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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

김노섭-열린문 2011. 11. 13. 17:34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

조 영 관

 

 

1. 머릿말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10명 가운데 1명은 장애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약 450만명의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공공장소에 가보면 장애인이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장애인의 시설이용이 매우 불편하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고깝지 않다. 장애인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장애인이 격리 수용되어 있거나 재활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이 주요한 이유이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기독교인은 자유로운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는 바 육체적 결함 때문에 인권이 유린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은 장애와 고통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에서는 장애로 인한 불편함의 문제보다 고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 장애인을 대하는 하나님의 손길

1) 만나고 대면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장애자와 병든자를 마다하시지 않고 만나 주셨다. 마태복음 15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앉은뱅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를 만나신다. 또 마가복음 1장 40절에서는 문둥병자를 만나신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구약의 규례를 따르면 문둥병자는 부정한 자요 진밖에서 살아야 하는 제한을 받고 있다(레 13:45).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은 문둥병자를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눈으로 보는 것까지도 금기시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문둥병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를 만나셨다. 유대인은 부정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들도 부정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고 만나셨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나타나는 장을 마련한다.

2) 민망해 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나와서 꿇어 엎드려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할 수 있나이다' 라고 간구할 때 그를 용납할 뿐 아니라 민망히 여기셨다(막 1:45-46).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뜻은 '함께 느낀다' 또는 '아픔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장애인에게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있다. 예수님은 이 상한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다. 이것을 상담에서는 '공감한다' 또는 '감정이입한다'는 말로 사용한다. 공감이란 말은 상대방의 깊은 감정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학자들이 연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진정한 공감은 내담자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을 유출시켜 상처받은 감정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나 먼저 하신 일은 문둥병의 치유가 아니라 그의 상한 감정과 부정적 감정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이 상처와 감정이 먼저 치유되지 않으면 육체를 고친다 해도 그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선 그에게 민망히 여기심으로 그의 감정과 상처를 치유하기 원하셨다.

3) 상처를 만지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각종 장애인들과 환자들의 몸에 손을 대시고 있다. 예수님은 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막 7:32-33). 또 예수님은 소경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막 8:22).

이같은 신체접촉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것은 사랑의 접촉이다. 상하고 더러운 몸에 거룩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이 직접 손을 대는 행위는 사랑의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것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접촉이다. 이 접촉은 고독하게 소외되어 있던 불구자와 에수님과의 구체적인 만남을 의미하다. 장애자의 최대의 아픔은 사회와 인간관계의 단절이다. 예수님과 만나고 접촉하는 순간 이 관계의 단절이 회복되는 단초가 마련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4) 치료하시는 하나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 완전성이 깨지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언제나 이 완전성을 지향한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인간을 만나고 상한감정을 치유하고 상처를 만지셨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불완전하다. 문제가 되는 육체의 불구와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예수님은 완전성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장애와 질병을 고치신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벙어리를 치료하실 때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애바다 즉 열리라 하셨다. 귀신을 쫓을 때도 예수님은 말씀을 사용하신다. 간질병자에 들어 있는 귀신을 예수님께서 소리쳐 꾸짖으며 그에게서 나오라 명하자 귀신은 빠져나갔다(마 17:14).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찌르기에 충분하다. 이 능력이 장애와 질병을 치료하고 인간의 완전성을 회복한다.

 


3. 장애인에 관한 성경적 이해

1) 왜 장애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장애와 같은 극단적인 고통의 현장에서 질문한다. 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악한 자는 형통하거니와 선한 자에게 왜 고통이 많은가(렘 12:1, ).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이 고통의 신비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보류하고 계신다. 물론 성경이 그 원인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자신의 죄값으로, 조상의 죄값으로 사단의 시험에 의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통이 주어지는 예를 성경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경우에 왜 고통이 임하는지 알기는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신비를 알 수 없게 하여 인간이 마음대로 고난에 대하여 말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더 가깝게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날씨는 무덥고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은 늘 부족했다. 광야생활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백성들은 때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늘 이스라엘 진영의 한 가운데 계셨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가르켜 주셨다. 직접 맛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다. 회막에 하나님의 기운(구름)이 걷히면 이동하였고 기운이 가득하면 정지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애 이렇게 백성이 가까이서 하나님을 대면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여리고성에 당도해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양식은 그쳤다. 이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환경을 조절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한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 광풍을 만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찾는다(마 8:23). 예수님이 탄 배에 왜 광풍이 불어야만 하는가 제자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예수님도 이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신다. 그들이 아는 것은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으며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고난의 수수께끼는 고난의 정체가 규명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의미가 있다.

