 보통은 좋은 뜻으로 씁니다. 곧 어떤 훌륭한 사람을 본받아 나도 훌륭해지려고 한다고 할 때 아무개를 본보기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본보기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조들의 실패한 역사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에서 본보기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와 통하는 한잣말로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이 말은 보통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잘못된 것을 보고 가르침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스라엘의 제대로 부흥하지 못한 역사를 오늘 진정한 부흥을 바라는 한국 교회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결과를 두고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무튼 그토록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많이 끊임없이 베풀었지만 한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갈라진 두 나라는 차례로 북왕국이 먼저 망하고 뒤이어 남왕국도 망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망한 나라 백성을 유다 땅에 불러들여 살게 하셨지만, 그들조차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그런 실패의 길을 걸었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부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언제나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잠시 말씀드린 요시야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히스기야나 포로기 이후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있고, 구약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는 그야말로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겨레와 조국을 살리려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이런 긍정적인 요소도 한국교회가 제대로 부흥하는 길을 찾는 데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썩 어울리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한잣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하찮은 말이나 행동일지라도 자기의 학덕의 닦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란 산이 별 쓸모없는 자갈밖에 없는 거친 산이라 하더라도 그 산의 자갈에서조차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타산지석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참으로 부흥할 길을 찾아보십시다.

 

 

 

2. 구약의 이스라엘이 부흥하지 못한 까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하나님 백성

 

스가랴 11-4절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1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페르시아 임금 다리오 2년 여덟째 달은 주전 5201011월의 어느 시점입니다. 따라서 이는, 포로로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던 유다 사람들이 다시 유다 땅에 돌아와 유다 공동체를 재건하기 시작하여 18년이 흐른 때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유다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하시면서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하십니다. 그 히브리어 문장을 직역하면, “너희는 너희 조상들처럼 되지 말라가 됩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권고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역사로 뭉뚱그리십니.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스가랴 시대까지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한마디로 불순종의 역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표현은 구약성경 특히 예레미야서에 자주 나옵니다(3:13, 25; 7:13; 25:3, 4, 7; 26:5; 29:19; 34:17; 35:14, 15; 37:2; 42:21; 43:4). 이는 유다 멸망 직전후 유다의 상황이 예레미야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곧 남왕국 유다가 부흥하지 못하고 망한 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한 현실에서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뿌리는 이미 통일 왕국의 세 임금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도 처음에는 겸손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미스바에서 온 백성을 불러 모으고 그를 임금으로 뽑았을 때 남보다 큰 키의 몸을 짐보따리들 사이에 감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몇 번 전쟁에서 이기고 나자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경고하신 바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 멋대로 처신하다가 정신도 희미해지고 그저 다윗을 해치려고만 하다가 마침내는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1322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친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던 임금이 다윗입니다. 또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래도 통치자의 모범으로 여기는 사람이 다윗이라는 사실은 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 되어 땅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할 때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 9:13). 그런데 이스라엘의 군대가 마침내 요단 동쪽의 암몬 자손의 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을 즈음에 다윗은 왕궁에 남아 있다가 부하 장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감추려고 충직한 장수 우리야를 죽이게 하는 무서운 일까지 벌였습니다(삼하 11). 이 일 때문에 예언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엄히 꾸짖으시자 다윗은 뉘우치고 용서 받습니다(삼하 12). 그렇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습니다. 사무엘상하의 흐름을 보면, 이 사건 이후 다윗과 더불어 다윗 왕국도 내리막길을 달립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범했습니다. 그 때문에 셋째 아들 압살롬이 맏형을 죽이고 달아났다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잠시 동안이지만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삼하 13-19). 압살롬이 죽은 뒤에는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위로 올랐다가 솔로몬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왕상 1-2).

솔로몬도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되어 처음에는 기브온 산당에 가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팎으로 지혜로운 통치자로 이름을 떨치고 성전과 왕궁을 짓고 국방을 튼튼히 했습니다(왕상 3-10).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집트 임금의 딸을 비롯하여 여러 다른 나라 여인들을 아내로 삼으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온갖 우상을 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말년에는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왕상 11). 그리하다가 마침내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는 나라가 남북의 두 나라로 나누어집니다(왕상 12).

그 뒤로 남북왕국에 들어선 임금들도 크게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북왕국을 세운 여로보암은 처음부터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으로 그것들을 섬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그 뒤로 북왕국에서는 여덟 차례에 걸쳐 왕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누가 임금이 되든지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님을 거스릅니다. 정당하게 권좌에 오르지 못한 임금들은 경쟁이나 하듯이 이방 신들을 섬겼고 이방 종교를 끌어들였습니다.

