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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정표야, 너 너무 멋졌어” “엄마, 고마워” -백혈병으로 천국으로 간 소년

김노섭-열린문 2007. 3. 5. 11:37
“정표야, 너 너무 멋졌어” “엄마, 고마워”



2005년 8월 계속되는 항암치료 중 잠시 퇴원 허락을 받은 정표는 가족과 함께 광복절 연휴를 맞아 충북 진천군의 한 저수지로 낚시 여행을 떠났다. 피라미 10여 마리를 잡은 정표가 흐뭇하게 웃고 있다. 사진 제공 이정표 군 가족

●희망을 그리다

드디어 정표가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8월 19일, 내 생애 역사적인 날. 일본에서 일치자(골수 유전자가 정표와 일치하는 사람)가 나와서 동의를 받고 정밀검사를 했는데 100% 맞는다고 한다. 100% 맞기는 로또보다 더 어렵다는데, 이제 그분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기증을 해서 내가 이겨 내면 완치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골수이식을 기다리며 정표는 초조했다.

“9월 20일, 이제 입원하면 골수이식 수술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번에 입원하면 (치료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사이톡산’이라는 ‘아라시’의 강도 20배가 넘는 항암제를 맞아야 하고 방사선 치료까지 해야 한다. 성공률은 70%라고 책에서 봤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인데 걱정이 된다.”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인 10월 27일 드디어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다. 정표는 자신에게 이식될 골수를 보는 순간 “감격과 설렘으로 화산이 폭발하는 듯 벅찼다”고 적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골수를 기증해 준 46세의 이름 모를 일본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46세의 남자분께. 아저씨, 저에게 소중한 골수를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골수를 주지 않으실 때도 있었는데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참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정말 제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어요. 아저씨가 주신 골수 소중하게 받았고, 잘 살게요.”

●끝없는 고통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지만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항암치료로 목이 붓고 온몸은 간지러웠다. 피를 한 덩이씩 토해 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정표는 또래의 죽음을 경험한다.

“11월 25일, 내 또래인 임지원(가명)이라는 아이, 같이 생활한 지 일주일이 돼 어색함도 슬슬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데 3, 4일 전부터 상태가 안 좋더니 결국 오늘 오전 10시부터는 호흡기를 달고 심장에 충격이 가해졌다. 그런 모습을 처음 봐서 무서웠다. 45분쯤 지나자 주치의가 날 밖으로 내보냈다. 잠시 뒤 들어왔는데 지원이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나중에 저녁쯤 엄마한테 들었는데 결국 죽었다고 한다. 아직 치료도 시작 못 했고 곧 있으면 생일도 돌아올 텐데…. 지원아, 비록 여기선 힘들었지만 천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

2005년 말 정표 몸에 이상이 생겼다. 항생제가 계속 투입되면서 피오줌이 나오기 시작했다. 피 찌꺼기가 요도를 막은 것이다. 당시 정표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일기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2월 29일, 긴급 상황임. 오늘 새벽도 한숨 못 잤음. 초음파 검사 결과 출혈성 방광염이라 소변 줄을 꽂았는데 너무 아팠음. 정신없이 울고, 꽂고 난 후에도 거의 경기 일으킴. 골수검사 하는 것보다 훨씬 아파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진정이 안 됐음.”

이날 일기는 유독 모든 문장이 명사형으로 끝난다. 고통이 너무 심해 글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그렇게 쓴 것.

요도가 막히면 방광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식염수를 투여해 계속 오줌이 나오도록 한다. 그 고통이 산고(産苦)와 비슷해 통증이 매우 심하다가 다소 완화될 때가 있다고 한다. 정표는 고통이 잠시 멎는 순간 어머니 김순규(41) 씨에게 일기장을 가져다 달라고 했고 자신의 고통을 정신없이 일기장에 써 내려갔다.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으로 뼈엉성증(골다공증)도 점점 심해졌다. 혼자서는 건물 한 층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표의 의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31일,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 아파서 펑펑 울고 진통제를 먹었다. 너무너무 힘들다. 진짜 괴롭다. 심할 땐 죽고 싶다. 아파서 기지개도 제대로 못 켠다.”

●그만 힘들었으면…

“2007년 1월 3일, 으아악! 이러다가 1주일 안에 난 어떻게 될 것이다. 하루하루가 너무 심해지고 있고 입이 아파서 죽을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난 이제 한계다. 엄마가 아침에 쌀을 갈아서 미음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도 아프다. 우유도 아프고 물도 아프고 식염수도 아프고 죽을 것 같다. 누가 좀 살려 줬으면 한다.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

정표의 입 안은 모두 헐어 피투성이가 됐다. 그리고 8일 뒤인 1월 11일 오후 8시 정표는 마지막 일기를 쓴다.

“긴장. 수혈도 받고 촉진제도 맞았는데 (혈소판) 수치가 갑자기 떨어졌다. 오전엔 너무 힘들어서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입이 조금씩 나아서 오늘 갈비탕을 사다 먹었다. 씹기는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뭐 좀 먹은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이렇게 힘들게 이겨 내면 다시 신나게, 즐겁게 보낼 날이 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과 달리 정표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12일 오전 4시경 정표가 경기를 일으켰다. 6인실에서 급히 1인실로 옮겨졌다. 주치의는 전날 정표 부모에게 “언제 급박한 상황이 올지 모르니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일러뒀다.