2) 장애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인간이 장애를 입게 되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 장애를 저주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이 말이 옳다. 장애 속에는 한숨과 눈물과 빈곤과 박탈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고난이 위장된 축복임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축복을 안고 오는 변장된 축복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고통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게 체험할 수 있다. 시편 119편 67절 이하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고난이란 문제가 아니라 기회와 축복이 될 수 있다.

둘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이 형성된다.

영어에서 행복(happy)이란 발생하다(happen)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다시 말해 행복이란 환경에 의해 늘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blessing)의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인격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의 인격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가시밭길을 가게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욥기 23장 10절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길을 예비하셨다. 그러나 이것을 감당할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길은 패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인격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사용하신다.

실제 고난의 현장에서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장애인이 처음으로 나타내는 반응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룻 1:20)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시 55:5-6). 고난의 유익이라는 교훈이 와 닿을리 없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는 한 사태는 더 악화될 뿐이다. 내부에 가지고 있는 분노는 자기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면 인격은 고착상태에 빠지거나 의존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장애는 저주이다. 장애가 결코 축복은 아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정상인이 경험하지 못하는 높은 가치를 장애인은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3) 장애는 죄의 결과인가

우리 문화와 의식의 저변에는 질병이나 고난의 원인이 죄와 악덕에 있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요약하건대 현재의 삶은 전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을 업보라 하는데 선행이나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연을 끊을 수 없다고 한다

.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질병과 고통은 내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전생의 악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불가항력적 인과응보'라 지칭하고자 한다. 이 같은 사상은 결국 장애는 숙명적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자신의 죄로 인해 온욕과 문둥병 혹은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에 한정하는 인과응보라는 점에서 윤회사상에 근거한 인과응보와 차이가 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말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욥 4:7-8).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바스의 주장이 욥의 말처럼 정당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다(욥 42:7). 하나님의 능력은 권선징악으로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는 사랑과 권능과 신비의 세계이다. 예수님은 고통은 죄와 관계없는 것으로 말한다.

특히 장애 문제와 관련하여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 주님 저기 보세요 날 때부터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저 불쌍한 사람은 누구의 죄값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죄값도 아니요 자기의 죄값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라고 하여 장애가 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4) 장애는 사단의 역사인가 장애는 귀신의 역사인가.

특히 정신장애와 관련하여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우울증 강박증 자폐증 등을 가진 정신질환자에게서는 공격성 불안감 현실기피증 공포증 등 복잡한 심리상태가 나타난다. 이러한 성향이 귀신들린 자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므로 장애가 혹시 악한 세력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쉬운 점은 이 질문이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귀신은 손으로 만지거나 확인할 수 없는 영적 존재이고 그 활동이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첫째 귀신들림이 사실로 존재하며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현대 정신의학자의 99%는 악한 영 즉 마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 실체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마귀가 존재한다고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선한 영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성경에서 이같은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마태복음 7장 14절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간질병자를 향하여 그 몸에서 나올 것을 명하자 귀신이 빠져 나왔다. 이밖에 예수님은 군대귀신을 만나 저들로 하여금 돼지의 무리에 들어가게 하여 강물에 빠져 죽게 하신 일도 있다. 그러면 귀신들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귀신들림이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어떤 사람이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귀신이 뛰어나와 그의 속으로 쏙 들어 갈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귀신들림이란 당사자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반복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라 하겠다.

예컨대 외로움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자는 처음에 귀신을 상상 속의 친구로 자기 속에 받아들인다. 즉그는 우정에 대한 귀신의 거짓된 약속을 받아들인다. 계속해서 악의 세력이 이들 가운데 역사하는 것은 이들이 사탄 없이는 죽게 될 것이라는 사탄의 위협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사단이 갖고 있는 유일한 힘은 거짓을 믿는 인간의 신념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둘째 귀신이 모든 악에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악이 있는 곳에 늘 귀신이 역사하는가. 물론 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도 선한 것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서 지고의 선은 예수님 자신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저를 믿는 자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역은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살리는 일이며 이것이 기독교적 선의 내용이다. 그러면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죽이는 일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죽이고 인간성을 파괴하고 가족과 공동체를 분열하고 해체하는 모든 것이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악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악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자연의 악, 인간의 악 그리고 귀신의 악이 그것이다. 자연악이란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악이란 살인 절도 간음처럼 인간이 욕심을 가지고 고의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귀신의 악이란 사단이 인간의 의지와 의사를 조종하여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보면 일반악과 귀신악은 서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는 악 가운데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애 특히 정신장애에 사단이 역사하는 경우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유전적 혹은 신체적 결함이나 심리적 손상으로 인한 장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영혼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도 질병이나 장애의 경우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는 아주 적은 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항이 있다.