열왕기상하에서는 북왕국 임금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걸어갔다고 거듭거듭 말하다가(왕상 15:26, 34; 16:26 ) 마침내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 전체가 그리했다고 하면서(왕하 17:22) 건국 초기부터 생긴 잘못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두고 호세아 84절에서는 그들이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고 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과 백성에 견주어 보면 남왕국 유다의 임금들과 백성은 그런 대로 괜찮았다고 할 만 합니다. 실제로 앞서 잠시 언급했던 요시야를 비롯하여 몇 몇 임금들은 제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입니다. 그렇지만 큰 흐름을 보면, 남왕국도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의지하다가 망하고 맙니다.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3:7-11)와 에스겔(16:47) 형제의 나라 북왕국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치닫는 남왕국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남왕국은 북왕국의 멸망을 반면교사로도 타산지석으로도 삼지 못한 것입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수난 찬송을 한 장 같이 부른 뒤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145장을 함께 불러보십시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 백성

 

어려움을 겪는 하나님 백성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일찍이 다윗도 힘든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하나님께 여쭙기도 하고(삼상 23:2; 삼하 2:1; 5:19,23) 간구하며(삼하 12:16; 21:1)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이스라엘 왕들이 있습니다. 백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대가 유다로 쳐들어왔을 때 유다 임금 아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대하 14:9-15).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마온 사람들이 유다에 침입했을 때에도 임금 여호사밧과 온 백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이기게 하셨습니다(대하 20). 앗수르 임금 산헤립의 군대가 유다로 쳐들어왔을 때에는 임금 히스기야가 간구하여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왕하 18-19; 36-37).

그런데 역사를 통틀어 보면 이스라엘은 위기 상황에서 대체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데서 살 길을 찾으려 했음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남쪽의 이집트, 북쪽의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큰 나라들 사이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작은 나라들과 이웃하여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줄타기 외교 동맹 정책을 펼치며 나라 안팎의 군사력과 무기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가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솔로몬이 여러 이웃 나라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과 북왕국 오므리 왕조의 아합이 시돈의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것도 그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남북왕국이 인척관계를 맺거나(왕하 14:8-14) 힘을 모아 아람(왕상 22)이나 모압(왕하 3)과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형제의 나라를 이기려고 이방 나라와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곧 유다 임금 아사는 북왕국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북왕국이 이미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아람 왕 벤하닷을 설득하여 그 동맹을 깨고 유다와 조약을 맺게 했고(왕상 15:19), 북왕국 임금 베가는 아람과 동맹을 맺고 남왕국을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남왕국 임금 아하스의 요청을 받아 쳐내려온 앗수르에게 망하고 맙니다(왕하 16-17).

옛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때로는 북쪽의 강대국을 의지하고 때로는 남쪽의 강대국을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임을 예언자들은 힘써 지적했습니다. 예레미야 218절에서는 남북 강대국 사이를 왔다가다 하는 유다 백성을 가리켜 어찌하여 나일강물을 마시려고 이집트로 가고, 유프라테스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느냐는 식으로 꾸짖습니다.

이사야 79절에서는 유다 임금 아하스에게, 믿어야 다윗 왕가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경고합니다. 그렇지만 아하스는 동맹을 맺고 유다에 쳐들어온 아람과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치려고 앗수르에게 굴복합니다. 그 결과 아하스는 형제의 나라 북왕국의 멸망을 재촉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조차도 앗수르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비극을 불러들입니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앞서 언급했듯이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을 믿음의 기도로 물리쳤지만, 곧바로 마음이 높아져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유다 내부를 다 보여줍니다. 이럴 즈음에 유다 안에서는 이집트의 힘을 빌어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야 20장과 301-5절과 311-3절 그런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약자를 괴롭힌 사회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백성의 사회는 힘이 하나님처럼 되어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힘으로써 힘없는 사람들을 마구 내리누르는 불의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여호와 신앙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좇아 다른 사람들 특히 힘없는 사람들을 마구 짓밟습니다.

이런 잘못된 사회의 모습을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일찍부터 당신의 백성에게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잘 돌볼 것을 명령하셨고, 특히 다윗 왕가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여 하나님 백성을 잘 돌볼 책임을 맡기셨습니다(22:3 ). 그런데 왕들을 비롯하여 고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악용하여 백성 특히 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습니다.