1인실에 가족이 모두 모였다. 아버지 이규선(46·국민건강보험공단 근무) 씨, 어머니 김 씨, 형 웅표(15) 군. 김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표야 사랑한다. 너 너무 멋졌어. 최고였어. 잘했다.” 정표도 힘겹게 입을 뗐다. “고마워.”

이 씨가 말을 이었다. “우리 빨리 나아서 가 보고 싶은 곳 다 가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우리 바다로 여행 가기로 했잖아.” 정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표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14일 오전 8시 14분 힘겨운 삶을 마감했다.



●영혼 되어 떠난 가족여행

장례를 마친 가족들은 16일 정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학교로 향했다. 방학인데도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 학생 30여 명이 운동장에 나와 정표를 맞았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 정표네 가족이 향한 곳은 강원 고성군 화진포. 2004년 8월 건강했던 정표와 가족들이 함께 휴가를 즐긴 곳이다. 당시 정표는 신이 나서 “앞으로 매년 화진포에 오자”고 했다.

아버지 이 씨는 약속했다. “다음에는 승용차를 타고 편하게 여행하자.” 당시 승용차가 없던 정표네는 텐트와 배낭을 짊어진 채 버스를 갈아타고 왔다.

가족은 정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정 사진을 창밖으로 돌린 뒤 정표와 대화를 나누며 여행길에 올랐다.

수백 번 터져 나오는 울음을 되삼키며 “정표야, 야외로 나오니까 좋지?”, “정표야, 저 산 좀 봐” 하며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강원 원주시에 이르렀을 때 이 씨는 더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정표야! 쉬었다 가자.” 가족은 한 여관에 들어가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정표와 여행을 떠났다. 화진포로 가기 전 강원 속초시 대포항에 들렀다. 거기서 정표가 좋아하는 새우튀김과 오징어순대, 대게, 호두과자를 샀다. 화진포에 이르러 정표의 유골을 뿌렸다. 정표가 외롭지 않도록 학교 운동장에서 가져온 모래 한 줌과 정표가 좋아하던 음식이 정표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곧이어 갈매기 떼가 모여들었다.

이 씨는 울부짖었다. “정표야! 새장에서 벗어나 망망대해로 가서 자유롭게 살아라!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 천국에서 모두 이루고 살아라!”

●에필로그

정표가 골수이식 뒤 무균실에 있을 때의 일. 정표가 뜬금없이 엄마에게 말했다.

“난 비싼 등록금을 내고 사립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학원에서 과외 받는 친구들 전혀 부럽지 않아. 왜냐고? 난 병원이라는 학교에서 소아백혈병이라는 전문과목을 1년 동안 온몸으로 배웠고 숨쉬고 살아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일인지 알잖아. 난 친구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1억 원짜리 고액 과외를 받았어.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학교 다닐 때는 운동장의 흙을 밟고 다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흙이 너무 감사해. 한 줌 흙을 떠서 혹시라도 거기서 지렁이가 나오면 ‘오! 아가’ 하며 살아 꿈틀대는 모습에 감격할 거야.”

고 이정표 군의 명복을 빕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주변의 따뜻한 사랑 투병 아이들에 큰힘”

“엄마, 날다람쥐를 새장 속에 가두었어. 나도 내 마음대로 일어나고 걸어 다녀보고 싶다고요.”

고달프고 서러운 하루를 잘도 참아내 준 내 아들아! 정말 애썼다. 정말 고맙다. 올림픽대로의 차들이 힘차게 달리고 있다. 병실에서 바라다 본 야경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생명덩어리다. 달리는 차가 생명의 불빛으로 보인다. 저 빛나는 찬란한 도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불빛의 주인공은 행복한 사람이다. 건강한 불빛 행렬에 우리도 끼고 싶다. 꼴찌라도 좋으니 같이 가고 싶다. 이 어두운 긴 밤이 지나고 어서 가벼운 아침이 오기를 소망한다.

정표의 어머니 김순규 씨가 지난해 4월 한국혈액암협회 홈페이지에 남긴 글 중 일부다.

‘꼴찌라도 좋았을’ 정표네 가족에게 하늘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정표가 떠나고 일주일이 지난 22일 오후. 서울 강서구 등촌동 정표 집에서 김 씨를 만났다. 김 씨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게 감사하다고 했다.

“정표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견뎌낸 것은 일기나 가족의 힘만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 준 주위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정표가 아픈 뒤 이웃이 다 제 가족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를 잃었지만 정표가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외롭지 않게 지켜 준 담임선생님과 목사님, 남편의 직장 동료들 그리고 정표 친구들과 그들의 어머니께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와 정표가 받은 사랑을 그분들께 돌려드리기 위해 다시 시작할 겁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정표의 삶은 세상에서 그저 흘러가는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를 통해 사람들의 가슴이 잠시라도 따뜻해진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픕니다. 더 아프고 덜 아플 뿐입니다. 현재 투병하고 있는, 또 앞으로 병마와 싸우게 될 아이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사회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