하나는 자연악 인간악이 귀신악과 분명하게 구분되어 나타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에서 보듯이 귀신들린 간질병환자의 경우에 간질병으로 인해 귀신이 들리게 되었는지 아니면 귀신들려서 간질병이 유발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앞에서 귀신들림이 자신의 영혼을 파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유발된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오히려 귀신의 역사가 인간악에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귀신의 역사가 부차적인 인격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인격에 숨어서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필요한 경우에 본색을 드러낸다. 신뢰할만한 심령과학자에 따르면 한 인격이 완전히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귀신들림이라고 말하는 모든 경우는 보다 정확히 말해 부분적이거나 불완전한 사단의 역사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한 인격이 귀신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사단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의 영이라 하겠다. 그 이중성과 나르시즘(자기중심주의)을 바로 파악하여 사단에 조종 받고 있는 사례를 신중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5) 장애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사실 고난당하는 당사자만큼 괴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이란 당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는 별개의 영역이다. 잠언 14장 10절에 보면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욥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판단하는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 하였다(욥 16: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고통은 거룩하고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장애인이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면하는 거룩한 현장이다. 이에 대해 사람이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만이 아신다(시 37: ). 따라서 함부로 위로하려 하거나 상황을 자의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사례를 욥기에서 발견한다.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들이 욥과 논쟁하면서 몇 가지 잘못을 범한다.

첫째 엘리바스는 욥이 경험하는 삶의 정황을 욥과 함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욥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한숨과 아픔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어 교훈한다.

둘째 엘리바스는 자신의 입장에 서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욥의 재앙은 그가 악을 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엘리바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율법의 대변자이지 욥의 대변자로 보기는 어렵다. 즉 율법의 정의를 욥에게 적용하여 욥의 잘못을 훈계하는 것이 엘리바스의 상담이었다. 이것은 욥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셋째 엘리바스는 욥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욥을 판단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를 피할 길은 회개하여 돌이키는 길 밖에 없다는 일반원리를 욥에게 억지로 적용하고 있다. 사실 욥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또 욥의 고난은 사단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이 이를 인정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욥의 고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엘리바스는 이런 욥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런 대화의 반복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더 큰 시험거리가 될 뿐 아니라 재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엘리후는 욥의 입장에서 대면하고 있다. 여기에서 장애인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자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 엘리후는 자신의 확신이나 논리 또는 신앙적 지식으로 욥을 정죄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는 욥의 고통 과 회의와 절망을 먼저 듣고 이해한다(욥 33:7-11). 욥의 이같은 태도를 불신앙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본능적으로 항변하고 분노하며 탄식하기 때문이다. (2) 엘리후는 욥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욥 33:15-20). 어느 누구도 장애인을 대신하여 장애를 짊어질 수는 없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고 그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 힘과 역량을 키우지 않으면 안된다.

가족이나 사회가 그들을 대신하여 답을 찾고 그에게 지시한다면 결국 고난 당한 자는 자신을 상실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종속적 인간이 되고 만다. (3) 엘리후는 욥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한다. 사람이 문제에 부딪히면 그것 때문에 시야가 가리워져서 사실을 좁게 왜곡되게 그리고 비합리적으로 보게 된다. 욥은 하나님이 죄없는 자기를 이유 없이 괴롭히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자신은 의롭지만 하나님의 처사는 불의하다고 부르짖는다.(욥기 33장 34장). 욥의 말처럼 정말 하나님은 불의하며 폭력적이며 죄없는 인생을 괴롭히는 분일까.

엘리후는 욥의 이런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욥기 33장에서 37에 걸쳐 지적하고 바로 잡는다(욥 34:9-12). 왜곡된 시각이 장시간 방치되면 인격장애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4) 엘리후는 욥이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욥기 32장에서 갑자기 등장한 엘리후는 37장이 끄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욥기 38장부터는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을 깨우치며 치유하시며 구원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엘리후의 사명과 역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욥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까지 인도하는 것이다. 고통하는 자의 문제를 인간이 모두 해결하겠다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장애 등 고통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4. 장애인의 복지를 위한 제안

1)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야 한다.