미가 31-3절에서는 정의를 아는 것이 이스라엘 통치자들의 본분인데도 이들이 하나님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먹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한다고 통렬히 비난합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이런 정치 지도자들을 양들을 제대로 먹이기는커녕 잡아먹는 못된 목자들에 견줍니다.

더 나아가서, 에스겔 2229에서는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백성도 일반 민간 지도자들마저 약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 땅의 백성으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 <암 하아레츠>는 토지를 소유하고 마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곧 지방의 민간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경박하고 거짓된 종교지도자들

 

이처럼 구약의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여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 나라가 부흥하기는커녕 망하게 된 것은 임금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 큽니다. 그렇지만 그 못지않게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도 큽니다.

예레미야 613-14절에서 이를 한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유다 왕국 백성이 모두 탐욕을 부리는 상황에서 예언자들과 제사장들도 다 거짓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병들어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무 문제없으니 안심하라는 식으로 백성을 거짓으로 위로하며 속였다는 말씀입니다. 거짓된 안전 신앙을 퍼뜨려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을 에스겔 1310에서는 조금 달리 표현합니다. 유다의 예언자들이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 백성을 유혹하며 남이 쌓는 담에 회칠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2228에서는 이런 예언자들이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힘없는 백성을 해치는 고위 관리들을 위해서 회칠했다고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못된 지도층의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다는 말씀입니다. 에스겔보다 한 백 년 앞서 활동했던 미가는 미35절에서 자기 시대의 잘못된 예언자들을 가리켜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백성을 유혹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돌아오기를 거부한 하나님 백성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서로를 해치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어 돌아오라고 권하셨는데, 이들은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까지 나빠진 데에는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지만 잘못된 지도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뒤쫓은 일반 백성에게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는 예레미야 530-31 말씀이 이를 알려 줍니다(14:13-16 참고).

우선 북왕국 백성의 경우에 아모스 44-11에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재앙을 내려 그들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셨으나 이들이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왕국 유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5:3; 15:7; 2:17 참고).

말라기 37을 보면, 심지어 포로기가 지나 다시 고향 땅에 돌아와 살게 된 유다 사람들조차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하고 대들고, 13-15절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고 교만한 자가 복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면서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

 

 

3. 이스라엘의 부흥과 재건을 위한 노력

 

 

남북왕국 시대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는 한 마디로 불순종과 배신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어두운 역사 가운데서도 나라와 겨레를 되살리려고 노력한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북왕국에서도 단 한 번이기는 하지만 임금 예후는 바알 숭배를 뿌리 뽑으려고 힘썼습니다(왕하 10:18-29).

무엇보다도 남왕국 유다 임금 요시야가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친 역사는 이미 1.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

 

포로기가 끝난 뒤에는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의 도움을 받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이끌었고, 그 뒤로는 느헤미야가 불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했고 에스라가 유다 공동체를 신앙적으로 다시 세우려 애썼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되살리는 일에는 또한 일반 백성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느헤미야 8 1절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은 뒤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어주고 가르치면서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힘썼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한 절 말씀은 그런 모임을 열자고 한 사람이 에스라가 아니라 백성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직역하면 한 사람처럼모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단락이 끝나는 12절에서도 주어가 백성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 81-12절에서 나오는 백성은 그저 지도층의 지시에 따르기만 한 어중이떠중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지도층을 움직입니다. 에스라는 그저 백성의 요청에 응했을 따름인데, 백성은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을 때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스라가 찬송하자 아멘으로 응답하며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백성은, 레위 사람들이 율법책을 읽고 해석해주는 바를 들고 울었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은 이런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바빴습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는 레위 사람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6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7이하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앞서 에스라가 하던 역할을 떠맡을 뿐만 아니라, 에스라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3절에서 에스라는 율법책을 읽기만 했는데, 7-8절에서 레위 사람들은 율법책을 읽어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깨닫게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모임 이후에 벌어진 회개 장면을 묘사하는 느헤미야 91-2절에서도 일반 백성과 레위인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달8장에서 말한 모임이 있은 칠월의 스무나흗날에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모인 것은 누가 지시하고 명령해서 된 일이 아닙니다. 백성이 스스로 모인 것입니다. 이는 81절에서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였다고 한 바와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에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읽어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보니, 요즘 말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여기서 지나쳐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자기들의 죄만 자복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허물도 자복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기 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가슴 아프게 여긴 것입니다.

