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펀글... 음악 숙제 하다가 별일이죠 ^^;;
마틴 루터는 예고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순수한 열정이 길어야 40년 지나면 식어버린다고 말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긴 영적 암흑의 잠에서 깨어난 유럽의 성도들은 그들의 감격스러웠던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탐욕과 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가 잘못되어 갈 때마다 구약의 경우처럼 소수의 선지자들을 보내 교회를 정화시키고 교회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었다. 독일에는 17세기 중반에 몇몇 선지자들이 보냄을 받았다. 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년)는 경건주의(Pietism) 운동을 일으키고 교회의 영성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Halle가 경건주의 본고장이 되었고 그 곳에 대학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인 August Hermann Francke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어린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과 자립을 심어주었다. Francke으로부터 교육받은 Count von Zinzendorf는 일찍이 존 허스의 추종자들이 만든 모라비아 형제단들을 보호해 주는 피신처를 제공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모라비안 교회를 세우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1732년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기독교를 미지의 세계에 알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1727년 성령께서 헤른후트에 강하게 임재하시는 역사가 일어나 그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모라비아 선교운동으로 발전 되었습니다. 이 선교운동은 독일 개신교 안에서 가장 첫 번째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이었습니다. 사소한 교리의 논쟁보다 하나님에 대한 의뢰심과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일주일 내내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도운동은 100년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성령임재후 5년후(1732년) 서부인도로 첫 선교사를 파송한 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며 형제단 교회의 선교사들은 세계 각 곳에서 꾸준히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전 18세기 동안에 60명, 진젠도르프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26명, 이후 200여년에 걸쳐 서인도에 3,000여 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모라비아 교회는 교인 92명에 한 사람의 비례로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본국 교회의 신자수의 3배나 되는 특유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 모라비아 형제단의 선교사들보다 더 개척적인 역할을 하고, 갖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또한 고난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달게 받으며,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의 영들을 구원하기 위해 활동한 선교사는 없을 것입니다.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은 그리스도 교회보다 오히려 더 큰 유산을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남겼습니다. 존 웨슬레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 것은 모라비아 교도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라비아 성도들을 통해 배울 점은 첫째, 경건주의 운동을 통한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경건의 운동으로 기도를 사모하였으며, 그들의 메세지는 단순이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었습니다. 원주민들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지 않고 함께 잘 어울렸으며, 교리보다 그들은 삶으로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존웨슬레가 폭풍의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는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으로 감화 받고, 가식의 신앙을 회개케 할 정도였습니다.
둘째, 그들의 불타는 선교 열정입니다. 그들은 성직자도 아니고 신학자의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가가의 죽으심을 은혜를 통해 항상 복음전파에 온 심열을 쏟았습니다. 선교사역을 위해 아내와 가족을 떠나기도 하였고 룬은이들은 되도록 독신으로 있기를 원했으며 결혼하는 경우 그 배우자를 제비 뽑기로 결정 할 정도였습니다.
셋째,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은 또한 그들의 위선과 가식없는 성도간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통계학적으로 어떤 모임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6명만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그 모임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선교사역을 위해 똘똘 뭉쳤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예고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순수한 열정이 길어야 40년 지나면 식어버린다고 말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긴 영적 암흑의 잠에서 깨어난 유럽의 성도들은 그들의 감격스러웠던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탐욕과 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가 잘못되어 갈 때마다 구약의 경우처럼 소수의 선지자들을 보내 교회를 정화시키고 교회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었다. 독일에는 17세기 중반에 몇몇 선지자들이 보냄을 받았다. 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년)는 경건주의(Pietism) 운동을 일으키고 교회의 영성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Halle가 경건주의 본고장이 되었고 그 곳에 대학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인 August Hermann Francke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어린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과 자립을 심어주었다. Francke으로부터 교육받은 Count von Zinzendorf는 일찍이 존 허스의 추종자들이 만든 모라비아 형제단들을 보호해 주는 피신처를 제공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모라비안 교회를 세우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1732년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기독교를 미지의 세계에 알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1727년 성령께서 헤른후트에 강하게 임재하시는 역사가 일어나 그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모라비아 선교운동으로 발전 되었습니다. 이 선교운동은 독일 개신교 안에서 가장 첫 번째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이었습니다. 사소한 교리의 논쟁보다 하나님에 대한 의뢰심과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일주일 내내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도운동은 100년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성령임재후 5년후(1732년) 서부인도로 첫 선교사를 파송한 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며 형제단 교회의 선교사들은 세계 각 곳에서 꾸준히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전 18세기 동안에 60명, 진젠도르프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26명, 이후 200여년에 걸쳐 서인도에 3,000여 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모라비아 교회는 교인 92명에 한 사람의 비례로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본국 교회의 신자수의 3배나 되는 특유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 모라비아 형제단의 선교사들보다 더 개척적인 역할을 하고, 갖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또한 고난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달게 받으며,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의 영들을 구원하기 위해 활동한 선교사는 없을 것입니다.
진젠도르프와 그의 형제단은 그리스도 교회보다 오히려 더 큰 유산을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남겼습니다. 존 웨슬레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 것은 모라비아 교도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라비아 성도들을 통해 배울 점은 첫째, 경건주의 운동을 통한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경건의 운동으로 기도를 사모하였으며, 그들의 메세지는 단순이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었습니다. 원주민들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지 않고 함께 잘 어울렸으며, 교리보다 그들은 삶으로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존웨슬레가 폭풍의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는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으로 감화 받고, 가식의 신앙을 회개케 할 정도였습니다.
둘째, 그들의 불타는 선교 열정입니다. 그들은 성직자도 아니고 신학자의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가가의 죽으심을 은혜를 통해 항상 복음전파에 온 심열을 쏟았습니다. 선교사역을 위해 아내와 가족을 떠나기도 하였고 룬은이들은 되도록 독신으로 있기를 원했으며 결혼하는 경우 그 배우자를 제비 뽑기로 결정 할 정도였습니다.
셋째,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은 또한 그들의 위선과 가식없는 성도간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통계학적으로 어떤 모임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6명만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그 모임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선교사역을 위해 똘똘 뭉쳤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출처 : 수서 은혜교회 청년들
글쓴이 : joonkp 원글보기
메모 :
'목회자료 >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퇴짜는 퇴보가 아닙니다 (0) | 2007.05.22 |
---|---|
[스크랩] 주일학교만 5천명 모이는 경이로운 교회 (0) | 2007.05.16 |
[스크랩] 모라비아 교회 (18c) (0) | 2007.05.07 |
[스크랩] 하나님의 생각 (0) | 2007.05.01 |
[스크랩] 잘못된 기도의 4가지 유형 (0) | 2007.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