전체 장애인 가운데 등록장애인은 20%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장애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등록하지 않고도 살아갈 만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저변에는 내가 혹은 내 가족이 장애인의 오명을 쓰기에 너무 불명예스럽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장애를 정신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장애인은 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야하는 기본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울증이 심화되지 않기 위해서다.

장애인이 겪는 심각한 정신적 혼란은 상실감과 정체성의 상실이다. 장애를 입게 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경제력 인간관계 취미활동 등을 잃게 되면서 장애인은 심각한 상실감에 빠진다. 이보다 더 큰 정신적 손실은 정체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장애가 장기화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이 없어지면서 극심한 무력감에 빠진다.

다른 하나는 좁은 생각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몸이 갇혀 있으면 생각과 의식도 편협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인격의 장애를 초래하는 바 완고하거나 소극적인 성격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부정적인 결과를 예방할 수 있기 위하여는 장애인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한 가정에 장애인이 생기면 심정적으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죄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동정심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죄의식이 클수록 동정심은 더 강해진다. 그러나 장애가 죄로 인한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그리고 장애의 문제를 동정심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동정심의 다른 형태로 부모의 과잉보호가 있다. 이것은 자식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부모가 미리 알아서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절제되지 않으면 장애인을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장애인처럼 스스로 자활할 수 없는 자를 과잉보호하면 인격성장의 기초가 무너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재활의지가 꺾이고 문제를 대항할 저항력이 쇠퇴한다. 이런 현상이 특히 장애인에게 두드러진 것은 장애인은 늘 도움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부모님의 동정심이 절제되고 조절되지 않고서는 장애인의 진정한 재활은 어렵게 된다. 이 점은 국가의 복지정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가가 장애인의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재활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사회복지는 재고되어야 한다. 특히 젊은 장애인들에게는 생활보장보다 스스로 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재활교육이 요망된다.

3) 사회화가 가능하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정상인과 같은 생활방식을 취하기에는 몸이 너무 불편하다. 둘째 이와 같은 장애를 극복할만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셋째 장애인을 수용할만한 교육적 직업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잠재력을 개발하여야 한다. 장애 때문에 소질과 잠재력 마저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반면 소질을 개발하면 정상인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교육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이태리의 몬테소리는 정신박약아를 이런 식으로 교육하여 정상적인 직업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 장애인을 정상인과 분리하지 않고 교육현장에 참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을 통해 정상적인 의식과 생활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공하기 위하여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인이 적응하는데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하여 상담하고 지도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 장애인과 정상인을 섞어 놓으면 장애인은 상처만 입고 교육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 장애인의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돕는 사회봉사활동에 대하여 혜택을 주는 장치가 확대되어야 한다. 학생에게는 장학금이나 학점취득의 혜택을 줄 수 있다. 직장인에게는 수당을 지급하거나 근무성적에 반영하는 등의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4) 직업재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직업재활은 장애인 재활의 최종 목표이자 꽃이라고 생각한다. 직업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이 일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실 장애의 초기단계에서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이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직업이다. 직업활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회화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1)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장애는 사회와의 단절을 초래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응력이 떨어지고 정상세계를 외면하는 기피증이 생기게 된다. 무엇보다 정상인과 함께하는 직업활동이 가능하면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경제력을 회복하여 의존적인 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 경제적인 자립은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하면 자주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 또 이는 젊은 청년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꿈을 준다. 장애인들에게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본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3) 자존감을 충족케 하여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을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역할의 중심부에 직업활동이 존재한다. 이것이 회복되면 자존감은 물론 인간관계가 회복된다.

장애인에게 직업활동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근로자의 2%를 장애인으로 충원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은 장애인을 고용하여 인건비를 지불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규정을 위반하여 범칙금을 지불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런 의식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장애인의 진정한 사회화를 기대할 수 없다. 다음으로 장애인의 고용이 정착하기까지는 아직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컨대 장애인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직종에 대하여는 상당부분 독점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 또 장애인의 직업재활에 필수적인 프로그램 등에 대하여는 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발비용을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지원이 없이 장애인이 자생적으로 직업활동을 개척해 나가는데는 한계가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 변화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정부가 제도적으로 장애인의 편의와 복지를 마련하면 그 의식의 변화는 상당히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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