뒤이어 4-38에서는 레위사람들이 찬송하며 기도한 내용이 길게 나옵니다. 에스라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에스라 8에서 예루살렘에 처음 도착하여 지도층의 이방 혼인 사실을 알게 된 뒤에 충격을 받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9에 나오는 레위인들의 기도 가운데서도 이들이 백성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죄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를 두고서 회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6에서 이들은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라고 아뢰고 뒤이어 35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거슬렀는지를 자세히 말합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이스라엘의 역사가 배신의 역사인 점을 그 구체적인 보기를 낱낱이 들면서 하나님 앞에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8-9에서 또 한 가지 지나쳐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백성이 주도해가는 움직임의 중심에 율법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책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과 지도층을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4. 오늘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까닭

 

 

오늘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원인을 두고 현대사회의 다원화성을 비롯하여 사회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찾아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 근본 까닭은 한국교회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에 비추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한국교회?

 

우리 한국교회는 말씀을 강조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이 교회 저 교회에 문제가 생겨 그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직접 가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 것인가요?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말씀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인가요?

내 신앙과 신학의 경향에 맞아 내 맘에 드는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일반 성향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성경공부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을 인도자가 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그러했듯이 개교회, 개교단, 한국교회의 전통이나 권위가 말씀 위에 자리 잡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를 통제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고 싶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신앙과 신학과 교회의 전통과 교권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돌이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지난 120여년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실히 따라 온 것입니까? 세계 선교 역사에서 그와 비슷한 보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크게 발전했다는 자만에 빠져 한국교회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인 것은 아닙니까? 성장과 발전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무슨 수를 쓰든지, 그러니까 하나님 뜻에 도저히 맞지 않고 하나님께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방법을 쓰더라도 교인수와 교회 재정만 늘이고 교회 건물만 크게 하고 일거리만 많이 만들어 해 나가면 된다는 식으로 교회를 움직여 와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까? 에스겔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듯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바알을 비롯하여 생산의 신들을 섬겼듯이, 오늘 한국교회도 경제와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을 좇아 하나님을 배신한 것은 아닙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한국교회

 

구약의 이스라엘은 남북의 강대국과 이웃의 여러 작은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하나님보다는 나라 안팎의 군사력과 무기와 자신들의 외교 정책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처럼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편으로는 여러 강대국들에게 안전을 위협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의 작은 나라들에게서조차 도전받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첨단무기를 갖추고 국방력을 강화하며 강대국과 동맹을 맺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흐름이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지난 몇 해 동안 이 땅에서 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움직인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군사력과 강대국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있는 것입니까?

 

 

약자를 괴롭히는 한국교회?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하는 일들이 아주 적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크게 모자랍니다. 또 사회에서 힘이 없어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접받는 경우가 보통이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교역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고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교역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는 교인들이나 일반 평신도들을 마치 종 부리듯이 부리며 거드럭거리며 괴롭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주 노동자들과 북한 이탈 동포들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들어온 동포들을 아직 우리 교회가 따뜻이 품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경박하고 거짓된 지도자들?

 

이를 두고서는 굳이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보다는 그저 교인들이 듣기 좋게만 설교하고 복만 빌어주는 교역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한평생 희생적으로 교회와 이웃을 섬겼지만 억울하게 교회에서 내쫓겨 어렵게 지내는 교역자들도 계시지만, 교인들을 그저 자기 욕심을 이루는 도구나 수단으로 알고 마구 부리는 교역자들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런저런 옳지 않은 모임에 교인들을 마구 동원하는 교역자들도 있습니다. 교역자는 교인들 때문에 있는 존재인데, 교인들이 교역자를 위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처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34장의 표현대로 한다면, 양을 먹어야 할 사람들이 양을 잡아먹는 이리가 된 것입니다.

또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교역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교역자들 때문에 교회들이, 교인들이 지울 수 없이 큰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한국교회?

 

사회에서 교회를 비난하는 소리를 높이면 그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처사라 하면서 변명하기에 바쁘고 진정으로 자신들을 돌아보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치는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잘못은 참회할 줄 모른다는 데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자꾸 궁색하게 변명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구약성경에서는 말하는 돌아옴의 뜻을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구약성경의 권고를 신약에서는 회개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개역한글판 구약성경에도 회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드뭅니다(7:12; 18:30). ‘회개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 자체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이 신약성경의 구체적인 문맥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뜻으로 쓰입니다. 그 배경에는 돌아오다를 뜻하는 구약 히브리 낱말 <>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선 말 그대로 어디를 떠났다가 본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을 떠났다가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리하여 구약의 돌아오다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존재 전체가 달라진다는 아주 실제적이고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구성원된 한 사람 한 사람, 또 전체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까?

 

 

 

5. 오늘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는 길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는 길은 앞서 4에서 살펴 본,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까닭을 뒤집어 보면 곧 드러납니다. 다만 몇 가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

 

맨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시간 첫머리에 읽은 하박국 32에서 드러나듯이 우리가 겨냥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의 부흥이기에 앞서 하나님 행위의 부흥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해 오신 놀라운 행위들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부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국교회의 부흥은 오로지 한국교회의 주이신 하나님께 달린 일로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지, 우리 사람들이 이루거나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준비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탄생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령 강림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도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부흥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오늘 하나님이 이루실 부흥이 1907년에 일어난 부흥 운동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모습의 부흥,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부흥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부흥을 이루신다는 것이지, 100년 전의 부흥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복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바란다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개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문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헛된 자만에서 벗어나 그동안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받들던 데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쳐 놓고 우리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앞세워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마음으로 빈손과 빈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래 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종려주일 찬송을 한 장 불러보십시다. 131(주의 예수 나귀 타고 시온성 드실 때”)입니다.

 

 

말씀을 되찾아야 할 한국교회

 

이제 더는 사람의 무엇을 얻기 위해 성경을 써먹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손해를 입을 수 있고 어려움이 닥칠 수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조금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한국교회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불의가 나라 안팎에 성행하더라도 한국교회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불의에 맞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서 이 나라 이 겨레를 지키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공동체의 죄도 회개해야 할 한국교회

 

1907년에 일어난 회개운동은 주로 개인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치는 식으로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런 개인의 변화가 교회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로 나아갔습니다만, 아직 선교 초기였던 그 때와 교회 역사가 120년이 넘어선 오늘의 회개는 그 내용과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 곧 교회 전체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느헤미야 9장을 보면,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도 다시 짓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시 쌓은 유다 사람들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읽어주는 율법 말씀을 듣고 믿음을 새롭게 하면서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보면서 조상들이 지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일이 개인의 문제인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하나님 백성 전체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다윗과 욥의 경우에서 개인이 회개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구약의 대부분, 특히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에스라 9장에서 에스라가 회개한 것도 에스라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도 개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 지난 120년을 통틀어 우리 한국교회를 두고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독일 교회가 범죄의 고백문을 정하여 19451018/19일에 발표한 사실을 기억해 볼 만합니다. 쉬투트가르트 범죄 고백문이 그것인데, 이 고백문을 발표하는 일을 두고 독일 교회 내부에서조차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범죄 고백문을 발표함으로써 독일 교회와 세계 교회의 관계가 새롭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부분만 제가 풀어서 번역해 읽어 드리겠습니다.

 

··· 바로 우리를 통하여 숱한 민족들과 나라에 끝없는 괴로움이 닥쳤음을 우리는 큰 아픔을 느끼면서 인정합니다. ···

나치 폭력정부에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난 잘못된 영을 거슬러 지난 여러 해 동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왔습니다만, 더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더 신실히 기도하지 못하고, 더 기쁘게 믿지 못하고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를 고발합니다. ···

이번 사경회도 그렇습니다만 저는 이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시는 강사님마다 정말 좋은 말씀 많이 하시고, 참석자는 한결같이 열심히 찬송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 배웁니다.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 전체의 모습은 거의 달라지지 않고, 한국교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은 여전합니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결국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신앙의 공동체성을 우리 한국교회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서 비롯되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평양 부흥 100주년 기념사경회를 하고 있는 우리 각 자 먼저 자신의 죄부터 살펴 고백하고 회개함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각자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인 만큼 그 신앙 공동체 전체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서도 가슴 아파하며 죄를 고백하며 그 잘못을 고쳐나가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내가 믿는 가정 출신이라면 내 가정이 예수를 믿은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것이 없는지도 돌이켜 보면 좋습니다. 나는 오대째, 사대째, 삼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어, 우리 친가도 외가도 모두 교역자 집안이야, 우리 집안에 목사, 장로, 권사가 몇 명이야!” 라고 뽐내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랜 전통의 기독교 집안에서 그동안 혹시라도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는지를 조용히 돌이켜 보고 그런 일이 생각나면 깊이 뉘우치고 고침이 마땅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에 신앙의 전통이 오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지만 우리는 제대로 그 은혜에 응답하지 못했지. 정말 하나님께 죄송스럽고 사람 앞에 부끄러워.”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고 교세가 대단하다고 자랑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아 그렇게 교세가 커지는 동안 이 교회가 하나님께 잘못한 적이 없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고 잘못이 생각나면 온 교우들이 깊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바로잡아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장로회신학대학교도 역사가 100년 넘었다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닙니다. 지난 100년 동안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쳐야 할 점은 없을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속한 교단, 한국교회가 지난 세월동안 하나님과 민족 앞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회개는 그저 어느 한 순간에 며칠 만에 끝내버릴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교단과 한국교회가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고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잘못을 고백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부끄러움과 이런저런 어려움도 달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잘못이 너무 오래되어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쩌면 적어도 2007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계속 회개에 힘써야 할 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 동안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친일의 죄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진심으로 이 신사참배와 친일의 죄를 공개적으로 제대로 인정하고 겨레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까? 매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사 책들을 들추어 보면 이제까지 우리 한국교회는 한 번도 친일의 죄를 제대로 정리한 적도 회개한 적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참으로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한 교회로서 더 이상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힘센 나라에 빌붙어 자신들만의 안전과 번영을 꾀하는 못된 버릇을 버린 것입니까?

해방 이후 독재 정권에 알고 모르게 협력한 죄, 정부의 위협이 두려워 불의에 함구했던 죄, 이런 죄들을 두고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가 겨레 앞에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도 용서를 빈 적도 없습니다.

통일을 위해 힘써야 하는 사회에서 교회가 앞장서서 대립하고 분열한 죄는 우리가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 경제절대주의, 실적주의, 성장제일주의에 교회가 굴복한 죄는 또 어떻습니까? 농어산촌교회와 지역사회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우리 도시교회의 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성 교역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수고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남성의 종처럼 부려먹기만 죄는 어떻습니까?

요즈음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시끄럽습니다만,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기독교 학교를 세워 선교에 힘쓴다 하면서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이런저런 못된 짓을 한 그리스도인들을 막지 못한 죄를 우리 교회가 사회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립학교를 우리 스스로 올바른 학교로 만들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회개할 죄를 두고 생각할 때 이는 일차적으로 저를 비롯한 교역자들의 죄가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신사참배, 친일, 독재 지지, 분열, 부정, 부패 등의 여러 죄는 교역자들이 앞장서서 저지른 죄들입니다. 대단히 가슴 아픈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죄를 지은 교역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제시대에 어떤 양심적인 평신도 아동문학가 한 분은 청소년 시절에 학교 졸업장을 반납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역자들 가운데 신사참배한 죄를 고백하며 스스로 교역자의 일을 일정 기간 동안이라도 하지 않으며 애통해 한 분들이 몇 분이나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도 교회에서 목회자가 잘못한 것이 분명히 드러났을 때, 그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뼈아픈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탓하고 삼가는 모습을 보이는 교역자는 거의 만나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그릇된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지하는 교인들이나 세력을 동원하여 상처받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 시간에 침묵 가운데 주님만이 아시는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도록 합시다라는 인도자의 말을 들으면, “뻔히 드러난 죄도 인정하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그렇지만 이 시간 아무래도 제 자신의 죄부터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제 선생님으로 우리 학교에서 오래 교수로 계셨던 박창환 전 학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요, 신학교의 문제는 신학 교수의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에 문제가 많다면, 이는 교역자들에게 문제가 많기 때문이고, 한국 교역자들에게 문제가 많다면, 이는 교수들이 신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스스로 알고 모르는 사이에 괜히 교수라는 권위에 집착하여 수업 시간이나 일상의 만남 가운데서 학생들이나 선후배 교역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 오만하게 말하고 행동하여 상처를 준 적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이 죄를 두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교수로서 열심히 연구하여 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만한 좋은 논문을 지난 몇 해 동안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 죄도 있습니다. 제대로 성실히 준비하지 못한 채 허세를 부리면서 임기응변식으로 수업한 죄도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는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모처럼 용기를 내어 제 연구실 문을 두드린 학생을 다음에 보자고 하면서 그냥 돌려보냈는데 그 사람이 그 뒤로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그 이름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어서 미안한 맘을 늘 품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저도 모르게 괜히 서양 교회나 신학만 부풀려 소개하고 우리나라 교회나 신학은 내리깎는 식으로 말하여 학생들과 교역자들에게 신학 사대주의를 심어주고 해외 유학을 통한 출세의 허영심만 키워준 점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죄는 우리 교회 안팎의 불의를 보고서도 권력가들과 잘못된 것을 후원하는 교회 대중이 무서워서 제대로 이를 지적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적당히 둘러대며 피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단 총회장 선거에 금품이 오가고 향응이 성행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또 쿤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나 목회 방식이나 언행에 분명히 신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는데도 그저 몇몇 사람들에게 사석에서는 말하지만 공적으로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한 죄도 제게 있습니다.

몇 해 전에 겪은 일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우리 학교 어느 과정의 사경회 강사로 오셨습니다. 사경회가 끝난 뒤에 평가할 때 그 과정의 학생 몇 사람이 그 강사님을 두고 아쉬운 점을 밝혔는데 이 말이 그 목사님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이 목사님은 노발대발하면서 내가 장신대에 그렇게 많이 헌금하는데 이제는 끊고 다른 데로 보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지요. 교인들이 정성스레 헌금한 것을 자기 돈 쓰듯이 이리저리 보낸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목사님이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 학교 당국에서는 여러 보직 교수님을 그 목사님에게 보내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로는 학생들이 그 목사님의 사경회 인도를 두고 불평할 만했습니다. 그러니까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아쉬움을 토로한 학생들이 아니라 사경회를 책임 있게 인도하지 못한 그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때 우리 교수들 가운데 누구라도, 아니 저라도 그 목사님께 당신이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니 다음부터 조심하시오.” 라고 말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저는 다른 교역자들도 함께 한 자리에서 그 목사님과 만나 이 사경회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목사님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약함을 저는 고백합니다.

또한 여러 해 전부터 제 마음을 크게 짓누르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온 나라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괴로움을 두고 말만 많이 하고 실제로는 거의 하는 일이 없는 현실을 여러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 안에서 저 못지않게, 아니 저보다 더 헌신적으로 수고하면서도 전임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는 후배 교수님들을 보면 마음에 찔리는 바가 큽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지만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제 친구 법학교수 한 사람은 대학 안의 비정규직 동료 교수님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전임교수들이 봉급을 일정 부분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이 전혀 먹혀 들어가고 있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말도 꺼내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료 교수님들 가운데에는 어렵게 사시면서도 남모르게 이곳저곳 어려운 사람들을 돕느라 이미 힘에 겹도록 지출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회에 그저 한 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에 올려 봅니다.

요즈음에는 부교역자로 일하다가 일할 교회를 잃은 뒤 생계가 막연하니 도와달라고 졸업생들 가운데서 연락해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주로 전자우편을 통해 알려오는데,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큰 교회 교역자들이 자신들이 받은 사례를 일부를 이렇게 어렵게 사는 선후배 동역자들에게 좀 돌려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만 하고 고치지 못하는 저의 이런저런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이 순간에도 앞으로 같은 문제에 부딪쳤을 때 제 태도가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자신에게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비겁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혜택의 적은 부분이라도 기꺼이 버리는 훈련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불의한 일을 보고 더는 침묵하지 않고 외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참 회개라면 이 회개를 하기 위해서 제게는 아직 몇 해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더라도 회개는 한 순간에 해치워버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자신을 이기고 해내야 할 장기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여러분도 저를 비롯하여 우리 교수들이, 교회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참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계 안에서도 돈이 말을 한다.”는 느낌을 오래 전부터 받아 왔습니다.

1977년엔가 제가 학생으로서 신학춘추 기자를 할 때 쓴 기사가 문제가 된 것을 기억합니다. 생활관 아침 기도회 시간에 큰 교회 목회자 몇 분이 우리 학교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점을 꼬집어 칼럼을 썼는데, 이것을 본 당사자들이 학교 당국에 연락을 하자 신문 주간 교수님이 저희 학생 기자들을 불러 야단을 친 것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학교 운영이 어려운 마당에 그런 기사를 굳이 써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다른 기사가 문제가 되어 그 때 우리 학생기자들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직 어린 학생기자가 그 나름대로 정의감을 가지고 실은 기사를 외부에서 문제 삼을 때 교수님들이 그 압력에 쉽게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당함을 인정하고 문제 삼는 분에게 당당히 학생기자들을 변호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 때 외부의 압력을 받는 보직 교수님이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바로 며칠 전에 어떤 평신도 지도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분은 최근에 우리 학교에서 개최한 어떤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우리 학교에 엄청난 기부금을 내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그 행사에서 어떤 분이 내용을 두고 보면 정당하지만 이 목사님을 몹시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했고, 이 목사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모임을 이끌어 갈 책임을 맡았던 교수님이 몹시 당황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평신도 지도자는 장신대도 별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교수님처럼 처신했겠지만, 이 경우도 돈이 말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돈이 말을 한다.”는 생각은 신학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신학교 운영자금이나 학생들의 장학금을 큰 교회에서 얻어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일터를 소개하자면 교수들이 큰 교회 목사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속으로는 부담이 되고 심지어는 아니꼽다는 생각조차 들지만 교수들이 큰 교회 교역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려야 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신학자들이 무슨 연구를 하고 싶은데 그 연구에 드는 경비가 없으므로 이를 얻어 내기 위해 대형 교회 목회자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과정에서 거의 아부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연구실에서 수업 준비 하느라 바쁜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거신 분은 자신이 그 당시 최근에 은퇴한 아무개 교수의 부인인데 남편이 은퇴한 뒤 세운 무슨 신학연구소의 총무 일을 맡아 본다고 했습니다. 남편 되는 그 교수님은 전공분야에서는 나라안팎에서 알아주는 분이었습니다. 학계 원로에 속한다고 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이 사모님이 전화로 제게 부탁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아무개 신학연구소에서 나라 안의 유명 대형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신학적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계속 열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느 교단의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분석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이고, 성서신학 특히 구약학자의 입장에서 저더러 그 목사님의 설교 분석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이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살아 있는 목회자, 그것도 비교적 젊은 목회자의 설교를 굳이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 말씀이 교수님, 무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오셔서 그 목사님 설교 참 잘 한다고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아무개 신학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나라 안의 큰 교회 목사님들을 위해서 세미나를 열어주고 그 대가로 그 교회로부터 적지 않은 액수의 후원금을 받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계에서도 돈이 말을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기독교계 안에서 돈이 말하게 내버려둔 죄도 우리가 회개할 한국교회의 죄가 아닙니까?

우리 각 개인이 회개할 죄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회개해야 할 공동체의 죄, 한국교회 전체의 죄가 어찌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하나하나씩 헤아리면 몇 날 며칠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 일은 이번 사경회에서 처음 하는 일도 아니고 이미 우리가 그전부터 해오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경회를 계기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우리 한국교회 전체를 죄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뉘우치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바로잡아 가는 길을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앞으로 계속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모여 큰 소리로 기도하고 손들고 찬양하며 again 1907을 외칠 뿐만 아니라 각자 홀로 조용한 가운데 기도실에서, 골방에서, 강의실에서, 예배당에 꿇어 엎드려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깨달은 대로 우리의 어그러진 공동체를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에 더욱더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그야말로 피말리는 괴롭고도 힘든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흥의 총체성과 전면성과 공동체성

 

여러분, 부흥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되살리실 때,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총체적으로, 전면적으로 바꾸어 나갈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가 발전하고 성숙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사건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4:13)려고 다시 몸부림치는 사건입니다. 제 표현이 좀 거치더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그저 몇 번 요란하게 찬양하고 성경 좀 읽고 통성기도하고 눈물 조금 흘리면서 회개를 끝내버리는 정도로는 그런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나날의 삶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자기에게 닥칠 손해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잘못을 바로잡아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흥을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6. 나오는 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본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 - 제가 받은 숙제를 이제 끝맺으려고 합니다. 제가 그동안 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얻은 결론에 비추어 이 숙제에 답한 내용은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 내용은 이 시간 새삼스레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 어느 겨레도 누리지 못한 놀랍고도 큰 은혜를 하나님께 입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있는 약자들을 억눌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경박하고 거짓되이 처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요시야 왕이나 에스라 느헤미야처럼 힘을 다해 겨레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이스라엘은 한 번도 제대로 부흥해 보지 못한 채 사그라졌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도 이스라엘 못지않게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또한 이스라엘 못지않게 하나님을 거슬러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속으로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죄들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우리 힘만으로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갈구하면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말씀을 되찾기를,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한국교회 전체의 죄 고백하고 잘못을 바로잡기를 더욱더 힘쓰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는 길입니다.

오랜 동안 귀 기울여 들어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 34263/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